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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것이 수련을 대체할 순 없다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내가 법을 얻은 지도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전법륜’과 심득교류를 많이 읽고 보았으며, 각기 다른 지역과 다양한 경력, 각종 연령대의 수련생이 수련의 길에서 부닥친 문제도 많이 봤다. 하지만 마음 속 의문과 봉착한 문제를 언제나 정확히 해결하진 못했다.

나는 일찍이 오랫동안 매우 곤혹스러웠다. 나와 주변 수련생이 그렇게 많은 마난에 부닥치고, 적잖은 수련생의 집이 집 같지 않게 됐고, 그렇게 많은 수련생이 시간과 금전을 모두 진상을 알리는 항목에 투입했지만, 잡힌 사람은 잡히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더 한심한 것은 자심생마 하여 신체가 다른 것에 통제당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내 맘 속에는 무수한 의문이 생겼다. 진상을 알리면 꼭 잡혀야 하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수련해야 하나?

이 몇 년간 해외의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며 안으로 찾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수련인에게는 본보기가 없고 입문에는 선후 구별이 없으며, 오직 진정으로 이 한 부의 법에 따라 수련해야 진정한 수련인이고 그렇게 해야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득했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전법륜’ 을 들고 있고 진상 알리는 일을 한다 해도 마음에 진정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다만 속인이 대법의 일을 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속인보다도 더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진정으로 법리를 조금씩 이해함에 따라 더는 책 속의 글자만 읽지 않고, 법에 서서 이런 문제를 되돌아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원래 ‘전법륜’은 표면적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법공부를 부지런히 해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하루에 5강씩 읽거나, 진상을 알리는 항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련에 얼마나 정진하는지를 보여줌이 비로소 수련이라 여기는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한 일을 잘 하면 그렇게 큰 마난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째서 세 가지 일을 아주 참답게 하는데 실제로는 도리어 법에서 수련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까? 내 개인적인 상황을 분석해보면 아래 몇 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마음속으로 우러나와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사부님 요구에 따라 일을 하기 때문에 법의 체현을 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세 가지 일을 할 때에도 역시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서 한다. 그래서 많은 일에 부닥치지만 깨닫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며, 또 구세력에게 쉽게 틈탈 기회를 준다. 그래서 수련의 길에 오점을 남긴다.

이를테면 수련을 인간에서의 자신의 고난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진상 알리는 것을 자신의 위덕을 쌓기 위한 것으로 삼는다. 항목의 일을 많이 하면 앞으로 더욱 높은 과위, 더욱 많은 영예를 얻을 수 있고, 수련의 일을 하면서 속으로 자신은 속인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하며 일하는 것으로 수련을 대신하면서 일을 많이 하면 원만도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속인의 심리 상태 수단으로 박해를 도피하는 등등이다. 이런 마음을 품고 무엇이 진정한 수련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구세력이 보고 어찌 그냥 두겠는가? 그러므로 수련이 아니면 박해를 당할 것이며, 자신이 품고 있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자신이 자신을 해치게 된다.

두 번째, 어떤 수련생의 교류에서 들은 것인데, 여러 해를 수련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떻게 수련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에게도 깊은 체험이 있다. 이전의 나는 언제나 생활과 수련을 구분해 놓고 양자를 대립시켰다. 대법은 대법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면서 진상을 알릴 때는 대법제자이고 생활 속에서는 나 자신이라고 여겼다. 매일 매 시각 부닥치는 일이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 주신 것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우리 사람이 처한 생활, 일, 혹은 학습 환경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 주신 것으로서 우연한 것 같지만 실은 필연적이며, 모두 우리의 심성에 따라 배치해 주신 것으로서 어느 때나 다 시련이 존재하고, 모두 제고할 수 있다. 우리가 제고되면 환경도 따라서 변화가 생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상에서 정말로 마땅히 참답고 진지하게 자기를 보아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그런 일들을 가볍게 보지 말라. 수련의 표준에서 문제를 보면, 당신이 보기에는 작은 문제지만 구세력은 대법제자의 태도에서 보는데 그것은 오히려 작은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어떤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모두 흔히 속인의 그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한 것이지 법으로 가늠한 것이 아니다!”[1]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수련생은 오히려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진정 수련하는 시각으로 삼으며, 세 가지 일을 할 때 발생한 문제라야 비로소 자신이 사고해야 하고 제고해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될수록 빨리 자신을 제고하고 중생을 구도하려고 흔히 극단으로 가면서 자신에게 이른바 수련에 적합한 환경을 창조해 준다면서 진정한 의의에 맞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표현되는 것으로는 가족을 위해 지불하지 못하고, 사업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모르며 사람과 정상적인 소통을 하지 못하는 등등이다. 그래서 큰 시련이 닥칠 때면 얼떨떨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의혹이 생겨나 적지 않은 사람이 수련을 포기해 버렸다.

