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경축 5.13] 어둠이 지나면 햇빛은 여전히 찬란하기 마련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경축513 밍후이 특집원고) 파룬따파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나는 마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수련의 길에서 걸어갔다. 이웃은 우리 집의 커다란 변화를 보고 감동해 말했다.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했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오늘이 있게 됐어요. 당신이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오늘은 있을 수 없어요.”

2년 동안의 떠돌이 생활과 3년 동안의 감옥살이로 나는 5년 동안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집에는 서로 의지해 살아가는 조손 3대 즉 연로한 시아버지, 내 남편과 어린 손녀만 있을 뿐이다.

2006년, 내가 중국공산당의 노동교양소를 떠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집은 매우 가난했다. 사면이 바람이 새어 드는 서쪽 사랑채 문 앞에는 커다란 흙더미가 있고, 집안 벽은 내가 간 후 회칠을 하지 않아 새카맸다. 이전에는 시아버지가 몸채에 살면서 스스로 밥을 지어 드셨고, 우리는 서쪽 사랑채에서 살았는데 왜서인지 지금은 남편, 아이가 모두 시아버지 그 방에서 식사를 했다. 집안 취사도구는 오직 금이 간 헌 솥과 낡은 국자만 있을 뿐 남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남편은 내 옷을 큰 자루에 담아서 당나귀 차에 싣고 강에 가서 강물에 죄다 던져 버려 집에는 한 벌도 없고, 단지 내가 노동교양소에서 갖고 온 그 몇 벌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이불을 뜯어 빠는 것이었다. 5년 동안 집에 없었으니 물론 빨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뜯어내니 온돌에는 한 층의 두터운 모래 먼지와 한 무더기 솜 알맹이가 쌓였다.

남편은 나에게 4천 위안을 주면서 물었다. “당신이 집에 없는 이 몇 년 동안 나는 겨우 이것밖에 모으지 못했소, 당신 보기에 우리가 집을 보수할 지 아니면 그냥 돈을 모아 집을 지을 것인지 선택해요.” 나는 조금도 주저 없이 말했다. “보수해야죠!” 이리하여 우리는 사면이 바람이 통하는 사랑채에 두터운 솜옷을 입혀 주고 집안도 새롭게 회칠을 했다.

일할 곳이 있기만 하면 나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이는 내가 진상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어디로 가면 어디서 진상을 알렸다, 대법제자가 해야 할 매 한 가지 일은 모두 해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직면해 나는 겁을 먹지 않고, 날마다 모두 즐겁게 살면서 의기소침한 남편에게 밖에 나가 일을 찾으라고 격려했다. 집안 환경은 서서히 호전을 가져왔다. 2006년에 돌아와서부터 2007년 1년 사이에 우리에게는 또 저축이 생겼고, 2007년 초반에는 우리에게 또 아들이 있게 됐다.

이 아이를 말한다면 역시 기적이었다. 내가 마싼자 교양원에서 박해 받은 3년 동안, 나는 줄곧 생리가 오면서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피가 흘렀다. 설령 이러했지만 경찰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 머리에 죄수복을 씌우고 입을 바닥 닦는 걸레로 틀어막고 4층에서 아래로 끌었으며, 매 한 발작 끌 때마다 남자 경찰이 나를 발로 찼다. 4층에서 1층으로, 다시 1층에서 4층으로 끌어간 다음 작은 감방에 감금했다. 나에게 생명위험이 나타나서야 그들은 날 감방에 보냈다. 2005년 감옥경찰이 나를 병원에 끌고 가서 검사할 때 내 혈색소는 1g이어서 의사가 내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했다. “아이고, 이 분은 생리가 2년이나 그치지 않았으니 세계 기록을 세웠네요!”

