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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심생마로 일으킨 막대한 손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대법제자는 모두 노력해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하고 있으나 늘 자기도 모르게 구세력의 구렁텅이에 빠져들며 심지어 깊이 빠져 어떻게 스스로 빠져나와야 할 줄 모른다. 부정 속에 인정이 있고 할 수 없이 ‘현실’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인터넷에 이성적인 일부 교류문장이 있고 개별적으로 이런 문제들도 있다. 이 자리에서 수련생과 교류하려 한다. 깨달음에 제한이 있으니 정확치 않은 곳은 수련생 여러분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자심생마에 의한 피해

천목이 잘 보여 자심생마에 의해 무너진 대법제자는 너무 많으며 비참한 교훈이 각지에 다 있다. 일부 천목이 잘 보이는 수련생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관념이 많아 수심이화(隨心而化)로 엄중하게 자심생마하고 장기적으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으며 어떤 수련생은 이미 수련을 포기했다. 한 번에 무너진 수련생들은 모두 약간의 자아팽창이 있고 대법으로 대조하지 않으며 고비를 연속 넘기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잘난 체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대법의 경고를 증명했다.

2. 대법이 인도해야 미혹되지 않는다

마난과 고험 앞에서 한번 또 한 번 우물쭈물하면 필연적으로 어렵고 위험한 국면을 만든다. 오로지 대법이 가르친 길이야말로 정념을 발할 수 있고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실례가 하나 있는데 빌려서 쓰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한 편의 교류문장 중 이렇게 쓰여 있다(대략적인 뜻). 어떤 고층 구세력들이 그 문장을 쓴 수련생의 힘을 빌리려 했고 그의 마음이 움직이자 그것들은 끊임없이 현혹했다. 이후에 그는 “난 바로 점오상태로 당신이 더 할 필요가 없다”라고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저히 그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여전히 그것들이 말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또 “지금 대법 수련자는 사실 대법의 법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늘에서도 조급해 한다. 우리는 수련생들이 전체적으로 법리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게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정법하는 일에도 촉진작용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그가 아직 주저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법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당신들은 정법자가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배치하고 저렇게 배치하는가?! 오로지 정법자의 배치만 들어야지 스스로 어떻게 좋다고 생각해서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 한 마디 말이 떨어지자 온 하늘에 금빛이 빛나고 사부님의 법신이 구세력 뒤에서 나타났다. 구세력은 할 수 없이 사라졌고 교란도 구름처럼 사라졌다.

이 과정은 아주 험악했지만 다행히 그 수련생은 마지막에 걸어지나왔다. 비학비수(比學比修)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이 천목으로 볼 때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보면 진실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보는 것은 모두 가짜로서, 이것이 바로 자심생마(自心生魔)이며, 수심이화(隨心而化)라고도 한다.”[1]는 것과 대조해봤다. 지난 두 차례 고험에 그 수련생은 끊임없이 마음이 움직였고 구세력의 질문에 대한 사고 속에 빠졌으며 심지어 구세력에 의해 마음속까지 현혹됐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관련 설법을 그의 머리에 넣어주셔서야 그는 갑자기 깨어났고 계속 교란을 받지 않았다. 사부님의 점화 하에 고비를 넘겼지만 필경 아주 위험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 아슬아슬하게 이겨낸 실례다.

기타 일부 교류문장 중의 사례는 더욱 좋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은 점오 상태 중, 입정 중, 꿈속에서 구세력의 박해가 닥쳐오는 것을 보고 당시 즉시 정신을 차렸고 대법에 동화하는 정념이 나와 순식간에 부정하자 교란도 순식간에 없어졌다. 발정념할 때 언제 이러지 않는가? 구세력이 닥칠 때 무슨 모습으로 변해 닥쳐오든 순식간에 부정하고 법에 동화하면 살려주고 대항하면 소멸해야 한다. 겨룰 때 어디 사악의 작전계획을 분석할 시간을 주겠는가? 전면적으로 없애면 끝인 것이다.