간단한 실례를 들어보자. 이를테면 내가 문을 닫아걸면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설령 밖에서 가족이 일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해도 법 공부 한다는 이유로 도와주러 가지 않는다. 이는 실제로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서 자신에게 수련 환경을 창조해 주고자 외부와 격리하여 조용히 법공부함으로서 자신의 제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사부님께서 나에게 배치하신 것은 오히려 자아를 내려놓고 남을 위해 지불할 수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자기 주변 사람에게마저 관심이 없다면 그걸 어찌 수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10여 년 전 나는 친척집에 산 적이 있다. 그녀는 나를 도와 집안청소를 하는데 나는 마음 편하게 앉아서 ‘전법륜’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왜 진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읽는 법을 듣고 다시 내가 하는 행동과 비교해 보았을텐데 받아들였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또 한 가지 극히 중요한 것은 수련에서 안으로 찾을 줄 모르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도 그만큼 높은데”[2], “공이 자라는 관건은 우리가 心性(씬씽)을 수련하여 우주의 특성에 동화하는 것”[2] 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진상 알리는 효과도 갈수록 좋아질 것이며 이는 상보상성 하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심성을 수련한 방식은 선명하고 아주 뚜렷한 집착심을 본 후에야 반드시 버리겠다는 태도를 표시했고 내심으로도 이런 집착심은 아주 나쁘다고 여겨 억지로 이런 집착심을 억제했다. 이것을 수련이라고 여겼고 집착심이 쇠약해지거나 없어졌다. 하지만 한동안 지나면 또 나왔고 심지어 갈수록 심각해 졌다. 이런 상황이 여러 해 자주 반복되자 아주 고통스럽고 망연하여 수련생과 교류하면 수련생은 곧 사부님 말씀으로 나를 위안했다. “대법 중에서 수련함은 한 층 한 층씩 사람의 사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마치 그 양파처럼 한 껍질 한 껍질 그것을 벗겨버리는데, 최후에 모두 벗겨서 없어졌을 때가 바로 본질이다.”[3]

