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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무형’에 대한 옅은 체험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이 몇 년의 수련 중에서 일부 수련생은 줄곧 형식을 만들어 내고 이런 형식에 집착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개인의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수준의 제한으로 옳지 않은 곳이 있으면 수련생들은 법을 스승으로 삼기 바란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당초에 우리는 각 지역에 보도소가 있었고 소장과 보도원이 있었으며 북경에는 연구회와 자원 봉사자가 있었다.나 개인의 이해로는 이러한 것은 다만 일반인 사회에 나타나는 형식으로서 일반인의 조직과 본질적인 구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진정한 내포는 수련이며 수련 자체는 “대도무형(大道無形)”이다. [4]

비록 평화시기에는 연구회와 각지에 보도소가 있었지만, 연락과 전달하는 작용만 했을 뿐 일반 조직적인 기구가 갖고 있는 역할은 하지 않았다. 수련생과 상하 관계가 아니고 연락인과 보도원도 모두 자원적으로 명부가 없다. 모두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한 부의 법을 배우면서 법으로 자신의 심성수련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를 가늠했다.

대법이 홍전 될 때 TV나 신문에 광고하지 않고 오직 연공장의 현수막에 대법에 대해 아주 간단한 소개만 했을 뿐이었다. 만약 우리가 신문이나 TV에 광고했다면 표면적으로는 파워가 있을 것 같지만 선전하는 과정에 “모모공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모모공이 신문에서 좋다고 하더라, 모모가 공을 배운 후 병이 치료됐다”는 등등, 이로 인하여 공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것은 구하러 온 것이고 유위로 온 것이다. 하지만 대법이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진정하게 법을 얻어 수련하여 승화해야 한다. 입문한 세인이 최대한 집착으로 공을 배우러 오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설사 온 사람이 좀 적더라도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오게 해야 한다. 실제로 유형적인 형식이 없어 대법 전파가 저애 받지는 않았다.

1999년 7.20 이후, 박해 중에서 연구회와 보도소가 없어졌지만, 수련생들의 수련은 영향받지 않았다. 우리가 수련하여 제고되는 데는 이러한 형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7.20 이후, 사람들은 속속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갔고 수련생이 자료점을 설립하고 걸어 나와 세인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렸다. 이 과정에서 어떤 수련생은 사람들이 모두 베이징에 가야 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료점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닐지라도 마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매 사람의 심성, 당시의 수련상태는 모두 같지 않은 것으로 하나의 과정이 필요하다(이 또한 수련 과정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려면 곤란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곤란 속에는 자신을 가로막는 두려운 마음과 친척 친구가 이해하지 못 하는 것, 전반적인 환경 하에 두려운 압력이 있는데 오로지 자신이 착실하게 수련하여 한 문제 한 문제 제고해 올라와야만 확실한 제고이다. 이런 제고하는 과정은 아마도 몇 개월 또는 몇 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간에 이런 제고는 모두 진실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수련생들이 내심으로부터가 아니고 어떠한 조직적인 형식으로 하게 한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자신이 하지 않아 체면이 서지 않는다든가 또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원만하지 못한다든가 등등 여러 가지 집착을 일으킬 수 있는데 내심 우러나서 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조직한 사람도 수련을 잘하거나 높이 깨달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아주 많은 책임자와 보도원이 낙오했거나 심지어 반대방향으로 나아갔다. 법을 수호하는 중에 나타난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많은 사적은 조직하는 사람이 없고 본보기가 없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완성한 기적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대도무형이라, 각종 환경은 모두 대법제자에게 제공해 준 수련 장소이며, 모두 수련할 수 있다. 당신들 오늘날의 수련은 과거 어느 각자(覺者)가 사람에게 남겨준 문화 중의 그런 소도(小道)의 수련이 아니라, 전 인류사회에서 당신들 사람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해서 수련하도록 전반적으로 펼쳐놓은 것이다.” [1]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이해는 형식은 마치 하나의 용기와 같아 그것의 내용과 내포가 안에 담겨 있다. 수련도 한 가지 형식이 있다. 석가시대의 수련형식은 숲 속에서 가부좌하고 출가(出家)하여 밥을 빌고 탁발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수련하는 대법은 매우 크다. 그렇다면 그것에 적합한 더욱 큰 형식이 있어야 한다. 마치 한 사람이 입은 옷처럼, 이 사람이 매우 높고 크다면 큰 옷을 입어야 한다. 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커서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옷’도 끝없이 커야만 그가 입을 수 있고 그가 속박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이때문에 이 “옷”은 보기에 끝이 없는 것처럼 커 보이고 ‘무형’으로 크다.

