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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선으로 원한을 풀다

글/ 후베이(湖北) 대법제자 우림(雨林)

[밍후이왕] 저는 파룬따파 여제자로 올해 63세입니다. 저는 인생 속에서 많은 것을 겪어왔습니다. 저는 운명이란 하늘이 배치한 것으로 만사에는 모두 인연이 있다고 믿습니다. 인생 중에서 얼마나 큰 좌절을 겪든지 언제나 선량함을 잘 지켜내야 하며 선량함이야말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항구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고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몇 가지 이야기를 벗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 남의 집 눈칫밥을 먹고 자라다

어린 시절 저의 집은 시골에 있었습니다. 제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외삼촌이 서른이 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아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부모님은 네 남매 중 셋째인 저를 외삼촌댁에 딸로 삼으라고 보냈습니다. 이치대로라면 저는 외삼촌댁에서 행복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배고픔과 추위는 제 기억 속에서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마치 어린 노예와도 같았으며 가족의 어떤 따스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먼저 배고픔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 시절 매일 방과 후에 다른 집 어른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밥과 반찬을 한 그릇 가득 솥에 남겨두었지만 저는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점심에 외삼촌과 외숙모는 하얀 쌀밥을 드셨고 저녁에는 야채국을 끓여서 마음껏 배불리 드셨지만 저는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밖에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방과 후에 저는 반드시 밖에 나가 돼지풀 한 바구니를 캐어 돌아와야 했으며 집에 오면 잘 잘라서 깨끗이 씻은 후 돼지를 배불리 먹여야 했습니다. 외삼촌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첫 번째 일이 바로 제가 돼지에게 먹이를 주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직접 돼지의 배를 만져보고 둥그스름해야 아무 말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사노동에서도 저는 힘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겨울철 밤에 저는 돼지에게 한 솥 가득 붉은 고구마 줄기를 잘라 삶아주려고 하면 종종 깊은 밤까지 지새워야 했지만 외숙모는 바느질과 같은 가벼운 일만 했습니다. 채소밭에 야채를 심을 때 외삼촌은 밭이랑을 만들고 외숙모는 채소를 심었지만 저는 배를 곯아가며 집 앞 도랑에 가서 양 손으로 물 두 통을 길어다가 분주하게 밭을 뛰어다니며 채소에 물을 줘야 했습니다. 한 번은 물을 너무 많이 길러 나른 탓에 앞마당이 완전히 젖어 단번에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몸은 아주 멀리까지 미끄러져 넘어졌고 물통은 한쪽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온몸이 아팠고 경직되었으며 숨을 내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모두 다가와 저를 부축해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외숙모는 큰 소리로 욕까지 했습니다. “눈 먼 것 같으니라고.”

저의 생모는 바로 옆집에 채소밭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보자마자 달려 나와 한편으로 외숙모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아무개(외숙모의 이름)동생, 귀찮지도 않아?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면 손해라도 보는가보네.” 어머니는 다른 한편으로 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준 다음 두 물통을 들고 여러 번이나 물을 길어다 주며 도와주셨는데, 외삼촌과 외숙모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 일가족이 그들에게 빚이라도 진 것 같았습니다.

다음 추위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하겠습니다.겨울에 제가 덮었던 이불은 외삼촌과 외숙모가 방석 솜으로도 사용하지 않던 검고 딱딱한 낡은 솜이불이었습니다.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열기가 없고 추위 때문에 오랫동안 코가 막혀서 앞이마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17살이 되던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비록 각 과목의 성적이 모두 우수했지만 그 시절에는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없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산촌이나 농촌으로 지식 청년들을 보내 노동자 농민과 함께 노동을 하고 이것을 통해 사상성을 높이고자 곤경에 빠뜨렸으므로 저도 어쩔 수 없이 농촌으로 돌아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매일 밤낮으로 일했으며 제가 번 노동점수는 전체 생산라인에서 가장 많았지만 돈을 나누고 나면 저는 오히려 1푼도 얻지 못했습니다. 겨울에는 제방을 수리하여 제방수문을 만들었고 여름에는 신발마저도 없었습니다. 해방화(역자주: 초록색 베로 만들어진 중공인민해방군 병사가 신던신발) 한 켤레를 몇 년 동안 신다보니, 나중에는 구멍이 군데군데 났는데도 새 신발을 사주지 않아 비가 오면 두 발은 마치 물속에 잠긴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제방의 계단을 수리하다가 연속 1,2개월 동안 기침을 계속 하였어도 한 푼어치의 약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만성 기관지염으로 발전 되었고 그 후 해마다 겨울이면 몇 개월씩 기침을 해야 했습니다.

