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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대법 가운데서 태연함을 닦아내다

글/ 동북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6년부터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하여 올해 1월 수련한 지 20년이 됐다. 붓 한 자루로는 내가 감수한 대법의 순정함, 박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여기에서는 단지 법을 얻은 초기의 작은 이야기들을 써내어 수련생과 자신에게 수련을 처음처럼 하면서 정진해야 함을 잊지 말도록 일깨워 주고자 할 뿐이다.

지린대학 남부구역 연공장에서

법을 얻을 때 나는 22살로 지린대학의 한 석사 연구생이었다. 당시 지린대학 남부 구역 연공장은 추이원루(萃文樓) 측문에 있었는데 내가 그곳 연공장에 처음 갔을 때는 마침 겨울이라 영하 십몇도 되는 날이 늘 있었다. 문 옆과 층계 부근은 따뜻하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누구도 유리한 지형을 다투어 차지하는 사람은 없었고, 보도원과 노 수련생은 좋은 위치를 신 수련생에게 남겨 주었다. 어떤 때 신 수련생이 장갑을 끼고 오는 것을 잊어버리면 노 수련생은 즉각 자기 것을 벗어서 신 수련생에게 끼워준다. 남을 배려하는 이런 환경은 사람에게 이 단체가 다른 단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쉽사리 감수하게 한다.

그때 남부 구역 연공장의 수련생들은 아침에 한 시간 단체 연공하고, 저녁 식사 후 40분 포룬을 연마했으며 저녁 자습이 끝나면 어떤 수련생은 연공장에 나가서 정공을 하면서 아주 정진했다. 나는 수련 전에는 나약하고, 트집을 잘 부리며, 고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때 늦잠을 좀 더 자려고 하면 꿈에 보도원이 눈 속에 서서 연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깨어나서는 부끄러워 더는 늦잠을 자지 말아야 하며 게으름을 부리는 것도 마성(魔性)이라고 자신에게 알려 주곤 했다.

4월의 창춘은 늘 큰바람이 부는 날씨다. 어떤 때는 이런 날씨는 겨울에 연공하기보다 더 견지하기 어려운 감을 준다. 바람은 모래를 날려다 얼굴에 뿌리고 치는데 이빨 사이에도 다 모래가 들어가는 것 같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나는 황사가 날리는 흐릿한 날씨를 보면서 자신을 한 번 용서하기로 하고 연공에 참가하러 가지 않으려 했다. 잠시 후 같은 층에 사는 수련생이 노크하면서 말했다. “우리 함께 연공하러 가요.” 나는 안 가겠다면서 그녀 혼자 가게 했다. 2분도 안 되어 또 한 수련생이 와서 문을 노크하면서 “우리 함께 연공하러 가자.”라고 했다. 나는 웃었다. 보아하니 사부님께서 나에게 연공하러 가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수련생과 함께 황사를 맞으며 숙소에서 나왔고 연공장으로 가는 길에 후베이 출신 어린 수련생을 만났다. 내가 말했다. “우리 창춘의 모래가 흩날리는 날씨를 봐요, 어디 봄의 모습이 있나요, 봄이 길다(長春)는 말은 더욱 하지 말아야죠.” 어린 수련생은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모를 거예요, 나는 그래도 언니 집이 창춘에 있는 게 부러워 죽겠어요. 이곳은 대법이 널리 전해진 곳이므로 앞으로 성지가 될 것이며, 전국 각지의 사람이 모두 창춘에 와서 성지를 순례할 거예요.” 수련생의 말을 듣자 나는 나의 오성이 차함을 의식했다. 세 사람은 웃고 떠들며 연공하러 갔다.

또 한 번은 아침 연공 때, 두전포룬(頭前抱輪)을 막 시작했는데 녹음기 전지에 전기가 없었다. 보도원이 말했다. “여러분 그냥 포룬을 하세요. 제가 구령을 외치겠습니다.” 그 날 연공은 유달리 조용하고 상화한 것 같았다. 마치 시간이 응고된 듯했다. 우리 몸은 세간을 벗어난 아름다운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연공을 마치자 보도원이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사람마다 모두 포룬을 한 시간 넘게 했습니다.” 수련생들도 모두 웃었다.