지금 와서 보니 나의 그 억제하는 방식은 결코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집착하는 마음의 지엽을 흙으로 두텁게 덮어주어 표면적으로 보면 없어졌지만 일단 적합한 조건을 만나 비가 내리기만 하면 또 광적으로 머리를 내 밀었다. 집착심을 버리려면 뿌리를 파헤치고 그 마음의 근원을 파내어 송두리째 버려야 하고 철저히 뽑아내야 하며, 그 잔뿌리, 떨어진 씨앗마저도 함께 깨끗이 청리하여 그것이 다시 뿌리를 내려 싹틀 기회가 없게 해야만 비로소 양파 껍질을 한 층 벗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직접 겪은 일을 공유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줄곧 자신을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결벽증에 가까웠다. 그래서 남이 나를 가짜로 깨끗하다고 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코웃음 치며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변이된 관념으로 남을 가늠하면서 남은 모두 더러워서 나와는 비길 바가 못 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여러 차례 구체적인 일들을, 그것도 내 생각에 절대적으로 정확해 보이는 일들을 지적할 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너무 억울했다. 이건 괜히 꼬투리를 잡는 것이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나는 여러 해 동안 습관이 있었는데, 침대 시트와 이불커버를 매달 빨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옷을 매일 갈아입었다. 그런데 어떤 수련생이 이건 옳지 않다며 가짜로 깨끗한 척 한다고 했다. 나의 첫 번째 반응은 그녀가 자신의 문제인 것을 거꾸로 나에게 돌린다고 여겼다. 그 때 나는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한 게 아니라, 그 일이 재차 발생했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과 크게 싸웠고 모두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냉정해진 후에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여겨졌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바로 속인이 아닌가. 속인은 누가 안을 향해 찾는가? 안을 향해 찾는 속인이 어디 있는가? 어떠한 모순에 부딪히면 ‘나는 나 자신의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하면서 정말로 똑똑히 생각해 본 후,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 한다. 만약 당신이 중국에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정신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반 사회의 도덕이 모두 사당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인데, 속인인 그는 이렇게 문제를 사고하지 않을 것이며 모순에 부딪히면 모두 서로 상대방을 질책하다 최후에는 더욱더 격화된다. 대법제자는 이렇지 않을 것이다.”[1]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자신에게 아직도 속인의 마음이 더 많다는 것을 보아냈다. 일에 부닥치면 자신을 찾지 않고 늘 자신은 다 옳고, 게다가 그렇게 작은 일을 꺼내어 나에게 문제 있다고 말할 가치가 있는가 하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품었으니 어찌 수련인 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찌 위로 제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며 수련생과 교류했는데 전 과정이 정말로 모두 나의 잘못임을 발견했다.

우선은 극도로 이기적이어서 무슨 문제를 보든 지금껏 모두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고, 내가 하려고 스스로 결정한 일은 반드시 가서 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이 한말이 내게 맞지 않거나 못하게 한다면 그 말이 이치에 맞든 맞지 않던 안 된다면서 자신이 수련인임을 잊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작은 일을 포함해 모두 상대방의 잘못으로 여겼다.

이어서 분석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의 출발점 역시 이기적이고 모두 자아를 위한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모두 남을 배려하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 문제에서 양호한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하고 정상적으로 가서 하면 된다. 청소가 필요한 상황이면 청소하고 옷이 더러워지면 빨고, 보게 되면 하는 것이지 나처럼 일관적으로 시간을 정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정한 시간이 되면 꼭 하고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으면 더러워도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일을 했고, 해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대충 얼버무렸다. 게다가 언급할 나위조차 없는 이런 작은 일을 마음에 두는데 아주 큰 공간을 차지한다. 이건 자기 스스로 씌우개를 씌워 별도로 집착심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왜 알면서도 늘 그럴까? 아래로 파헤쳐 내려가니 내심에서 자아가 극도로 팽창한 것을 보았다. 내가 편안한 걸 가장 중시하니 사부님 말씀마저 듣지 않고 무법천지였다. 자신은 법의 제약을 받지 않아도 되며 누구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만약 법이 나의 관념에 부합되면 나는 준수하고 만약 너무 어려워 자신의 정신과 몸을 힘들게 한다면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그렇게 많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점을 보아냈을 때, 이런 사상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몇 년을 수련해도 수련해 올라가지 못했고, 왜 법 공부해도 법을 볼 수 없는지에 대한 주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법 밖에 놓았고, 늘 문 밖에 서서 문 안이 어떤가만 엿보았으니 진정으로 문안에 들어서서 보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내가 믿지 않은 것은 사부님의 구도였다. 사부님께서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올리려 하시는데 나는 오히려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너무 무거워서 끌어당기지 못하실 겁니다.……’ 이는 얼마나 자아가 팽창된 건가! 그러기에 여러 해가 가도록 진상을 잘 말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마저 믿지 않는 일을 어찌 남에게 믿게 할 수 있겠는가?

신사신법은 수련 과정에서 지극히 관건적인 기본 요구이며, 원만할 수 있는가에 직접 관계된다. 게다가 이 고험은 줄곧 최후까지 일관된다. 이미 많은 수련생이 모두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럼 그 무엇이 나를 신사신법하지 못하게 했을까?