2. 인생을 깨닫자 원망도 후회도 없어

외숙모는 36세 때 딸을 낳았고 이는 제 여동생입니다. 그 해 저는 이미 17살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여동생을 극진하게 보살폈습니다. 외숙모가 아이를 돌볼 줄 모르고 깨끗하게 씻겨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매일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되돌아오면 여동생을 목욕까지 시켰습니다.

80년대에 외삼촌댁은 현성(縣城)의 교외지역으로 이사를 갔는데 스스로 집을 샀으며 저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데릴사위를 얻었고 여동생과 매부는 줄곧 집에서 살며 부부가 함께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집에서 식료품 상점을 열었으며 생활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나는 23살에 중등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결혼 후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임금이 가련할 정도로 낮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아무런 생활비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아이를 돌봐줄 보모까지 들이면 식비 정도의 임금만 남아 삶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외삼촌은 사람들 앞에서 제가 자신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며 돈도 그에게 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멀리까지 전해졌고 외지에 살고 있는 친척들까지도 모두 이 말을 옮기며 전했습니다. 저는 소문을 듣고 난 후에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1996년 제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 후 사부님께서는 조금씩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로 하여금 두 번 다시 과거를 기억하지 않도록 했고 떠오르더라도 흐르지 않는 고인 물처럼 담담하도록 했습니다. 수련은 저에게 삶의 인연을 깨닫게 했고 이것은 생명이 윤회 속에서 빚진 업으로 저에게 어려움을 만들어 준 사람은 저를 도와 업을 갚는 것임을 알게 했습니다. 동시에 저의 수련의 기연을 성사시켜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는 정신을 길러주었습니다. 저는 마땅히 그분들에게 감사드려야 했습니다.

제가 원망하는 마음이 매번 올라올 때마다 ‘나는 대법제자이니 사부님 말씀대로 누구에게나 다 잘 대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하지 않는가. 수련인으로서 당신은 자비해야 한다! 나는 방금 당신이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수련 성취할 수 없고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누가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을 때, 당신이 전생에 그에게 빚진 것일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이 남에게 갚지 않으면 되겠는가? 어쩌면 그때에 당신은 남에게 지금 그가 당신을 대하는 것보다 더 악하게 했을지도 모르며, 남에게 조성한 고통이 어쩌면 이것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1]사부님의 말씀은 저의 기억을 열어주었고 저는 마치 자신이 이전에 어떻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그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의 마음은 점차 든든해졌습니다.

나중에 딸은 대학에 갔고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줄이는 것으로 돈을 조금 모을 수 있었으며 물건을 사들고 외삼촌과 외숙모를 찾아뵈며 효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이 곁에 없었으므로 저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혼자 먹는 것이 아까워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보내드렸습니다.

2003년 저는 신앙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노동교양 박해를 받았습니다. 2004년 10월 초 집으로 돌아갈 때 오빠는 저에게 몸을 보양하라며 2000위안(33만원)을 주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오빠가 저에게 준 돈을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500위안(8만원)을 보내드렸습니다. 이는 제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드린 생활비입니다. 이때 온 가족은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제가 반복해서 주장하고 나서 여동생이 받았습니다. 그 후 저는 해마다 그들에게 2000위안의 생활 보조비를 드렸습니다. 중국 전통에 따라 해마다 단오절과 추석 그리고 두 노인의 생신과 설명절을 포함한 이 다섯 번은 반드시 물건을 사들고 찾아뵙곤 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동료가 제가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커다란 선물 한 보따리를 사드리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쪽 양부모님을 모시고 모두 어떤 명절을 보내시나요?” 제가 그녀에게 알려준 후 그녀가 말했습니다. “저의 시누이도 제 시부모님의 양녀로 이름을 올렸어요. 그런데 종래로 그녀가 한 푼어치의 물건을 갖다드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방학 때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 저에게 돌보도록 할 뿐이에요. 한 번 머물게 되면 몇 개월인데 시골 토산품조차 조금도 가져오지 않아요.”

