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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가 결정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대법제자의 수련에서 구세력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정법을 좌지우지하려 하고 그것들의 배치를 대법제자에게 강요하려 한다. 구세력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에 의해 결정된다. 사부님의 설법에 참조하여 개인의 깨달음을 말하고자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1] 만약 대법제자의 사람 마음이 모두 닦아 없어졌다면 구세력은 빈틈을 탈 명분이 없게 되고 그것들의 배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때는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대법제자에게 사람 마음이 있을 때만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존재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사람 마음이 있는 상황에서도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구세력의 배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알려 주셨다.

예를 들면 수련생이 대면하여 진상을 알릴 때 경찰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면 누군가에게 신고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시각부터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선택할 것은 눈앞의 체포행위를 부정하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의 깨달음을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우선 자신의 사상 속에서 이런 불법적인 박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것은 국가의 어떠한 법률도 위반하지 않은, 완전 합법적인 행위이다. 경찰이 사건을 처리하는 원칙은 법률에 따르는 것이다. 법을 위반하지 않았는데 경찰이 우리를 체포한다면 곧 위법이며 범죄행위에 속한다. 이때 수련생은 체포에 응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수련생은 대중 앞에서 경찰에게 질문할 수 있다. “경찰이 안건을 처리하는 원칙은 법률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세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는 것은 국가의 어떠한 법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나는 법을 위반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체포하는가? 당신은 법을 위반한 것이다. 나는 이런 무리한 박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절대로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구세력의 배치를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다.

아래에 예를 하나 들겠다. 밍후이왕 문장 ‘사부님의 보호 하에 세인을 구도하다(師父保護下救度世人)’중에서 썼다: 또 한 번은 수련생과 한창 길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있었다. 갑자기 순찰차에서 사복경찰 세 명이 내리더니 그중 두 젊은 경찰이 큰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디에서 온 자료인데 또 배포하기 시작하나요, 갑시다! 우리와 함께 (경찰)서로 가서 얘기합시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갑니다! 할 말이 있으면 여기에서 말하세요!” 이어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주었다. 이때 다른 한 수련생이 지혜롭게 자료를 가지고 이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에 키 큰 한 경찰이 말했다. “돌아가세요. 이제는 배포하지 마세요.” 보기에 위험했던 상황이 이렇게 사존의 보호 아래 종결됐다.

여기에서 인정과 강요를 설명하고자 한다. 만약 경찰이 당신에게 차에 오르라고 할 때 당신이 주동적으로 차에 올랐다면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속하고, 만약 당신이 차에 오르지 않고 경찰이 차로 끌어 올렸다면 경찰의 행위는 곧 강요에 속한다.

만약 경찰을 조종하는 사악이 없다면 그는 대법제자 앞에서 ‘좋지않다(不好)’는 ‘안(不)’자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대법제자는 신이고 그는 사람이기에 감히 말하지 못한다. 경찰이 대법제자를 건드리려면 뒤에 반드시 사악이 따라 다니면서 조종해야 대법제자를 붙잡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사악이 일함에도 구 우주 이치의 제약을 받는다. 법을 위반하는 일을 그것들은 하고 싶어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한다. 우리가 속으로 이 박해를 단호하게 부정하고 행동에 옮겨 절대로 차에 오르지 않는데, 사악이 경찰을 조종하여 강제로 차로 끈다면 이는 곧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속한다. “승인받지 못하고 강제로 박해하는 것은 법을 범하는 것이다.”[2] 사악은 곧 깨끗이 제거된다.

대법제자로서 말하자면 비단 구세력의 배치를 단호하게 부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확고하게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해야 한다. 만약 진상을 알려 경찰을 구했다면 사악은 경찰을 통제하지 못하고 박해하는 자가 없게 되어 역시 결속된다. 이로 봤을 때 만약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전면적으로 잘 한다면 곧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배제할 수 있다.

어떤 수련생은 경찰이 차에 오르라고 하면 스스로 걸어 올라가는데 이렇게 하면 인정을 선택한 것이다. 원인은 사람 마음에, 경찰은 그 수도 많고 세력도 크며 배후에 또 중국공산당이 있기에 저항해도 소용없고 실현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어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수련생이 문제를 이렇게 보게 된 원인은 이번 박해를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박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람 눈으로 세상을 보면 평면적으로 보는데, 한가지 사건이 발생한 후 인간 세상에서의 표현만 본다.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입체적으로 보는데, 이 일에 대한 우주 각 층 공간의 전체적인 표현을 본다. 오로지 이렇게 문제를 봐야만 전면적으로 볼 수 있고 사건의 전체 상황을 보아낼 수 있다. 대법제자가 문제를 볼 때 신(神)처럼 문제의 실질을 보아내고 경찰의 배후 다른 공간에 구세력이 따른다는 것을 보아내야 한다. 수련생의 배후 다른 공간에는 사부님의 법신과 호법신(護法神)이 따른다. 이것이야말로 쌍방의 진정한 실제상황이다.

