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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의 염두는 마땅히 자비로워야 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6년 10월 20일 오전, 법공부 팀에서 법공부하면서 나는 제1강을 읽었다. A수련생이 2강을 읽었고 B수련생은 3강을 읽었다. 모두 읽고 나서 내 머릿속에서 일념이 스쳐갔다. B수련생이 법을 읽을 때는 나는 특별히 듣기 좋고 마음에 들어갔다. 그녀가 읽을 때 빠뜨리는 글자가 있으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A수련생이 읽을 때 나는 그녀가 빠뜨린 글자를 아주 적게 알려주었다. 오히려 B수련생이 A수련생에게 알려준 후에야 나는 비로소 글자가 빠지거나 더 추가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들리지 않았을까?

A, B수련생 모두 퇴직교사이고 법을 읽는 속도도 기본상 같았다. 단지 B수련생의 법을 얻은 시기가 이르고 A수련생은 법을 얻은 시기가 늦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법 읽는 것을 들으면서 왜 일념지차가 생겼을지 생각했다. 확실히 자신에게 바르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일념을 잡고 안으로 찾았으며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당신들 앞에 놓인 것을 고르지 말아야 하며, 사람을 구함에 당신이 골라서 구한다면 잘못된 것이다.”[1] “사람을 구도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라, 고르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2]

사부님의 법은 단번에 나에게 알려주셨는데 중생을 구함에 있어 당신이 만약 선택이 있으면 당신은 바로 잘못된 것이고 중생에 대해 자비롭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이 수련생에 대해 자비롭지 못한 염두가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이 일념이 있음을 발견한 후 자신에게 물었다. 비록 수련생은 겉으로 마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볼 수 없지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다른 수련생에 대해 이런 자비롭지 못한 염두가 있고 장기간 이런 표현, 상태이면서 또 알아서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 수련생에게 어떠한 느낌과 영향을 줄 것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똑똑히 알고 있는데 그 수련생은 확실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법을 잘 읽지 못해서 남들이 모두 듣기 싫어하고 법이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글자를 빠뜨리고 추가되는 것을 모두 아주 적게 나에게 알려주는구나. 혹은 내가 법을 얻은 시간이 늦어서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건가? 혹은 B수련생과 가깝게 지내고 나와는 가깝게 지내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등등 부정적인 느낌과 영향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수련생에게 내심 상처를 조성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고 나는 더 아래로 이 자비롭지 못한 염두의 근원을 추적해 내려갔다. 모두 사람 마음이고 사람의 정이었음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질문을 해답해주실 때 ‘비(悲)’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두 구절을 선사하겠는데, “비(非)가 없으면 사람의 마음이고, 마음이 있으면 비(悲)가 아니다(無非是人心,有心不是悲).”[3](역주: ‘無非是人心’은 중국어로 ‘다 사람의 마음일 뿐으로’로 해석할 수도 있음) 사부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비’는 사람의 감정을 초월한 신의 그 상태의 표현을 형용한 것이다.”[3] “자비, 자비란 결코 사람의 정이 아니다.”[4]

내가 아래로 더 깊게 찾아보니 사람마음이 더 똑똑해졌다. 법공부할 때 A 수련생은 법을 읽을 때 소리를 내고 교류할 때는 아주 적게 발언했다. 자신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이 있고 법리에 대해 어떻게 깨닫는지에 대해 누구도 몰랐다. 그녀가 자존심이 강한 것인가? 아니면 부끄러움이 심해서 그런 건가? 그녀는 늘 나와 B수련생의 교류를 들으려고 했다. 나는 점차적으로 A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녀를 멀리하고 B와 가까워졌다. 이렇게 되자 무형 중에 그녀가 법을 읽을 때 나는 법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다. 물론 이것 또한 수련생에 대한 불경이었고 또 일종 ‘정’에 대한 표현이었다.

더 아래로 찾아보고 나는 의식하게 됐다. 수련생의 법을 읽는 것을 들으면서 선택하는 것이 ‘차별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자비’와 ‘정’의 표현이다. 그것은 우주 대법에 대한 불경이다. 수련생의 법을 읽는 것을 듣는 것도 법이다. 당신이 누구를 선택해서 내가 듣기가 좋고 누가 읽으면 나는 듣고 싶지 않다는 그러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부님의 ‘스위스법회 설법’에 이런 한 단락이 있다.

“제자: 저는 매일 『전법륜』을 보지만 어떤 내용은, 예를 들어 ‘축유과’・‘벽곡’・‘기를 훔치다’・‘기를 채집하다’를 저는 일반적인 이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내가 말한 것이 비록 그런 일을 예로 들어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말한 것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것은 법리이다! 그 배후의 내포는 무궁무진하여 이 우주가 얼마만큼 크면 이 법도 그만큼 크다. 나는 다만 사람의 가장 일반적인 행위, 가장 천박한 언어, 가장 낮은 사람의 형식으로 이 법을 말한 것에 불과하며, 목적은 당신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 배후의 끝이 없는 내포를 깨달아야 하므로 여러분은 절대 골라서 보지 말라. 법을 볼 때 매 한 편도 빠뜨리지 말고 끝까지 보아야 하는데, 반드시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의 연관성은 당신의 수련에 대하여 지극히(極大) 좋은 점이 있으며 그 법은 연관되어 있으므로 당신은 그렇게 골라서 보지 말라.”[5]

사부님의 법은 우리에게 법을 보는 것도 그렇게 골라서 보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찾아냈다. 반드시 법으로 상대 수련생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자비롭지 못한 염두와 정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리하여 마음을 써서 법을 보고 마음에 들어가도록 법을 듣는 것이 비로소 법공부이며 비로소 법을 얻는 것이며 법에 대한 존경이다.

나는 사부님의 법리에서 깨닫게 됐다. 조사정법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세 가지 일을 잘하는 수련과정 중에 마주치는 어떠한 사람(속인과 수련생), 부딪친 어떠한 일(속인의 일과 대법의 일), 수련생 사이의 교류 혹은 속인의 각종 모임활동에 참가해 진상을 알리는 등등을 포함해 당신의 사상 언행, 일사일념은 모두 마땅히 자비를 체현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단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엄격하게 자신에게 요구해야 비로소 점차적으로 해낼 수 있다. 최후에 비로소 완전히 해낼 수 있고 법의 요구와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5-2004년 미국 서부법회 설법’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스위스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9/3370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