예를 들면 자료점의 운행은 기본상 가정식의 작은 자료점이다. 어떤 이는 가정환경이 허용된다, 한동안 소책자의 효과가 괜찮다 생각되어 소책자를 한 번 더 찍을 수 있다. 얼마 찍는가는 자신의 상태에 근거하여 결정한다. 한동안 지나서 수련상태가 좋지 않거나 진상을 알리는 더욱 좋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되면 이 기간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진상을 모르는 가족이 반대하는데 그럼 우선 가족과 모순을 일으키지 말고 가족에게 진상을 알려 가족이 이해하고 지지할 때 집에서 “작은 꽃을 피울”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진상을 알리는 방식이 비록 좋긴 하지만 그에게 더욱 좋은 방법과 더 큰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진상을 알릴 수 있다. 우리의 수련은 끊임없이 층차를 제고하는 것으로 심성의 제고에 따라 주변의 환경과 법에 대한 이해, 여러 방면에서 모두 상응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세상의 만사만물은 모두 우리에게 진상을 알리라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수련은 또 본보기가 없다. 그렇다면 진상을 알리는데 천만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어떤 항목은 여러 사람이 협조하여 함께 완성해야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도 그중의 한 가지 방식이다.

개인적인 체험으로 대도무형의 위력은 그것이 원용하는 것으로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사악이 대법을 박해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줄곧 소위 “두목”만 잡으면 전반 대법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법수련자는 명부가 없어 사악은 연구회의 책임자와 각 지역의 보도원에게 중형을 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하지만 각 지역의 책임자는 다만 명의상의 것으로서 실질적인 ‘상관’은 아니다. 우리가 수련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법과 사부님께 의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대법의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활동은 줄곧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늘 장 씨와 이 씨가 협력하여 무엇을 했다면 내일은 장 씨와 왕 씨가 협력하여 다른 한 가지 일을 할 것이다. 모레는 이 씨와 조 씨가 함께 다른 어떤 일을 할 것이다. 수련생들은 대법에 따라 하고 상관이 없기에 누군가가 비뚤게 이끄는 일이 없으며 규칙이 없기에 사악도 손을 쓸 수 없다.

사악은 박해 중에서 줄곧 소위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며 여러 해 동안 파괴된 대형 자료점도 많이 나타났다. 또 어떤 사람은 소위 높이 수련하여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또 어떤 지역의 협조인은 일반적인 상사처럼 각 지역에 돌아다니는데 어떤 이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핑계고 어떤 이는 교류하여 “수련생을 도와 제고한다.”라는 것인데 사실 형식상에서는 이미 일반인의 상사가 ‘업무를 지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떤 수련생은 이런 협조인 주변을 맴돌기를 매우 좋아한다. 공산사당은 그것의 통치를 유지하려고 몇십 년래 줄곧 대중의 머릿속에 ‘노예근성’ 사상을 주입했다. 지금의 사람들은 독립적인 사고와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을 보기 좋아하며 다른 사람이 관리해 주는 것을 좋아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어야 소위 ‘소속감’이 있게 된다. 사당의 영화 속에 자주하는 한마디 말은 ‘조직을 찾았다’이다. 수련한 후 어떤 수련생은 여전히 이것은 일종의 당 문화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수련을 잘한 수련생이나 협조인을 만나면 어떤 때는 “우리는 당신을 따라 할 것이다.” 또는 “드디어 지도하는 사람이 생겼다.”라는 이런 심태를 표현할 때도 있다. 한 가지 일을 함에 법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고, 협조인이 이 일을 해도 된다고 말해야 마음속으로 자신이 생기고 말하지 않으면 자신 없어 한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셨는가? 사부님께서는 설법하셨다: “한 보도소장의 지휘 아래 여러분이 모두 가서 한 가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어떠한 일을 하는 특수한 정황에서 보도소장이 통일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 사람은 모두 주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만약 무엇이든 통일적으로 하고 보도소장이 한마디로 결정하여 여러분이 그를 따라 똑같이 한다면 이 보도소장이 무엇으로 수련 성취되면 당신들은 단지 그의 세계 중생일 뿐이다. 나는 당신들이 이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대법제자들 매 사람이 모두 왕이 되기를 바란다. 매 사람이 모두 자신의 길을 걸어 나오며, 매 사람이 모두 자신의 독립적인 과위를 실증해야 한다.” [2]

개인적인 이해로는 한 생명으로서 일체 일은 법으로 가늠하고 일에 부딪히면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주동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자신이 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진다. 이것이야말로 한 생명에게 있어야 할 상태이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대도무형의 수련이란 사실 일종 무형의 형식이다.” [3]

나의 체험은 기왕 대도무형이 우리의 수련형식인 만큼 이런 형식은 우리가 연공 할 때 파룬을 네 번 밀어서 돌리고, 발정념 할 때 오른 손을 사용하며, 가부좌할 때 남자는 왼쪽이 안 오른쪽이 바깥처럼 고쳐서는 안 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생각에는 꼭 이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환희심 또는 수련을 잘한 ‘고수’를 보았거나 외재적인 형식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런 수련형식을 개변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 “각 지역 설법 10 – 맨해튼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 “정진요지 – 북경 노수련생에게”

문장발표: 2016년 8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정법수련마당 >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22/3333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