대략 2013년 무렵 외숙모는 병이 위중하여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뵈었습니다. 외숙모의 얼굴이 누렇게 뜬걸 보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습니다. 여동생 부부가 육류 장사로 매일 새벽 2시쯤 일어나 장사를 하러 나가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외숙모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배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어도 먹을 밥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저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정말로 선행을 많이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죄를 짓게 되는구나.’ 저는 밥을 먹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이므로 굶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바로 밥을 지은 후 두 노인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저는 무엇이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겪고 난 후 그러한 고통을 인간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깊이 체득하게 됩니다. 저는 너무나도 많은 배고픔을 겪었기 때문에 배고픔이 사람에게 극한의 고통을 가져다주며 음식이 없으면 생명을 지탱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활을 꾸려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내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 이런 보복 심리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을 위해 생각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줄곧 그들에게 밥을 갖다 드렸습니다. 나중에 외숙모 조카딸이 외숙모가 병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밥을 갖다 드렸습니다. 조카딸은 외숙모 댁과 두 세집을 사이에 둔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3. 외삼촌과 외숙모의 칭찬

외삼촌은 올해 83세입니다.외삼촌은 소년 시절 심한 근시가 되어 50세에 이르러서는 양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외숙모가 병이 난 후부터 저는 늘 과일과 디저트 및 요리 등을 사들고 두 노인을 찾아뵈었으며 그들을 위해 근심을 덜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으며 그들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드렸습니다.

외숙모는 병이 나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밥을 갖다드린 후 바로 테이블 옆에 서서 두 노인에게 밥을 담고 반찬을 나누어 드리며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돌봐드린 다음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성심을 다하여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도록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고 제가 이야기한 말도 매우 믿었습니다. 매일 모두 이 아홉 글자를 염했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하에 외숙모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 문 앞에 앉아서 햇볕을 쬘 수 있었으며 테이블 앞에 앉아 식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년 상반기 외숙모는 병이 나서 침대에 몸져누우셔서 저는 곧바로 비디오 플레이어를 샀습니다. 일부 진상 동영상을 넣은 후 그들에게 보여드리고 듣게 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아주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숙모는 며칠 동안 듣고 난 후 다시 일어나 앉을 수 있었으며 거실로 나오셔서 놀 수 있었습니다.

두 노인이 극도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이러한 구제를 받아 마음속으로 매우 위안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찾아가 방문하기만 하면 사람들 앞에서 저를 있는 힘껏 칭찬했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저를 칭찬한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아주 멀리까지 전해졌으며 외지에 살고 있는 친척들도 모두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의 벗들과 그들의 이웃 주변 주민들까지도 칭찬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작년 연말이 다 돼서 외숙모가 임종하게 될 무렵 저는 매일 찾아가 뵈었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찾아뵙기도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층수가 비교적 높아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때로는 외숙모에게 밥과 물을 먹여주고, 먹거리도 사드렸으며 연잎밥죽과 목이버섯수프를 끓여 드리며 가능한 음식을 조금이라도 드셔서 생명을 지탱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숙모는 작년 섣달 그믐날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셨고 향년 80세였습니다.

저에게 건강한 신체와 초범적인 능력을 내려주시고 저로 하여금 외롭고 쓸쓸한 양부모님을 돌보도록 해주신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명을 만들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성결한 대법제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신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
[1]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휴스턴 법회 설법’

(밍후이왕2018년‘세계 파룬따파의 날 경축’원고모집)

 

원문발표: 2018년 5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언행으로 대법을 실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10/3650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