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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공부는 마음에 닿게 해야 하고 형식에 흐르지 말아야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오랫동안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는데 바로 법 공부가 형식에 흐르는 문제다. 물론 이 문제는 이전에 수련생들이 모두 교류했지만 어떤 수련생은 여전히 중시하지 않고 있다. 오늘 나는 다른 한 각도로부터 내가 발견한 몇 가지 상황, 그리고 나의 법 공부에 대한 깨달음을 다시 말해 보려 한다.

우리 법 공부팀에 노인 수련생 몇 분이 있다. 한 번은 ‘전법륜’ 제4강 공부를 마치고 한 노인 수련생에게 무엇을 ‘관정’이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그 수련생은 모른다고 했다. 다음 또 다른 노인 수련생에게 물었더니 생각 밖에도 그 수련생은 ‘관정’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공을 가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내 마음은 그야말로 몹시 괴로웠다. 모두 십 몇 년씩 수련했다는 수련생이, 그것도 ‘전법륜’을 얼마나 읽었고 녹음도 얼마나 들었는지 헤아릴 수 없는데 놀랍게도 이런 가장 표면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법리마저 모두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법 공부 팀에도 참가해 보고 역시 이 방면의 교류를 진행했는데 많은 수련생에게 모두 이 방면의 문제가 존재할 줄 몰랐다. 바로 우리가 진작 파악해야 했던 ‘전법륜’의 많은 기본 법리, 개념이 아직도 얼떨떨하고, 어떤 젊은 수련생, 연공을 십여 년 한 어떤 노 수련생은 “연공하는 데 왜 공이 자라지 않는가?”의 두 가지 원인조차 모르고 있었다. [편집자 주: 또 한가지 상황이 있는데 머릿속으로는 들어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들어가지 않음이다. 다시 말해 머릿속으로는 대법의 표면적인 글자의 뜻은 알지만, 법을 보는 것을 자기의 집착을 직지(直指)하고 자신의 마음을 닦는 데 쓰는 습관으로 장기간 양성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지식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법을 ‘알았다’는 ‘수련한다’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속인 중에도 많은 사람이 대법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대법 내용을 복창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남을 대조하는 데 쓰고 수시로 자신을 대조하면서 자신을 수련하는 데 쓰지 않는데 이건 수련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수련 중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임을 알고 있으므로 나도 자신과 결합해 이런 방면을 조성하게 되는 주요 원인을 종합했다. 많은 사람은 세 가지 일 중에서 법 공부가 가장 쉬운 일이라고 여기는데 사실 나는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쉽다고 여기게 된 것은 아마 우리가 법 ‘공부’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기계적’으로 읽고 보고 할 뿐 사상을 진정으로 법에, 마음을 닦는데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 공부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려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법 공부할 때 사상이 진정으로 조용해 졌는지, 법 공부를 하는 심태와 목적이 단정한지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우리가 법 공부할 때 늘 각종 후천 관념, 사상 업력과 일부 외래 요소의 교란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이런 교란을 물리칠 수 있는지 없는지, 이는 우리가 법 공부할 때 엄청나게 강한 정념을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법 공부할 땐 주의식이 반드시 강해야 하고 정념으로 공부하고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매 한마디 말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알아야 하며, 가장 표면적인 뜻을 알아야 한다. 법 공부할 때 여러 수련생이 읽는 법을 듣노라면 우리에게 주는 감수는 같지 않다. 어떤 수련생이 읽는 것은 아주 유창하고 아주 익숙하지만, 사람에게 주는 감각은 몹시 흩어지고 표류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수련생이 읽는 법은 사람에게 아주 무게가 있고 아주 착실하면서도 또 편안한 감을 주는데 무엇 때문인가? 바로 ‘마음’을 쓰는 게 다른 것이다. 전자는 다만 책을 읽는 형식에 흐를 뿐이지만 후자야말로 비로소 ‘마음’으로 법 공부를 하는 것이다. 혼자 집에서 책을 보나 단체로 법을 읽을 때나 모두 ‘마음’으로 봐야 한다. 법을 읽는 것은 절대로 ‘입’을 쓰는 것이 아니고, 법을 보는 것도 절대로 ‘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쓰는 것이다.

나는 또 어떤 수련생이 ‘전법륜’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원인이라면 ‘전법륜’을 이렇게 여러 해 보았어도 무슨 더욱 높은 내포를 보지 못했고, 표면적인 뜻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보아서 다 익숙해 졌으므로 늘 보기도 싫다고 느낀다. 내가 여기건대 가령 우리가 법 공부를 이렇게 오래 했는데도 모두 법의 내포를 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문제를 잘 찾아봐야 할 것이다. 왜 보지 못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볼 수 있는가? 내가 여기건대 가장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마음’으로 법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원인은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가 높아졌으므로 우리가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나는 일부 노인 수련생들에게 법 공부를 더욱 진지하게 대할 것을 건의한다. 법 공부는 얼마를 하든지 간에 우선은 반드시 우리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표면적인 법리마저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해칠 뿐이다.

사실 법 공부를 잘하는 자체가 바로 수련이고 법 공부를 잘하는 자체가 바로 심성 제고와 사악을 제거하는 요소가 그 안에 있으며, 중생 구도의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함께 법 공부를 잘하여 최후의 길을 잘 걸어가자.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문장발표: 2012년 10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0/22/2643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