앞 문장에서 병업을 예로 들었을 때 ‘전법륜’ 중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마난이 올 때 첫 일념이 아주 중요하고 일념의 차이로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깊게 이해했다고 말했다. 첫 일념으로 만약 철저히 구세력을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인정하고 승인한 것이므로 승인 중 반박해 하면 자신의 어려움을 증가시킨 것이다.

우리가 앞 문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갑자기 나타난 병업을 대면하고 어떤 수련생은 가장 먼저 습관적으로 분석한다. 교란인가 아니면 다리가 우연히 삐었는가. 이것은 이미 박해를 승인 중에 반박한 것이고 이 첫 일념은 정법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예문의 글쓴이의 구세력과 대화하는 원리도 마찬가지다. 정법이 요구하는 철저히 박해를 부정하는 첫 일념을 연마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이미 아주 위험했다. 이 문제에 대해 수련생들은 반드시 엄숙하게 대해야 하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구세력은 정법에 의해 철저히 부정됐고 그것들의 배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구세력의 배치를 보거나 분석하는 자체가 구세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보았다면 들어갔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다른 공간에서 그것은 모두 분체(分體)할 수 있기 때문이며, 본 시간이 길수록 들어간 것이 더욱 많다.” “사람 머릿속에, 신체 속에 이런 좋지 않은 것들을 많이 담았다면, 당신의 행위는 그것의 통제를 받게 마련이다. 당신이 하는 말, 당신의 사유방식, 당신이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는 모두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된다.”[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보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문 중 글쓴이가 마지막에 받아들인 ‘하늘의 법리 훈련’은 다만 마지막 하나의 지푸라기다. 사실 이미 빗나가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에 구세력의 물건을 넣은 것이다. 이것 또한 마지막 지푸라기에 압도된 원인이기도 하다.

3. 환화(幻化)의 고험을 대면하고 순정한 첫 일념

꿈 속, 입정(入定), 혹은 천목으로 구세력의 환화(幻化)의 교란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바르게 깨닫고 대법이 같지 않은 층차에서의 정념정행에 부합되게 할 수 있겠는가?

매우 많은 수련생은 실천 중 다른 공간의 교란을 대면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마가 자연히 없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 어떤 수련생은 지금의 정법 단계는 개인수련 단계와 다르므로 구세력의 환화(幻化)의 교란을 대면하고 첫 번째 일념으로 그것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법에 동화하면 살 수 있고 법을 교란하면 반드시 소멸한다’는 하늘의 그물을 쳐놓고 현장에서 선택하고 즉석해서 정법해야 한다고 한다. 법이 아주 크므로 법 중 아직도 아주 많은 바른 방법이 있으니 우리가 계속해서 이성적으로 깨닫고 실증하길 기다리고 있다.

어떤 수련생은 환상에서 오는 교란은 실질적인 박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점오상태 중 이 환화의 교란 자체가 바로 현실적인 박해이고 대법제자를 자심생마의 죽음의 길로 미는 것이며 점오상태 중 이것보다 더 큰 박해가 없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것들은 당신이 평생의 수행을 철저히 소멸해버린다. 이 구세력들을 놔주면 그것들은 또 다른 수련생을 해치러 간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에 이미 “나는 반드시 빨리해야만 한다. 원래 격차가 매우 컸고 불가사의할 만큼 멀었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일이 나타날 때면 단번에 이미 그것의 일부분을 잡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물건이 100 몫이 있다고 하자. 이 물건이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곧 그것을 잡을 수 있고, 그리고 순식간에 해결해 버릴 수 있다.”[3]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구세력을 만나면 마땅히 역시 순식간에 잡고 해결해야 하지 절대 그것들을 놔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법에 동화하게 하는 것도 제거하는 것이지만 동화하지 않으면 제거해야 한다. 철저히 반박해하는 것은 정법제자의 위덕이다.

