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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내려놓다’에 관한 옅은 깨우침

글/ 내몽골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에 인터넷에 ‘자아를 내려놓다’에 관한 문장이 많다. 나도 ‘자아를 내려놓다’에 대한 최근 일부 인식을 말하고 여러분과 교류하려 한다.

1.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사람 마음으로 법을 가늠하다

‘7.20’ 이후 떨어져 내려간 수련생을 우리가 일부 찾아오긴 했지만 일부분은 여전히 각종 핑계로 걸어나오지 못했다. 예를 들면 아들딸이 못하게 한다느니, 또는 자녀들의 앞날을 고려해야 한다느니, 또는 우리가 지금 XX당과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등이다. 대법이 좋은 줄 알기에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지만 법공부도 안 하고 연공도 안 한다. ‘정’, ‘두려움’ 및 ‘당문화’에 교란 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줄곧 내려놓지 않고 법공부도 하고 연공도 하지만 ‘삼퇴’를 권하는데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좋으면 연마하면 되지 다른 사람(XX당을 가리킴)을 나쁘다고 할 건 뭔가요? 이건 쟁투심이 아닌가요?”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종결한다고 하면서도 종결하지 않는데 언제 끝이 나나요?” 심지어 마작을 하는데 사람이 모자라면 가서수를 채운다. 손에 사람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또 초상적인 것은 얻으려 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가늠한다. 그에게 말한다. “이 시간은 사부님께서 연장해주신 것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한데 지금 종결하면 당신은 표준에 부합합니까? 당신이 이해할 수 있으면 법이고 이해하지 못하면 법이 아닙니까? 사부님께서 거대한 지불로 종결 시간을 연장하고 계신데 일단 종결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대한 ‘자아’가 진아(眞我)를 교란해 법 중에서 정진하지 못하게 하고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잃게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어느 한 층차에서의 인식을 고집한다. 자신의 인식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과 같지 않은 인식은 일률로 배척한다. 사실은 이미 다른 형태로 법에 정의를 내린 것이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내가 당신들에게 사람의 인식을 전변하라는 것은, 당신들에게 사람이 대법(大法)을 인식하는 이런 상태를 고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지(理智)적이지 못하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하라는 것도 아니며, 당신들에게 대법(大法)을 청성(淸醒)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1]

2.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수련생을 가늠하다

어떤 수련생은 속인이었을 때의 생각을 수련 중에 가져와 “나는 이전부터 이랬어”라고 말한다. 이전에 당신은 사람이고 사람의 관념이지만 지금은 수련하기에 사람의 마음을 닦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사람 마음으로 주위에 발생한 모든 것을 가늠하면서 모두 우연한 것이고 당연히 여기며 잘난 체하고 감정적으로 대한다. 발생하지 말아야할 모순을 무단히 많이 만들어 몇 년 동안 심성관을 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을 요구하셨다. 우리에게 또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2]라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심성 고험이 올 때면 그것을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법도 생각나지 않는다. 쟁투심, 원망심이전부 올라와 한 차례 또 한 차례 사부님께서 심성을 제고해주시기 위해 안배하신 기회를 밀어버렸고 모순에 부딪히면 에둘러간다.

수련 중에서는 속인의 마음으로 다른 수련생을 가늠하는 것을 가장 기피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그는 속인의 이치로 부처의 心性(씬씽)을 가늠하는데, 그 어찌 가늠해 낼 수 있겠는가?”[3] 자신의 심성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낮게 본 것이다.

마치 가정생활을 하듯이 만약 늘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보고(또는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결점을 가늠한다면), 그럼 이 가정은 화목하지 않고 모순이 끊임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교류문장 ‘보물단지’와 ‘쓰레기통’을 보았는데 이런 한마디 말이 있었다. “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본다면 당신은 보물단지이고, 늘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본다면 당신은 쓰레기통이다.”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늘 자신의 장점을 본다면 제고할 수 없고 늘 자신의 결점을 본다면 자신이 앞으로 노력할 방향을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제고에 반드시 일취월장 할 것이다.