사실 어떤 수련생은 마음속으로 사악의 요구에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상 속에 속인의 관념이 하나 있다. ‘내가 경찰에 협력하지 않을수록 경찰은 나를 심하게 박해할 것이다.’ 이런 두려운 마음에 이끌려 경찰에 협력하고 만다. 이 관념은 속인 생활 속에서 비교적 현실에 부합되지만, 수련 속에서는 정반대이다. 당신이 경찰의 요구에 협력한다면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한 것이고 구세력은 당신을 박해할 이유가 생긴다. 만약 당신이 경찰의 요구에 협력하지 않고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구세력은 오히려 당신을 박해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 때문에 수련인의 이치는 속인의 이치와 흔히 반대되는 것인바 만약 속인의 이치를 수련 중에 응용한다면 역효과만 일으킬 뿐이다.

사실 수련생이 납치된 후의 매 한 걸음은 거의 다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 선택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만약 전에 잘 하지 못했다 해도 낙담하지 말라. 지금부터 눈앞의 선택을 옳게 하면 된다. 박해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련생은 박해 중에 고문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데 사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다짜고짜 혹형을 들이대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이전 매 한걸음에 선택을 잘 하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박해가 발생하려 할 때 확고하게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납치도 발생하지 않는데 고문이 다 무슨 말인가? 설사 이미 납치당했어도 눈앞의 이 한 걸음을 잘 선택하면 박해는 즉시 제지되고 고문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설사 이전에 잘 파악하지 못해서 고문당하는 일보에까지 왔다 해도 이 또한 체포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확고하게 고문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진짜로 해냈다면 사부님의 법신은 당신을 보호하고 경찰은 다른 공간에서 사악이 시키는 박해를 하지 못한다.

중국대륙의 일부 수련생의 사상 속에 한가지 관념이 있다. ‘만약 나에게 사람 마음이 있으면 구세력에 빈틈을 내주어 박해당하게 될 것이다.’ 구세력은 대법제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당신들에게 사람 마음만 있으면 곧 빈틈을 타서 당신들을 박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 자신들이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구세력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박해하는가를 둘러싸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은 구세력에게 자신을 박해하는 이유를 찾아 주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가? 마땅히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안으로 찾아야 한다. 사부님의 요구를 둘러싸고 안을 향해 찾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진정하게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직지인심으로서 어떠한 부가조건도 없이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것이다. 사람 마음을 찾아낸 후 닦아 버리고 심성을 제고하여 대법에 동화한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법 속에서 자신을 승화한다. 우리가 마음을 바로잡은 후 정념으로 일을 하면 곧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것이고 법을 실증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부터 말해서 만약 우리가 줄곧 마음 수련을 첫 자리에 놓고 수시로 안을 향해 찾고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정념 정행 할 수 있다면 구세력은 우리를 교란할 기회도 없다. 우리 또한 어떻게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겠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고 부정할 필요 역시 없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어떤 수련생은 납치당한 후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 행위에서는 협력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전면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데에 중시하지 않아 변상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게 된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라, 구세력이 우리를 교란하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잘하지 않으면 마침 구세력의 생각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납치당한 후 마음속으로 즉시 무슨 방법을 대어 박해를 결속 짓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구(求)해낸 마음이 자기 생각을 주재하여 마음 놓고 세 가지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구세력이 배치한 이번 박해는 대법제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표현형식에서 보면 그것은 박해이고, 수련인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실질상 수련의 길에서 만난 마난(魔難)이다. 진정으로 박해당한 것은 대법제자가 아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정하게 박해당한 이는 세인이다.”[3] 우리가 진정으로 결속 지으려는 것은 구세력의 세인에 대한 박해로서 세인을 구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법제자로서 말한다면 반드시 수련인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봐야 한다. ‘사람을 구하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사부님의 요구만 마음에 담는다. 어디에 가든 대법제자의 자비를 가져간다. 지역 구분이 없고 사람에 대한 구별이 없이 가는 곳마다 사람을 구함에 전력을 다해 자비롭게 구도하고, 서약을 실천하여 사명을 완성한다.

이상은 개인이 현 단계 수련에서의 얕은 깨달음이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자비로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 2-別哀(슬퍼하지 말라)’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1-2010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4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15/3851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