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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부님 은혜

글/ 창춘 대법제자 성롄(聖蓮)

[밍후이왕] 나는 남의 눈에 띄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평소에는 단체 법공부 때 교류를 제외하고는 수련 중의 경험을 그다지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수련은 아주 평범하고 많은 때 아직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자신이 걸어온 파룬따파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을 실증한 20년을 회상해 보니 사부님의 은혜는 높은 산, 큰 강물과도 같았다.

1. 법을 구했던 길

지난 세기 80년대, 중국엔 기공 붐이 일었다. 사부님 고향이며, 파룬따파의 발원지인 창춘(長春)에서 기공은 공원, 광장뿐만 아니라 많은 고등학교 교정에도 들어갔다. 그 때 적지 않은 교직원, 대학생이 분분히 연공 행렬에 들어섰다. 나는 한 직업학교 교사였다, 비록 이전에는 기공을 본 적이 없었지만 ‘기공’이란 두 글자만 들으면 신기했고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그때는 사업, 가정 부담이 가장 무거운 때여서 기본적으로 연공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저 도서관에 가서 기공 책을 빌려 보거나 사서 보기만 했을 뿐이다. 몇 권을 보고나니 기공은 문파가 많지만 책에서 말한 내용은 아주 비슷해 모두 공리, 공법 그런 따위였다. 나는 몸이 아프지 않고 시간마저 없으니 연공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기공을 잊지 않았다.

1997년 5월 초반 어느 날, 우리 학교의 동료가 책 한 권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이 공을 연마해 봐요!” 나는 책 표지조차 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연마할 시간이 없어요.” 속으로는 기다렸다가 불경을 볼 거라고 생각했다. 동료가 말했다. “이 공은 당신에게 아주 적합할 겁니다. 먼저 책이나 본 다음 다시 말해보세요.” 말하는 사이에 책이 이미 내 가슴에 닿았고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표지를 보니 ‘전법륜’이었고 무슨 무슨 ‘공(功)’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으로 갖고 왔다.

낮에는 시간이 없고 잠자기 전에 침대에 엎드려 책을 펼쳤다, 목록 중에서 나는 ‘벽곡’이란 내용이 있는지 급히 찾아봤다. 찾았다. 단숨에 다 읽고 나니 실망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법륜’에서는 벽곡과 층차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되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보았더니 첫 마디가 ‘진정으로 고층차로 사람을 이끌다’[1], ‘그가 바로 가장 근본적인 불법이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眞(쩐)ㆍ善(싼)ㆍ忍(런)을 동시에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煉)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1]였다. 나는 놀라서 생각했다. 이게 기공 책인가? 내가 찾고자 하던 불경이 아닐까? 더 많은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읽어 내려갔다. 제1강을 채 읽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 30쪽 정도 읽었을 때 아랫배가 툭툭 튀기 시작했다. 그때는 내의만 입었으므로 감각이 유달리 또렷했다. 잇따라 아랫배 이하 두 다리에서 훅훅하고 찬 기운이 나왔고 왼쪽 다리가 매우 차가워졌다.(내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 있었지만 이전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음) 이튿날 나에게 책을 준 사람에게 물어보고서야 비로소 사부님께서 나에게 파룬을 넣어주셨고 냉기는 사부님께서 다리의 병기를 제거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3,4일이 지나서야 냉기가 점차 사라졌고, 예전에 무겁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와 마찬가지로 가벼웠다. 격동된 나머지 나는 이전의 각종 기공책, 연공 테이프를 태울 것은 태우고 팔 것은 팔면서 깨끗이 정리했다. 동료에게 부탁해 파룬궁의 모든 서적과 자료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나는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법공부 장소를 찾았고, 또 그때 바로 개최 중이었던 리훙쯔 사부님 홍법 5주년 전시회에 참가했다. 전시회 관람을 마치니 시야가 크게 열려 방금 꿈에서 깨어난 듯 했으며 소원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2. 잊을 수 없는 사부님 은혜

법을 얻었을 때 나는 교육계에 몸을 담은 지 20여 년이 됐다. 전공 외에도 나는 기타 방면의 서적도 보았다. 몇 십 년 받은 것은 모두 문화대혁명 이래의 일련의 정치사상 교육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전법륜’을 두 번 본 후, 여러 해 동안 주입된 사당 사상이 내 두뇌 속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영혼을 제조하는 엔지니어라고 자칭하던 내가 지금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으며 손바닥만 한 빛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는데, 사부님의 큰 손이 나를 지면으로 건져주시어 나에게 광활한 대지와 푸른 하늘을 보게 해주셨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불경을 찾으러 가기 전에 위대한 불법이 이미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격동했다. 사부님을 뵌 적은 없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이미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수련의 길로 이끄셨다.

그때는 너무 바쁘던 관계로 법공부만 하고 두 달 후에야 연공을 시작했다. 법공부를 한지 며칠 안 되어 내 몸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법공부 팀에서 나의 전신은 가끔씩 열이 났고 어떤 때는 더워서 집안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법공부를 채 못하고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파룬궁’에서 말한 것처럼 ‘공이 나오는[出功]’ 상태 같았다. 이후에 연공을 두 달 배운 후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천목이 부어 매우 아프고 태양혈도 붓고 눈도 안으로 꺼지는데, 계속 그것이 밀고 나와서는 단번에 앞이마 이곳에 드리운다.”처럼 이마에 ‘현관설위’ 현상이 생겼다. 어떤 때는 너무 아파서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 법의 위력,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를 깊이 체험했다. 어떻게 아프든지 막론하고 나는 모두 이를 악물고 견지했고 그러는 가운데서 불법 수련의 현묘한 과정을 경험했다.