며칠 전에 교류문장을 보았는데 수련생이 이런 예를 들었다. “한 제자가 있는데 그의 사부가 그에게 소금 한 줌을 물 한 컵에 넣고, 한 주머니의 소금은 호수에 쏟은 후 물맛을 보라고 했습니다.(역주: 심성 용량이 커지면 외부의 자극에 대해 변화가 적다는 뜻)”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런 일에 자주 부딪힌다. 다른 수련생을 도와 일을 하고 비난을 받았는데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수련생 언니에게 투덜거렸다. 언니는 오히려 “너의 심성 용량을 확대해야겠구나”고 말한다.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수련인의 심성 용량이 늘 한 수준에 있으면 안 되지!’ 똑같은 하나의 관을 심성 용량이 낮을 때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지만 심성 용량이 제고된 후에는 요만한 난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이 크게 변했기에 그 난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넘기 쉬워진 것이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그의 心性(씬씽)이 있는 위치에 이르렀을 때 그의 공도 여기까지 자랐는데, 그가 그의 공을 더 제고하려 하면, 이 모순 또한 두드러져서 그는 계속 그의 心性(씬씽)을 제고해야 한다.”[3] 심성을 제고한 후 확실히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壹村)’[3]을 느꼈다.

중국의 전통문화 중에 이러한 말이 있다. 바다는 많은 강물을 수용하는데 수용해야 큰 바다가 된다. 내 생각에 바로 선을 수련하는 문제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선(善)은 부동한 층차와 부동한 공간에서 우주 특성의 표현이며 또한 대각자들의 기본 본성이다.”[4] 게다가 부동한 층차에서 선에 대한 요구도 다르다.

3.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자신을 가늠하다

두 가지 상황이 있다. 한 가지는 열등감으로서 자신이 나이도 많고 지식도 없으며 기억력도 나쁘고 둔해서 배울 수 없다는 등 사람의 관념으로 자신을 방해하고 자신을 수련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법을 실증하는 많은 일을 잘하지 못한다. 당신이 하려는 일념도 없는데 사부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상관하신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3] 만약 모두 대법제자이고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못하는가. 나는 초상적인 사람이고 사부님께서 상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결과는 틀림없이 크게 다를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잘난 척 하는 유형인데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깔본다. 잘난 척하고 제멋대로 한다. 어떤 수련생은 특별히 자신의 체면을 중히 여기는데 잘못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사실은 다른 사람만 수련하고 자신은 수련하지 않은 것이다. 심성관을 반복적으로 넘어 골치가 아프고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다고 사부님께서 당신의 관을 철거할 수도 없다. 왜냐면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세력은 또 이 마음을 강화해 당신의 사람 마음을 이용하여 대법제자 중에서 시비를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데 당신 자신은 모르고 있다. 수련인인데 자신의 체면을 너무 중하게 보고 체면으로 인해 말을 못한다. 사람의 체면이 몇 푼이나 하는가, 이건 정이 아닌가? 사람의 물건을 고수하고 놓지 않는다면 수련에서 강대한 교란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과 ‘맨해튼 설법’에서 대법제자들에게 말을 못하게 하면 안 되고 말을 하기만 하면 폭발하면 안 된다고 요구하셨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4. 자아를 내려놓고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똑똑히 구분하다

몇 년 전에 나는 인터넷에서 문장 한 편을 보았다.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이 쓴 문장이었다. 나는 한 층 공간에 자신의 관념이 구성한 자신의 한 층 신체를 보았다. 사람의 주의식(主意識)이 강하지 않을 때 그것이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주재하는데 그것도 자신이 도태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도 주의식이 수련을 잘해서 자신을 구도하길 바란다. 하지만 사람의 주의식이 강하지 않을 때 그것은 여전히 작용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진아(眞我)가 아니라 사람의 후천적 관념이 구성한 가아(假我)인 것으로서 그것은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순 속에서 자신을 제고해 올라와 진정으로 공을 얻는다. 사악이 박해하는 시기에 사람의 주의식이 강하지 않을 때 사악은 대뇌 속에 좋지 않은 생각을 넣기도 한다. 심지어 매우 사악한 것인데 자신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나쁜 생각은 일반인일 때도 없었는데 확실히 사악이 반영해온 것이다. 정념이 강해지기만 하면 바른 에너지가 가지해 그 물건은 해체할 수 있다. 절대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주 자신을 일깨운다. ‘다양한 진상자료를 만드는 지혜는 사부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다. 절대로 환희심, 과시심,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고 배우려 한다면 나는 인내심 있고 세심하게 조금도 보류하지 않고 가르쳐 준다. 하지만 가끔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편집하고 자료도 만들고, 프로그램도 깔며, 위성 접시도 설치하고, 각종 소모품을 구입하며 동시에 도움이 필요한 수련생을 찾아 교류하고, 교류문장도 인터넷에 여러 번 발표했다. 모든 것이 다 되는지라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즉시 이건 자신의 사람 마음이 제거되지 않아 사악에게 강화되었고 그것이 나를 훼멸시키려 한다는 것을 의식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붙잡아 없애버림으로써 그것에게 다음에 나를 박해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의 안배가 없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때는 이런 일념이 나타난다. ‘법정인간 때 수련생과 남겨진 세인들에게 우리의 자료점을 한번 보라고 해야겠다. 안정적으로 최후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하지만 즉시 이것이 얼마나 강한 명리심이고 일하려는 마음인지 의식했다! 일체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다. 게다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아주 많은 것을나는 잘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다니 이건 하늘의 공을 탐하는 것이 아닌가?