4. 기타 자심생마의 요소

앞글 문제로 돌아오자. 이 문장의 글쓴이가 천목으로 전체 국면을 거시적으로 봤는데 왜 경제영역에서 대법을 실증하는 대법제자가 전부 구세력의 박해에 빠져있고 아니면 돈만 조금 있으면 법을 빗나가고 아니면 바득바득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봤을까? 작가는 왜 10년을 발악해서야 비로소 초보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났는가? 왜 더 잘한 수련생을 보지 못하게 했는가? 필자는 그것은 구세력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이 가상은 ‘당신은 이미 아주 잘했다. 당신보다 더 잘한 사람은 없다’는 무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돌려 말하는 칭찬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중 자심생마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 마(魔)는 또 당신을 칭찬할 것인데, 당신이 얼마나 높다고 하며 당신은 얼마나 높은 대부처, 얼마나 높은 대도(大道)라고 하며 당신을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부 가짜다. 진정하게 고층차로 수련하는 사람은 당신의 각종 마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며, 이런 문제와 마주칠 때, 여러분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노골적인 칭찬은 가짜라는 것을 똑똑히 가릴 수 있고 칭찬을 돌려 말하면 받아들이는가? 누가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면 누구는 그것의 교란을 받는 것이다.

또 기타 잠재적 문제가 있다. 자심생마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다 사부님을 존중하지 않고 법을 존중하지 않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부님의 설법을 인용하는 것인데, 사부님 설법의 내포는 높고 심오하므로 글자 표면의 뜻으로만 절취하고 자신의 말로 구성하면 명백하게 안 되는 것이다. 문장을 쓸 때 사부님 설법을 인용함에 있어서 단독적인 한 단락이거나 적어도 한 마디가 되게 해야 하고 당신의 구절에 넣어두면 안 된다. 이것은 표면에서 무슨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시시각각 존중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다시피, 앞 문장에서 말한 예문의 글쓴이는 구세력의 수심이화의 교란을 받은 것이다. 오로지 당사자가 철저히 인식하고 철저히 구세력이 그에게 주입시켜준 한 글자 한 구절, 일사일념을 철저히 배척해야만 사부님께서 그에게 철저히 청리해주실 수 있고 그때서야 순정하게 회복할 수 있다.

5. 경제 박해도 마찬가지로 가상

병업(病業) 박해는 하나의 가상이고 원수를 갚으려고 온 생사의 큰 고비를 포함해 다 하늘이 정하는 것이 아니며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수련생은 거의 다 알고 있다. 정념으로 철저히 부정하고 제거하며 대법에 동화하고 자신의 수련 누락을 찾으면 모두 신속하게 개변할 수 있고 절대 인간 세상의 소도(小道)처럼 고생하면서 업을 갚고 또 갚지는 않는다.

그럼 경제 박해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는 가상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찾고 이성적으로 승화해 올라오며 정념정행하고 마찬가지로 철저히 박해를 부정하면 상황은 마찬가지로 개변되며 순정한 양성순환이 회복된다. 관건은 매우 많은 대법제자가 믿지 않기 때문에 속인의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고 아무리 봐도 출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법이 속인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겠는가?

아는 한 수련생이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가난뱅이 운수라고 했다. 장사를 할 줄 모르고 노점을 해도 10위안도 벌지 못하며 어른이 된 후 무슨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어이 돈을 빌려 사업한다고 목숨을 걸고 분투하느라 세 가지 일을 한쪽에 놔뒀다. 결국 판매가 부진하고 사기를 당했으며 앞뒤 백 만 위안 가까이 손실을 봐 궁지에 빠졌다. 이후에 바로잡았고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더욱 많은 것을 노력함에 따라 1년에 빚을 다 갚았고 2년 만에 부유해졌다.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하면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배치해 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대법 중 자신을 바로잡고 신사신법하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 큰 장사를 하는 수련생도 법을 빗나갔기 때문에 구세력에 의해 더욱 크게 박해를 당했다. 또 자신이 특수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잡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것은 꼭 양성순환일 것이다.

사부님께서 “수련인답게 당신 눈앞의 일체를 대한다면 어떠한 것이든 걸어 지나갈 수 있다. (박수) 당신은 만약 한 신(神)이 그런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가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해보라. 당신이 넘지 못할 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여서 그렇게 넘어 보고, 그것을 지켜보라.”[4]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실 가정 박해, 기타 박해는 다 직지인심하는 가상이므로 철저히 구세력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 전부 타파할 수 있다. 하지만 사부님의 설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대법은 전부의 위력을 드러낼 수 없다.