나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서 초래된 것임을 발견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도 진정으로 믿어본 적이 없었다. 국내에 박해 환경이 있긴 했지만 더욱 많은 것은 그래도 자신의 문제였다. 남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이 의거할 수 있는 가족이 있거나 친구가 있지만 나는 오히려 자신의 부모마저도 다 믿을 수 없고, 그저 그들은 부득이하게 책임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형적인 심리 상태에서 나는 이 세계는 다 믿을 게 없고 위험하며, 사람지간은 모두 허위라고 생각했다. ‘산에 기대니 산이 무너졌다’ 는 내가 믿는 진리였다. 이는 법에 위배되지만 ‘내 경험에서 얻은 것인 만큼 반드시 옳은 것이다.’ 라고 여겼다. 이건 대법의 법리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한바탕 고통스런 마음의 몸부림을 거쳐, 사부님의 가지, 수련생의 격려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뿌리내린 관념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을 믿어보았다. 적어도 내게 낯익은 사람을 믿었다. 서서히, 나는 이 세계가 가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짜라고 여기는 데서 이 착오적인 관념이 생겨났고, 이 관념으로 어떤 일과 사람을 보니 당연히 모두 가짜였고, 또 많은 가짜 이치가 연대적으로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방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암담한 심리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이 세계가 아름답고 혈육들은 원래 나를 그렇게 좋게 대해 주었음을 발견했다. 설령 내가 그들과 연락이 없어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관심을 가졌으며, 나에 대한 부모님의 애호의 정은 조금도 적지 않았다. 나의 친구들도 모두 내가 이전에 그들을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았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련생은 더구나 무사함으로 수련과 생활에서 나를 도와주었고, 내가 어떻게 반항하고 적대적이든 나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

서서히 나의 그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먼저 몸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혈색이라곤 없던 얼굴이 붉어져 사람들은 나를 보면 딴 사람같이 좋게 변했다고 했다. 진심으로 진상을 알리니 얻은 효과는 예전과 달리 더욱 쉽게 인정을 받았다.

회사 사람은 모두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았는데 나도 이전에는 안 했다. 심리에 변화가 일어난 후 쓰레기를 처리하고 주방 청소도 했다. 큰 법공부 팀에서 공부할 때 화장실에 휴지가 널린 것을 보면 얼른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예전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진정으로 깨끗한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다. 그렇게 더러운 많은 마음을 품고 내려놓지 않고 덮고 감추어 남이 모르게 하며, 표면적인 일만 하는 그것이야 말로 진정 더러운 것이다.

이 몇 년간 나의 수련이 아주 느린 것의 주요 원인은 모순이 있으면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데 있었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았다고 해도 고통 받거나 자신의 문제를 찾고 싶지 않았다. 매번 누가 나의 문제를 지적할 때면 나는 모두 아랑곳 하지 않았고 눈을 흘기거나 심지어 다투기까지 하면서 남이 모두 트집을 잡는다고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말씀하셨다. “어떠한 모순이 나타나고, 어떠한 일이 나타났을 때,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었다. 모순이 발생한 두 사람이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외에, 제 삼자마저도 자신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왜 당신에게 보게 했는가? 하물며 더욱이 우리는 직접 모순 속에 있는 한 사람임에랴. 왜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가?”[4]

지금 다른 사람이 나를 지적하고 나를 말하는데 더욱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주위의 많은 수련생들도 이렇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에게 이치가 있다고 여기며, 박식한 사람은 고전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다 이치 있는 말이지만, 모두 자신을 위한 변호이다. 그냥 이렇게 해나간다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여러 사람이 다 좋은 표면적인 평화만 유지될 것이며, 담론하는 것이란 모두 항목이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얼마 못 가 장기간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자신도 돌파하지 못해 모순이 격화될 즈음에 가서는 전혀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중국 전통문화에는 남이 자기의 결점이나 잘못을 지적해주면 기쁘다는 말이 있는데 그럼 우리 수련인은 속인보다 표준이 더 높아야 한다. 남이 우리를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찾아가서 말을 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문제를 남이 말해주지 않는 게 두려운 것이다.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여러 방면이 있다. 하나는 체면 문제다. 늘 자신을 남보다 출중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는 질투심이다. 이건 사이트의 많은 교류 문장에서 모두 분석한 바 있다. 물론 또 당 문화의 영향도 있다.