우주정법과 대법제자의 수련이 곧 종결된다. 구우주의 잔존한 사악은 비록 적고 또 적어졌지만 여전히 기회를 찾아 악을 행한다. 때문에 우리는 시시각각, 일사일념, 일언일행에서 느슨하지 말아야 하고 사악에게 빈틈을 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전부가 진선인 특성에 동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5. 자아를 내려놓고 실수(實修)하여 안을 향해 찾다

10여 년 전에 인터넷에서 문장 한 편을 보았다. 이 수련생은 다른 공간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한 가지 지식을 배우든지 사람과 소통하든지 만약 당신이 자상하고 온화하고 상냥하다면 당신의 마당은 다른 사람의 마당과 호환하고 소통한다. 배우려는 지식의 마당과도 호환하고 소통한다(왜냐하면 다른 공간장에서 일체는 모두 생명으로 체현되기 때문임).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협력하기 매우 쉬우며 배운 것에 대한 이해도 빠르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 또는 그 지식에 반감을 갖는다면 두 마당은 서로 배척한다. 수련생과 교제하고 협력할 때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많이 보고 즉시에 안을 향해 찾고 전반적으로 많이 생각하고 자아를 담담하게 내려놓는다면 쌍방의 마당은 호환하고 소통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협력을 잘할 수 있다.”

처음에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5]를 나는 한 마디 형용사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 수련생은 안으로 찾는 이 법보가 다른 공간에서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영체로서 처음 법을 얻었을 때 사부님께서 넣어주셨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을 움직여 안으로 찾을 때 이 기제는 작동하기 시작해 우리 사람의 각종 관념의 외부껍질을 뚫는데 우리는 제고해 올라올 수 있다. 기왕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소중한 법보를 주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잘 운용하여 빨리 제고해 올라오지 않고 조사정법을 더욱 잘하지 않는가! 이는 사부님께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아닌가! 나는 발견했다. 누가 안으로 찾으면 그가 빨리 제고한다는 것을. 만약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의 강대한 자아가 방해하고 있다면 진정하게 안으로 찾지 못한다.

최근 한 편의 교류문장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면 아주 위험하다’에서 말한 것은 한 수련생이 검은 소굴에서 뛰쳐나왔지만 집에 돌아간 후 혼자 지내면서 수련생들과 교류하지 않고 ‘밍후이주간’도 보지 않아 최종적으로 사악에게 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친척과 친구들은 대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아를 고집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위험하다.

나는 수련생과 교류하거나 또는 교류문장을 쓸 때 사부님 말씀을 인용하는데 어떤 때는 법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자신을 실증하는 느낌이 든다. 이러면 상대방은 내가 그에게 나의 인식을 받아들이라고 강박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법으로 그를 억누르기에 그는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법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반감한다. 소통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효과는 반대가 된다.

그밖에 최근에 내가 깨달은 것은 구우주는 이기적인 것이고 신우주는 무사(無私)한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면 신우주의 무사무아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누락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우주의 규율은 성주괴멸이고 신우주는 원용불멸(圓容不滅)한 것이다. 원용불멸은 우리가 수련하는 과정에서 안으로 찾는 기제를 형성했기 때문인데 일체 바르지 않는 상태를 바로잡는 능력이 갖춰져 있다. 자동적으로 수선해야 신우주의 지혜를 갖출 수 있고 그래야 원용불멸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법을 잘 배울 수 있고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똑똑히 구분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뿌리로부터 사람의 관념을 개변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진정하게 무사무아(無私無我)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진정하게 안으로 찾을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전반적으로 조정하고 협조를 잘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모든 집착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중생을 생각하고 중생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조사정법의 사명을 완성하여 사명을 실현할 수 있다.

이상은 내가 ‘자아를 내려놓다’에 관한 깊지 못한 일부 인식인데 부족한 점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취중(取中)’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해설(淺說善)’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워싱턴DC 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5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정법수련마당> 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5/2/3274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