이러했지만 교양소에 돌아오면 여전히 각종 고문에 시달렸다. 어떤 때는 2층 침대 난간에 달아매고 구타했고, 더욱 심할 때엔 집단 구타였다. 많을 때는 10여명 경찰이 함께 때리는데 그 중 한 경찰은 악독하게 내 하반신 양측을 발로 차서 나는 아프다 못해 호흡조차 곤란했다. 이런 구타는 한 번만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법공부와 연공을 거쳐 며칠이 안 되자 생리가 정상이 되고 신체는 건강을 회복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신체를 검사하지 않았고 남편과 토론해 더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다. 비록 여전히 현지 파출소의 소란을 당하긴 했지만 그들은 내 법공부 연공을 막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작은 책상 양쪽에 각기 한 살 되는 남자아이가 앉았는데 하나는 모자를 쓴 마르고 검은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희고 포동포동한 아이였다. 어느 아이가 내 아인가? 나는 포동포동한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맞아, 바로 그 아이다, 나는 이 아이를 안았다. 이튿날 또 같은 꿈을 꾸었다. 똑같았다. 이건 사부님께서 나에게 점화해주시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정말로……, 과연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임신이었다.

2008년 6월 3일, 우리의 귀염둥이가 출생했다. 정말로 희고도 포동포동한 아들이었다. 아기가 한 돌 좌우 될 때면 가장 예쁠 때다. 그 때 나는 늘 아이를 데리고 진상을 나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 아들 정말 잘생겼네요” “아들이 참 예뻐요!” “당신이 선량하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갖게 됐네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사람들에게 이는 내가 대법을 수련하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알려준다. 한 번은 션윈 비디오를 한 할머니에게 드렸다 “자네는 이 큰 눈을 가진 사내애의 엄마인가?”하고 묻기에 나는 기쁘게 말했다. “그래요! 저예요!” 할머니는 기쁘게 비디오를 받았다.

그야말로 경사가 겹친 격이다. 아들의 출생과 더불어 남편은 목공 일을 배워서 매년 수입이 상당했다. 나는 일할 수는 없어도 집에서 스스로 콩꼬투리를 심었는데 적으면 한 무(畝), 많으면 두 무 밭을 가꿨다. 농민이라면 모두 이는 두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혼자 했고 게다가 어린애를 데리고 했다. 콩꼬투리를 딸 때면 자루에 6, 70근을 담아서는 혼자 메고 갔다. 몇 년 전에 나는 오토바이로 운반했는데 한 번에 170~180근씩 싣고 가기는 다반사로 남편마저도 그렇게 많이 싣지 못한다. 몇 번은 나를 소란하던 현지 경찰이 보고는 몹시 놀랐고 그 후부터는 몰래 나를 보호해 주었다.

이리하여 2013년에 이르러 우리 집은 16만 위안을 들여 백여 평방미터의 큰 단층집을 지었다. 집안 장식은 도시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을 사람은 두 셋씩 짝을 지어 집 구경을 왔고 그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이웃은 감동하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오늘이 있게 됐고,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으면 오늘이 있을 수 없어요.”

그렇다! 99년도 봄에 법을 얻어 수련한지 18년이 됐고 대법이 박해 당한지도 19년이 됐다. 장쩌민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찬가지로 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수시로 가호해 주시고, 위대한 법이 있어 수시로 내가 어떻게 다음 길을 바르게 걸어갈 것인지 지도해주시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눈물이 비 오듯 흐른다. 사부님에 대한 나의 존경과 감사를 말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대법과 대법제자는 비록 사상 전례 없는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으니 우리는 여전히 즐겁기 그지없다. 친구와 동창들은 모두 내가 동년배에 비해 젊고 예쁘며 건강하다고 말한다.

지금 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세인의 대법에 대한 태도는 원래의 욕설, 조소, 멸시로부터 접수, 이해, 심지어 지지에 이르러 대법 자료이기만 하면 앞 다투어 달라고 한다. 세인의 변화가 바로 매 하나의 대법제자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원문발표: 2017년 5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경축513]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6/3467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