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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사무아, 선타후아’에 따라 수련했는가?

글/ 산둥 대법제자 정본(正本)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훈계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1]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나는 늘 당신들에게 한마디 하는데, 대법제자는 어떤 일을 함에 모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매번 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일종의 정황이 나타날 때, 설사 작은 일일지라도 나의 첫 일념(一念)은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다른 사람을 우선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2]

이전에 나는 이 법을 모두 감성적인 인식으로 읽었기에 지금까지 자신의 수련표현과 잘 결합시켜 깨달아 본적이 없다. 최근 수련생과 교류할 때 ‘무사무아, 선타후아’[1]의 법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문득 놀라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바로 사부님이 법 중에서 요구하신 ‘무사무아, 선타후아’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방할, 또는 제호관정(醍醐灌頂)을 한 것처럼 나는 꿈속에서 깨어났다.

낡은 우주가 멸망되어 가는 오늘날, 바로 선천적 구조의 결함으로 인해 생명의 근본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생명이 타락하고 각종 집착심이 생기는 근원은 이기적인 특성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법 중에서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새로운 우주는 구 우주의 건전하지 않은 각종 요소를 건전하게 했다.”[3], 또 “장래의 생명은 모두 타인을 위하는 것이다. 과거의 생명은 자신을 위했다”[4]. 만약 낡은 우주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위사(爲私)’를 ‘위타(爲他)’로 바꾸지 않으면 성주불멸(成住不滅)의 새로운 우주로 들어갈 기회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인식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한 이 대법은 바로 우리를 환골탈태해 새로운 우주에 동화시키시는 것이다!

수련을 이렇게 오래 했지만 오늘에야 갑자기 자신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의식해 부끄럽다. 법리는 내 앞에서 확연히 드러나 내 체내에 있는 모든 세포는 한순간에 깨어났다. 수년간 세 가지 일을 할 때 자신을 돌이켜보면 모두 ‘내가 어떻고’, 또는 ‘내가 어째서’라고 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는관점을 자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얼마나 수련이 잘됐든지 실제 상황은 수련의 이 길 위에서 엉뚱하게 달팽이처럼 간신히 기어갔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첫 일념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생명에 대한 소중함은 자연스럽게 진실함과 선량함을 무의식중에 우리에게 드러내게 할 것이다.

개인수련을 놓고 보면 질투심은 보통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 사부님은 ‘전법륜’ 중에서 질투심을 전문적으로 꺼내 단독으로 말씀하셨는데 질투심의 강약은 직접 심성의 높고 낮음을 반영한다. 수련인을 놓고 말하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원만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는데 줄곧 깨끗이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피동적으로 그에게 억제되어 근본적으로 조금도 제거하지 못하는가? 어떤 수련생은 매우 괴로워서 발정념 할 때 전문적으로 질투심을 겨냥해 제거하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내 개인인식으로는 근본적으로 ‘위사(爲私)’를 ‘위타(爲他)’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는 사부님이 예를 든 톰과 잭의 백점짜리 시험지처럼 함께 기쁨을 나누면 질투심은 생존할 공간이 없게 된다. 당신이 만약 자신을 위한 뿌리를 움직이지 않고 가지와 잎만 제거하면 시종일관 각종 사람마음과 관념의 교란으로 수련할 수 없게 된다. 세 가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실질적인 심성이 승화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본질상에서 여전히 구우주의 생명이다.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첫 일념이 진심으로 이 생명을 구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러러 나오면 사람을 구하는 효과는 많이 좋아질 것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사악의 해독이 아주 깊다고 해도 그를 위해 안타까워하고 상심하고 조급해하면 상대방의 무리한 언사에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사무아, 선타후아’를 갈수록 잘할 때 위사위아의 그 일면은 갈수록 약해지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없어진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수련성취 되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와 위사는 깡그리 사라진다.

나의 심성내부 경지는 현재 기쁘고 순정하다. 다시는 우주 특성과 늘 엉키지 않고, 이익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아를 실증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원수처럼 미워서 화내는 일이 없고 다른 사람의 눈에 거슬려 우울해 하는 일도 없다.(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밖을 향해보는 것은 바로 위사위아한 생명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신 사람과 사람지간의 연분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한 무더기 집착심을 찾고서도 제거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고민하지 않게 됐다. 나에게 반박해 수련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없다. 현재 나는 매일 제고될 때마다 모두 자연적으로 피동에 빠지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을 향해 찾는다’.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의 동기가 타인을 위하는 기점에 서있는지를 보고 제때에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은 바로 잡고 자신의 용량을 확충한다. 나는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것과 승화한 후의 현묘한 절경을 매우 깊이 체득했다. 수련은 나에게 이미 하나의 묵직한 ‘고된 임무’로부터 달콤하고 즐거운 일로 변했다. 나는 마침내 수련할 줄 알게 됐다.

나는 처음에 자신의 뿌리에서 문제를 인식했을 때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하고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아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사부님이 말겁(末劫) 이후 여전히 고생스럽게 널리 제도하신다는 것도 느꼈다. 나처럼 일반적으로 사람 중에 아주 깊이 미혹된 수련생이 아직도 적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깨달은 것을 썼다. 층차의 한계가 있으니 요구하는 표현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기서 못난 제자를 시종일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부님의 고초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이 문장을 써서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해 공동으로 정진하겠다. 적절하지 않은 곳은 자비로 바르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즈(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2] 리훙즈 사부님의 저작: ‘각지 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3] 리훙즈 사부님의 저작: ‘북미순회설법’[4] 리훙즈 사부님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 10월 2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23/3179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