6. 마음이 부평초면 교란을 반복적으로 초래

지금 적지 않은 곳의 수련생은 반복적으로 어느 한 수련생의 어느 한 편의 교류문장을 배우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법공부 팀도 배우고 있으며, 어떤 수련생은 법을 읽지 않고 문장을 읽고 자신이 어디 잘못했는지 대조하고 문장의 경험을 어떻게 거울로 삼아야 하는지 토론하고 있다.

이 수련생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즉 장기적으로 법을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호기심도 없애지 못했다. 호기심은 아주 강렬한 집착심이고 영원히 만족시키지 못하며 한두 번 호기심을 만족시켰다고 그것이 사라지고 다시는 교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욕망이고 갈수록 팽창하는 것이기에 오로지 그것을 연마해 없애야 한다.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 속에서는 어디든 모두 아름답고, 아주 예쁘며, 대단히 좋아서, 무엇이든 모두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기만 하면 당신은 교란 받을 수 있어 당신의 그 공이 곧 난잡해지는데, 흔히 바로 이러하다.”[1]라고 말씀하셨다.

호기심,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고 ‘시야를 넓힌다’는 속인의 관념에 강화되면 정말로 자심생마의 고비를 넘을 때 다른 공간의 ‘눈부시고 장려한’ 환화(幻化)의 방해를 대면하면 큰 일이 된다.

사부님께서 “마음에 두지 않으니 세상과 다툴 것 없도다 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니 미혹되지 않는도다 들어도 듣지 못한 듯이 하니 그 마음 혼란하지 않도다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입의 집착 없도다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도다 고요하되 생각지 않으니 현묘함을 알 수 있도다”[5]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수련생들은 다 외울 수 있지만 관건적인 시각에 법리는 호기심에 전부 가려진다. 법공부할 때 자신의 집착을 대조하지 않는 것은 지금 너무 많은 수련생이 법공부하는 보편적인 습관과 잘못된 방식이다.

사부님께서 자심생마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얼마나 높이 수련했든 이 문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끝까지 떨어지며 철저히 망칠 것이다. 이는 극히 엄중한 문제다. 다른 방면과 같지 않으며, 心性(씬씽) 고험(考驗)은 이번에 넘지 못했으면 곤두박질했다가 일어나 또 이어서 수련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심생마, 이 문제가 나타나면 안 되며 그의 이 한평생은 곧 끝장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이 고비는 아주 엄숙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련했든 철저히 소멸당하고 만회할 기회가 없게 될 것이다.

7. 넘어져도 힘차게 일어날 수 있으면 교란은 좋은 일로 변해

사부님께서 “나는 늘 한마디 말을 하는데 바로, “당신이 대법을 배웠으니, 당신이 부딪힌 좋은 정황이든 나쁜 정황이든 모두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매우 많은 수련생이 아직 점오상태에 들어서지 않았고 그 고비를 넘을 때가 되지 않았지만 대법과 대조하고 자신도 마치 그 고험을 넘기지 못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곧 점오상태에 들어가기 전 예비 단계 중 격차를 보고 법리가 승화되면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우리가 관련 사부님의 설법을 익숙하게 외우고 마음에 새겨두며 속인의 관념을 씻어버리고 대법의 요구에 동화하기만 하면 이 점오상태 중의 수심이화의 큰 고비를 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물론 마음의 부담을 가져서도 안 된다. 넘어지면 바로 일어나 대법 중 자신을 세척하고 다시 시작해서 잘하면 된다.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교훈도 위덕으로 변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풍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덕을 세웠고, 비로소 후세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것, 가르칠 만한 것을 남겨주며, 그가 갖가지 마난을 받으면서 걸어 지나온 교훈과 경험을 후세사람들에게 남겨준다. 그가 비로소 위덕을 구비했는데”[6]라고 말씀하셨다.

이전 사람의 교훈이 없으면 뒷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훈을 중복해야 하는 줄도 모른다. 이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뒷사람에게 귀한 참고가 있는 것이다.

이상 개인의 인식 중 적당치 않은 곳은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11-2010년 뉴욕법회설법’[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5]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도(道) 중에서’[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설법’

원문발표: 2017년 7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20/3513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