이마가 붓고 아프고 나서 잇따라 한 갈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는데 눈앞에서 파룬이 도는 것이었다. 시작에는 이마 안에서 돌다가 이후에는 밖에서, 머리 주위에서 모두 흰색, 회색, 금빛 색깔의 작은 파룬이 쉼 없이 돌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세 개 부분이 겹친 커다란 파룬이 집안에서 돌아가는데 직경이 거의 2미터는 되어 온 방안에 들어찼다. 내가 격동해 벌떡 일어나자 몇 초 사이에 파룬이 사라졌다. 이 신기한 현상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눈앞의 파룬은 약 1, 2년이 지나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파룬의 형상은 오히려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후에 내가 감옥에 갇힌 나날에도 매번 성스러운 파룬을 생각할 때면 전신에 신심과 용기가 솟구쳤다.

수련을 반 년 한 후, 가족들도 대법의 위력을 목격해 남편은 다른 기공 연마를 하던 것을 팽개치고 아이와 함께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우리 일가 세 식구는 날마다 제시간에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참가했고 아이의 건강도 갈수록 좋아졌다.

바로 우리가 심신이 유쾌하고 수련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을 때,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탄압이 시작됐다. 파룬따파의 발원지에 갑자기 먹구름이 짓누르고 피비린내가 풍겼다. 우리는 청원을 시작했다. 나는 두 차례 베이징에 청원을 갔고 마지막 한 번은 불법 노동교양 2년을 당했다. 당시 노동교양소는 사람이 넘쳐나 신체가 나쁜 사람은 신체검사를 받은 후 석방했다. 나는 ‘유다(수련하다 대법을 배신한 사람을 비유)’가 6일 낮, 7일 밤을 연속 자지 못하게 하는 등 집중 공격하는 속에서도 몸에는 아무런 상태가 나타나지 않다가 오히려 뜻밖의 ‘고혈압’으로 석방됐다. 2년의 노동교양이 두 달 만에 끝났다. 나에게 거대한 어려움을 해결해주신 자비로운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오자 또 대규모 집중적인 소업 과정을 겪었다. 2001년 초반,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변했다. 두 팔에 작은 물집이 생기고 등에 큰 물집이 생겼으며, 엉덩이와 두 다리에 두 줄의 큰 물집이 생겼고, 두 손목, 손바닥 껍질이 터져서 살이 드러났으며, 열 손가락 살은 매일 저녁이면 물이 되고 아침이면 또 살로 됐다. 몇 달 동안 세수를 할 수 없고 머리를 감을 수 없었다. 연속 근 1년 동안 손에는 여전히 줄줄이 물집이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배꼽 등 오목한 곳에 엿처럼 진득진득한 흑색 물질 두 덩어리가 나타났다. 바로 이 공간에서 가족은 이런 형상을 직접 목격했고 나 자신도 나에게 죄업을 제거해주는 신기한 힘을 느꼈다.

나는 근무 중에서 될수록 진선인(眞善忍)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90년대 말 나는 담임교사를 겸임했는데 내 반은 고향을 멀리 떠난 생활이 비교적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다. 매번 몸이 아픈 학생이 있으면 나는 집에서 밥을 갖고 와 학생에게 보내주었고 늘 내 아이에게도 먹이기 아까워하는 과일을 아픈 학생에게 주었다. 한 학생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선생님 집의 과일은 산 거예요?” 매번 명절 휴가 때면 모두 반마다 만두를 빚는 등 자비를 내 회식을 한다. 이때마다 나는 상징적으로 학생마다 몇 위안씩 내게 하고 나머지는 내가 다 부담했는데 매번 나는 최소한 반 전체의 절반 비용을 냈다. 특히 매번 학생이 졸업 전이면 모두 돈을 모아 기념품을 담임교사에게 주는데 이 기념품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고급 자전거, 명품 손목시계 같은 것으로서 매 학생들이 내는 돈이 아주 많다. 나는 수련 전에도 학생이 산 물건을 받지 않았으나 노트, 사진첩 같은 작은 물건은 받았다. 그러나 수련 후에 진작부터 반장을 통해 나는 어떠한 기념품도 받지 않을 것이며, 기념을 남기고 싶다면 너희들의 졸업 기념 책에 글을 남기면 된다고 통지했다. 아울러 3~5위안(한화 약 5백~8백 원)짜리 노트를 사서 이 노트에 누구나 선생님에 대한 축복과 감사를 남기고 자기 이름을 서명해 나에게 주면 된다고 했다. 이후에 다른 반 학생이 물었다. “너희 선생님은 왜 그렇게 하지?” 우리 반 학생이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파룬궁을 연마하셔. 마음이 착하고 진심으로 학생을 위해 배려하시지,” 유감스러운 것은 탄압이 점점 더 심해짐에 따라 나는 강단에서 쫓겨났고 학생과 접촉하는 것이 더는 허용되지 않았다.

20년 수련의 길에서 내가 절실하게 느낀 것이라면, 혼잡한 속세에서 사부님께서 나를 건져내어 깨끗이 씻어주시고 수련의 길로 손을 잡아 이끌어주신 것이다. 온 몸 가득한 죄업을 없애주시고 겹겹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셨으며, 비바람 속에서 한 구간 한 구간씩 나를 바래다 주셨다. 크나큰 사부님 은혜에 나는 보답할 길이 없다. 오직 사부님을 바짝 따라 어떠한 간난신고도 물리치며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해 조사정법의 성스러운 사명을 원만히 완수할 것이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7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25/3510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