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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위한다’ 뒤에 있는 이기심과 관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 중 우리는 이기적인 구우주에서 걸어 나와 진정한 무사무아의 신우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이 과정 중에서 구우주 생명의 많은 사유방식이 우리 사상 속에 어느 정도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행에도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사실 그런 소위 ‘위하는 마음’ 속에 많은 이기심과 관념이 섞여있을 때가 많다.

한번은 수련생인 아내가 나에게 가족모임에 참가하라고 한 적이 있다. 나보고 그녀의 집안 식구들과 더 많이 소통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소를 노래방으로 정해놓았다. 당시 바로 ‘만약 정말로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면 집에서 밥 한 끼만 먹어도 되는데 왜 돈을 써가며 그런 아주 좋지 않은 장소로 가야 하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뜻밖에 아내는 “당신을 위한 것이에요. 당신이 너무 촌스러워 보여 멋지게 현대 생활의 취미에 한번 적응해 보라는 것이에요. 어차피 당신이 돈을 내는 것도 아닌데요”라고 했다. 나는 엄숙하게 “이건 날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해치고 있는 거예요”라고 했다. 아내는 몹시 화를 내며 “당신을 위한 것인데 왜 받아들이지 않아요?”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만약 직접 내 생각을 말한다면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녀 가족과 이야기 좀 하고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발정념해서 그곳에 좋지 않은 물건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잠깐 앉아 있다가 그녀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겠다고 했고 나는 그녀들과 좀 이야기했다. 낮에 일이 힘들어 앉아있었더니 졸렸다. 그녀의 집안 식구들은 날 보더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온 후 아내는 한바탕 뭐라고 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기운을 내지 못해요. 그녀들과 함께 유쾌하게 즐기지 못해요?”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고 아주 피곤해 바로 잤다.

이튿날 엄숙하게 아내에게 “당신이 말하는 ‘날 위하는’ 것은 사실 당신 관념 속으로 생각하는 ‘날 위하는’ 것이에요. 나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수련에 대한 방해죠. 당신도 수련인이므로 그런 장소는 가지 말아야 해요. 가족은 어디에서 잠깐 모이면 되죠. 굳이 그런 장소에 갈 필요가 있어요?! 하물며 돈도 적지 않게 드는데요. 수련인으로서 만약 가장 기본적인 옳고 그름도 구별할 수 없으면 수련과 사람을 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 이번에 아내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누나가 날 보러 왔는데 비싼 과일을 사왔다. 그러나 이런 과일을 먹자 몸이 편안하지 않고 괴로웠다. 그리하여 누나에게 “절 위하는 것이라면 저에게 적합한 물건을 줘야 해요. 아니면 역 효과가 생기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누나도 내 이런 정황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련의 실천 중 우리는 무의식에 자신의 어느 방법이나 생각이 모두 좋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이 연관될 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어느 사물에 대한 인식 혹은 방법을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널리 보급한다. 만약 서로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강제적으로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상대방이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어느 각도에서 말하든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위한다고 하면 다른 한 쪽이 마음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쪽이 좋다고 하는 것이 다른 한 쪽에 대해서 정말로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되도록 자신의 인지, 관념을 다른 쪽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속으로 편안하지 않고 괴로워하는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생각과 방법 속에 자아의 이기적인 마음과 관념이 안에 섞여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다른 사람보고 ‘자신’의 어느 의도와 생각대로 하라는 마음이 섞여있고 이것도 이기적인 마음의 하나의 표현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좋은 생각을 말할 때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그럼 다른 한 쪽에 대해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 착실하게 상대방의 생각과 방법이 원래 자신의 것보다 좋은지 나쁜지 봐야 한다. 만약 정말로 더 좋다면 받아들이고 만약 정말로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무리해서도 안 된다. 이때 꼭 자신의 자아의 원래 사유방식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방법의 ‘가능성’을 가늠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자아를 내려놓고 협력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생명이 다르고 특징이 다르며 환경이 다르고 집착을 없애고 법을 실증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부 일에 대해 설령 일상생활 속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도 구별이 있고 문제를 보는 각도와 중점이 전부 다르다. 이건 다 괜찮은 것이다. 관건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생명의 풍부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절대 하나의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이것은 늘 우리가 일상생활 중 아주 쉽게 소홀히 하는 문제다.

개인적으로 수련은 바로 자아를 순정하게 하는 과정이고 바로 실천 중 끊임없이 자아의 집착, 사람의 마음과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을 순정하게 하고 자신이 대법의 인도 하에 갈수록 순정해지고 갈수록 바르게 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철저히 자아와 각종 관념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수련생간에 협력해 진상을 알리고 진정으로 잘할 수 있다. 아니면 모두 방해와 교란이 생길 것이다.

개인적인 체득이므로 단지 참고로 제공한다.

원문발표: 2017년 9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21/3539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