결국은 여전히 그 자아의 마음 때문이었다.

사실 사부님께서도 이 문제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 “수련은 사람 마음을 닦는 것이고 자신을 닦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모순이 있을 때, 곤란과 불공평한 대우가 있을 때 여전히 자신을 찾아 안을 향해 볼 수 있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련으로, 비로소 끊임없이 제고할 수 있고, 비로소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을 수 있으며, 비로소 원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5]

자신을 제고하려면 우선 타파해야 할 것은 남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할 때, 옳건 그르건 우선 받아들여야지 습관적으로 부정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 점화해 주실 것이므로 분명히 나쁘고 참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자신을 대할 면목이 없는 것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자신을 용감히 승인하는 그것만이 비로소 제고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수련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 잘해야 하지 않는가?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도 수련하고 있기 때문인데, 왜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그가 어떻게 대하든지 그에게 알려줘야 할 것은 알려주라. 당신들의 마음이 선(善)한 것을 사부는 보았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음을 말한다면, 그가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당신은 그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그 마음을 건드린 것으로서, 내가 생각하기에 그에 대한 촉진이다. 그가 그때는 깨닫지 못하지만 지난 후에 깨달을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또다시 다른 사람의 입을 이용해 그를 다시 두드릴 것인데, 또다시 깨닫지 못하면 그로 하여금 머리를 부딪쳐 큰 혹이 나게 할 것이다.”[3]

어떤 땐 수련생이 아주 고생스러운 것을 보게 된다.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돌파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주 조급해 차라리 직접 수련생에게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의식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조심스럽고 가볍게 지적해주면 즉각 발끈하며 해석한다. 이렇게 오래 수련했는데 그런 마음은 진작 없어졌다, 나를 오해하고 있다, 오래 수련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나는 당신 말을 듣지 못하겠다, 법리는 잘 말하지만 자기 수련은 어떤가. 등…… 이런 결말은 부닥쳐 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환경에 이끌려 억지로 바뀌어 깨닫는 것은 수련과는 다른 것이다. 게다가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개창해 주신 환경은 단체 법공부와 단체 연공이고, 교류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다. 많은 때 자신은 자기 문제를 발견하기 아주 어렵지만 보는 사람은 아주 잘 안다. 수련생이 수련이 잘 됐든 안 됐든 수련의 일부 문제는 모두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모두 남이 지적해 줄 필요가 없고 지적해 주기만 하면 큰일 난다면 그럼 그게 대법 수련이란 말인가?

여러 해 동안 자신이 조금씩 개변됨에 따라, 끊임없이 법에서 자신을 바로 잡고 대법제자라는 그 하나의 마음으로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여, 수련이란 약간의 방법을 절실하게 체험하고 자신을 실제적으로 제고했다. 그런데 이런 제고는 모두 모순이 생긴 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모순이 생겼을 때면 그 마음은 찔려서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이 단락의 수련의 길에서 한 걸음씩 제고할 수 있게 해주신 사부님께 정말로 너무 감사드리게 된다. 이런 일을 배치해 주시느라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위하여 온갖 걱정을 다 하셨고, 정진하지 못하는 제자를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셨다.

어떤 땐 부처의 경지를 상상해 보고 다시 자신을 보면 그야말로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정법이 밀리게 된 것 역시 바로 나 같은 이런 대법제자가 사부님 뒷다리를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도와 세간에서 행하겠다는 맹세가 있은 바, 반드시 조금 남은 최후의 시각에 더욱 정진해야만 비로소 사부님께서 주신 임무를 잘 완수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5년 뉴욕법회설법’[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3] 리훙쯔 사부님 저작: ‘뉴질랜드법회설법’[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5] 리훙쯔 사부님 경문: ‘대만법회에 보내는 축사’

원문발표: 2017년 9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득>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1/3532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