그때의 젊은 제자들은 모두 아주 솔직하여 무슨 고비를 만났다거나, 무슨 잘못을 저질러 넘어졌다거나 무슨 새로운 깨달음이 있거나 하면 곧이곧대로 말하고 속인 식으로 감추거나 과실을 덮어 감추지 않았다. 수련생에게 집착이 있으면 직접 지적해 주었고, 지적당한 수련생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 법공부 팀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흉금을 활짝 열어놓고 착실하고, 자유롭고, 유쾌하며, 거리낌 없는 그런 감수를 느낄 수 있었다.

법공부 팀에 참가한 수련생은 아마 모두 무심코 한 말을 듣고 이득을 봤다고 하는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 번은 한 수련생이 ‘일심불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말했다. “우리 법공부할 때면 일심불란 하게 하고: 속인 지식을 배울 때 일심불란 하게 배우고: 식사할 때 일심불란 하게 식사하고: 일할 때 일심불란 하게 일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이 말을 할 때, 느릿느릿했고, 어투는 일반적이었으며, 표정과 태도가 매우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당시 자리를 같이한 사람 가운데는 성격이 조급한 사람이 있었는데 마침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이 말은 자기를 일깨워 준 것이라면서 이는 바로 자기가 잘 닦아야 할 곳이라고 밝혔다.

또 한 번은, 한 수련생이 지도자로부터 가짜(거짓) 일을 하라는 강요를 당했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가짜를 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로 몸부림쳤다. 법공부 팀에 와서 이 말을 하자 즉시 한 수련생이 사부님 설법을 외웠다.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말은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꼭 참말이어야 한다.” [1] 다른 수련생도 자신이 ‘진(眞)’을 견지하여 마난(魔難)이 스스로 물러간 생동한 실례를 교류했다. 이 여 수련생은 정념을 확고히 하고 신심 가득히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지도부에서 그녀까지 거짓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 이 한패의 대법제자가 법을 얻을 때는 한창 젊을 때여서 대부분은 병을 떼고 몸을 건강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법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법리(法理)가 사람을 탄복시키기 때문에 수련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수련생은 학교에서는 모두 품행과 학업이 다 훌륭하여 학우들 가운데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 그 당시 내가 학우에게 준 인상은 순정하고 늘 웃음을 담았으며, 길을 걸어도 유달리 경쾌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알려 주었다. “원래 몇 사람이 어둡고 부패한 것이나 좋지 못한 일을 말하고 있었는데 네가 들어오자 모두 화제를 개변하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숙소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수련한다. 수련하지 않는 그도 사람들에게 칭찬한다. “우리 이 방안은 장(場)이 좋다.” 학우들 가운데 ‘전법륜’을 본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대다수는 수련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파룬궁은 사람에게 선을 가르친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수련에 들어서지 못한 원인은 보통 이 법이 요구가 너무 높거나 집착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지 이 법이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화광장에서 연공했던 나날

1998년 3월, 나는 석사 단계의 학업을 마치고 학교에 남아 선생이 됐다. 집이 남부 구역에 있지 않았기에 내게 수많은 아름다움을 주었던 지린대학 남부 구역 연공장과 고별하고 문화광장 연공장 일원이 됐다. 그때 대법은 이미 창춘에서 널리 전해져 아침이면 공원, 광장, 다리 언저리와 거리 모퉁이 곳곳에서 모두 대법제자가 연공하는 모습과 상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착실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 있으니 창춘은 정말로 봄의 도시가 되었고 이 사회도 희망이 있게 되었다.

문화광장 연공장에서 평소 아침 연공에 참가하는 인원수는 3백~5백 명 정도였는데 그곳의 풍경 자체도 아름다운 데다 대형 단체 연공을 할 때면 더욱 장관이었다. 날마다 아침이면 수련생은 연공장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일찍 온 수련생은 조용히 앉아서 정공을 연마하다가도 단체 연공 시간이 되기만 하면 모두 정연하게 줄을 맞춘다. 연공을 마친 후 종잇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연공장에 좀 일찍 도착하니 마침 정공을 하는 수련생이 가부좌하고 앉아 있었는데 장엄하고 상화하여 사람의 경의(敬意)를 불러일으켰다. 7, 8세 되는 아이들이 부근에서 뛰어다니며 몹시 떠들었으나 여러 수련생은 산처럼 끄떡없이 앉아 있는 것이 조금도 교란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한 아이가 뛰어다니다가 그만 한 노인 수련생 품에 넘어졌다. 노 수련생은 침착하게 아이를 부축해 세우고 자애롭게 웃고는 계속 조용히 앉아서 입정에 들어갔다. 이 노 수련생은 원래 백발이 성성했지만, 후에 머리 뿌리에 검은 머리가 자라는 것을 발견했고 사람마다 신기하다고 했다.

나의 법공부 팀은 문화광장 부근에 있었다. 법공부 하러 오는 사람으로는 대, 중, 소학교와 유치원 교원이고, 엔지니어, 의사, 퇴역군인이 있는가 하면 청급, 처급 간부가 있었고, 노동자와 가정주부도 있었다. 이곳에는 사회의 등급 차이가 없었으며, 누구나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수련하면서 서로 돕고 공동으로 제고했다.

한 노 수련생이 법공부 팀에서 그녀가 만났던 한 가지 일을 서술하여 수련생들은 듣고 나서 분분히 찬사를 보내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은 늦은 가을이었는데 많은 사람은 겨울을 날 채소를 준비하는 데 습관이 되었다. 이 이모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앞에 가는 노인의 자전거에서 커다란 대파 한 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얼른 다가가 알려 주면서 그 노인을 도와 대파를 차에다 단단히 묶어 주었고 그 노인도 감사를 표시했다. 이때 그 노인의 아내가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수련생 이모를 욕했는데 욕이 유달리 듣기 구차했고, 많은 구경꾼을 불러 모았다. 수련생 이모는 예의 바르게 두어 마디 설명했으나 그 사람은 듣지 않았고, 이모는 욕설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그냥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말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자 나는 이 일을 잊어버렸는데 법공부 팀에 와서 모두 고비를 넘는다는 말을 하니 그제야 생각났어요.”라고.

팀에서 수련생들은 함께 교류했다. 좋은 마음으로 남을 도와준 것이 오히려 공연히 모욕을 당한 일은 적지 않은 수련생이 부닥친 일이다. 참아내고 흉금이 넓어서 일에 부닥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사후 억울함을 느끼지 않고,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많은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2]만약 우리가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선자(善者)가 될 자격마저 없을 것이니 법의 요구와는 차이가 너무나 멀다.

우리 법공부 팀에는 전공(電工)이 있었는데 팀에 막 왔을 때는 몸이 뒤룩뒤룩 살이 쪄서 길을 걸어도 헐떡이고 말을 해도 거칠었다. 그의 자술에 따르면, 수련 전 그는 낚시했고 또 전기로 고기를 잡기도 했다. 한 번은 아내와 다투고 홧김에 임신한 아내를 때려 유산하게 했다. 수련 후 ‘진·선·인(真·善·忍)’ 표준에 따라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며 남을 배려하니 가정이 화목해졌다. 1998년부터 1999년 박해가 시작되기 전 짧은 일 년 반 사이에 우리는 그가 환골탈태하여 건강하고 튼튼하며 문명하고 상냥해졌으며, 법을 따르는 착하고 선량하고 뛰어난 확실히 좋은 사람으로 용련된 것을 보았다. ‘7·20’ 후 지린성 각지 수련생이 성 정부에 상방(청원)하러 갔다. 우리가 아직 어떻게 외지 수련생을 실제로 도와줄 것인가를 토론하고 있을 때 그는 벌써 집에 돌아가 계란 몇 솥을 삶아다가 외지 수련생에게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법공부 팀이 그야말로 얻기 어려운 인간 정토임을 느꼈으며, 사람마다 모두 이 환경을 소중히 여겼다.

법에서 태연함을 닦아내다

1999년 3월 말경, 나는 화중 명문학교 박사 연구생 입학시험에 참여했다. 시험 준비와 시험 기간 내내 나에게는 별반 압력이 없었고, 법에서 닦아낸 초연한 심리 상태로 침착하게 대하여 본 학과의 제1위를 따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어떤 학우는 시험 전 10일 동안 학교 내의 가장 훌륭한 호텔에 독방을 세내어 전력으로 시험공부를 했고, 어떤 학우는 먼저 지도교사를 찾아가 줄을 달았으며, 어떤 학우는 입시 전에 압력이 커서 온 밤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어떤 학우는 긴장하다 못해 면접 시 머리 안이 텅 비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시험 기간 학교 밖의 초라한 여관에 들었고, 시험 여가에 한 방에 든 산둥 여자애의 석사 논문 답변 준비를 도와주었다. 그녀에게 우리가 수련하는 대법을 소개했으며, 또 그녀와 함께 내가 응시한 이 학교의 법공부 소조에 가서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심태가 좋고 일을 가볍게 처리한다고 부러워했다. 사실 나는 대법이 좋기에 제자에게 명리에 집착하지 않는 태연함을 준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화중에서 박사 공부를 할 때 나는 우리 반급에서 가장 어렸지만, 일상생활과 학습에서는 항상 내가 남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게 ‘성녀’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어느 한 번 저녁 자습 후 한 방의 학우와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데 옷을 얇게 입은 학우가 문을 나서자 몸을 떠는 것을 보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나는 그때 안에는 털내의 한 벌만 입었다. 교실과 숙소 사이는 10여 분 걸렸다, 걷고 걷는데 등에서 큰 파룬이 돌면서 따뜻하고 편안해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호하심을 알고 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학우는 “춥지 않아요?”라고 물었고 내가 진실한 일을 알려 주자 그녀도 몹시 탄복했다.

그녀에게 그들 시내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잘 아는 관원 친구가 있었다. 이 관원이 그녀를 보러 학교에 왔을 때 그녀는 일부러 그 관원에게 파룬궁 탄압에 참여하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파룬궁 제자와 한 호실에서 그렇게 오래 살면서 이 사회에서 파룬궁 제자처럼 훌륭한 사람을 더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경찰: 내가 가장 탄복하는 사람은 당신들 사부님이시다

2002년 3월 5일 창춘 TV 방송프로 삽입 방영의 장거가 있고 난 뒤, 장씨 집단은 창춘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하여 광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나도 파출소에 납치당했다. 비록 사부님의 가지와 수련생의 발정념 도움으로 하루도 안 되어 벗어나긴 했지만 그때 지린대학에서의 교직을 잃게 됐고, 박사 연구생의 학업도 중단됐으며 창춘을 떠나게 됐다. 불법으로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나는 한 젊은 경찰에게 다른 사업을 찾으라고 알려준 적이 있는데. 그가 몰래 나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들 사부님이십니다. 이렇게 많은 교수, 박사가 그의 제자가 되어 전도(前程)를 잃고 일체를 잃을지언정 모두 그에게 한 마디 나쁜 말도 하지 않으니 이 사부님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십니까!”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지만 편폭의 제한으로 여기까지만 쓰려 한다

파룬따파가 박해를 당한 지 17년이 되었다.우리 억만 대법제자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명리가 당한 손해인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기만, 폭력의 통치 아래에서 날로 타락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세상 민심이다. 중화 본토는 원래 신이 관심하는 곳인데 지금은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음식물, 물과 공기마저도 이젠 안전하지 못하게 됐고, 많은 사람에게는 도덕적 최저선이 없어졌으며, 중국 사회는 이미 서로 해치는 사회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직 우리만이 알고 있다.만약 애초에 이 박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중국 사회는 안녕하고 평화적이며 예의가 바르고, 번영하면서도 덕행이 있는 광경일 것이다. 대법제자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진상을 알리고 있으며,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비할 바 없는 홍대한 자비로 중생을 위해 감당과 지불을 하고 계신다. 그러니 귀중한 중국 동포들이여 이를 소중히 여기고 진상을 요해하여 이 만고의 기연을 놓치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주:[1] 리훙쯔사부님저작:《전법륜转法轮》

[2] 리훙쯔사부님경문:《정진요지》〈경지〉

문장발표: 2016년 5월 2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5/24/3275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