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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私)를 버려 귀진(歸眞)하자

글/ 지린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8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다. 그때 12, 3살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자신을 ‘소(小)제자’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십 몇 년간 지나오면서 속인들이 우리 연령대를 일컬어 ‘바링허우(八零後,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라 부르듯이 이 연령대 수련인들은 특유의 표현이 있다. 성인 대법제자와 같은 사명감과 책임감이 결핍하며 또 소제자처럼 그런 순정한 심념(心念)이 없다. 이것으로 유발되는 것이 매우 많은데 나는 수련과 속인생활을 결부해 중점적으로 ‘사(私)’에 관하여 말해보겠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순리롭게 실습할 때의 직장(작은 기업)에서 일하게 됐다. 순리롭고 또 전공에 맞는 것이어서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으로 여겨져 기타 몇 개 면접 본 직장을 모두 거절했다. 이 직장 사장님은 머리가 비상하고 또 엄격했으며 늘 나를 많이 질책했다. 언제나 내가 일한 것에서 부족한 점을 한 무더기씩 찾아냈다. 대부분 경우 나는 모두 인내심있게 받아들이고 고쳐나갔으나 어떤 경우 심성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억울함을 느꼈고, 해석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때 나의 깨달음은 ‘이는 내가 마땅히 수련해 버려야 하는 것이고 이 어려운 환경은 수련의 좋은 곳이다. 전문적인 기술면에서 더욱 많은 연마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이런 고험은 이삼년이면 족할 것이다. 이 방면에서 능숙해졌을 때 이 직장을 떠나서 겸직하면서 더욱 많은 시간을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면에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다.

장시간 지속됐으나 나는 이렇게 깨닫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게 된 것은 사실은 하나의 매우 강한 사심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장님과 대화할 때 자신이 매우 성실하다고 여겼고 ‘결심을 밝히는’ 말을 매우 많이 했으며 실제 행동에서도 확실히 이 방면에서 많이 노력해 강화했으나 수확은 크지 않았다. 표현된 것에 대해 사장님은 거의 모든 것을 틀리다고 했으며 한번도 내가 맞다고 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얼마 안 돼 나는 사직 당했다. 이유는 ‘성실함과 신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이라 생각했으며 영문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좌절을 당해보지 못했고 소위 이런 이유 아닌 ‘이유’가 있는 정황에서 안을 향해 찾았으나 그다지 발견한 것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하면서 심태를 조절했다.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면서 나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었다. ‘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구세력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들이 얻으려는 목적은 바로 그것들이 우주를 정법 중에서 정법하지 않은 것과 같게 회복하려는 것으로 여전히 그것들의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그것들의 산, 여전히 그것들의 물, 여전히 그것들의 신, 여전히 그것들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그렇게 성취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개변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표면형식을 좋게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옷 그것을 깨끗이 씻는다 해도 여전히 그 옛 옷인 것처럼, 말하자면 이런 뜻인데, 이 형용이 정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원래의 어느 것도 잃지 않는 기초 위에서, 그것들의 세심한 배치를 통하여, 교묘하게 이 겁난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것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얻으려는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구세력은 그 본질과 위사(爲私)의 것을 개변하지 않으려 한 것이며 단지 그 표면이나 개변해 보려는 것이었고 그것은 효과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직장에서 봉착한 문제도 바로 그것에 부합된 것이며 비로소 틈을 타게 했던 것이다. 나는 전문기술을 강화해 일의 효율을 제고하는 것으로 나의 직장을 유지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지켜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움직이려 한 것은 단지 표면이고 내심의 관념은 돌려세우지 못했으며 여전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장님의 각박한 태도에서 심성을 제고하려 했으며 직장에서 단련해 전문수준을 제고해 장래에 어찌하려고 했다. 나는 직장에 출근하면서 사장님의 돈을 받으니 일은 자연히 전심으로 투입해야 하며 배우게 되는 것은 액외의 수확이고 출근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장님은 앞길을 알 수 없는 속인이며 내가 가서 구도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의 심성을 제고하고 소업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것은 구세력과 같은 위사가 아니겠는가!

나의 전반 수련과정을 돌이켜보니 모두 이렇게 위사위아를 위한 것이었다. 단지 대법 속에서 얻으려고만 했고 대법에 의지하여 신체를 정화하고, 대법에 의지하여 자신의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대법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수련생이 박해를 당할 때 감히 일어나서 법을 실증하고 세인을 향해 대법 진상을 알려 그들을 구도하지 못했다. 사직당한 이유가 ‘성실과 신용이 없다’ 함이 맞는 말이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배치하신 이 수련의 길에서 사심의 장난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절충하여 했던가! 수련의 일에서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사부님께서는 나의 수련을 그만두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끊임없이 고무 격려하셨으며 사부님께서 늘 내 신변에 계심을 느끼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무거운 ‘사’를 품고 내려놓지 않았으며 사부님의 자비를 아낄 줄 몰랐다!

생활도 역시 이러했다. 우리 이 세대 아이들은 보통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어리광부리며 자라 매우 많은 습관이 양성됐고 사심이 매우 중하며 그 속에 용해되어 있다. 심지어는 서로 상대방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보아내지 못한다.

이 점을 발견하고 나는 곧 자신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때때로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곧 중얼거리며 다른 사람에게 기분 나쁜 안색을 드러냈고 자신이 수련임을 잊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한편의 글을 읽었다. 주나라 문왕 희창(姬昌)은 태어나기 전에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고 또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성덕이 뛰어나 조부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희창의 아버지 계력(季曆)은 장남이 아니었고 계력의 두 형인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은 셋째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장래에 희창이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해형만(荊蠻, 고대 중원 사람은 촉나라, 월나라 사람 혹은 남인을 형만의 사람이라 불렀다)지역으로 숨어살면서 서로싸움을 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달갑게 고생을 감당했다. 재산과 지위에 대면해 속인은 태백과 중옹의 정도로 해낼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는 수련인이잖은가?

수련의 입장에서 ‘사(私)’의 문제를 분석하니 자신에게 수많은 누락이 있음을 발견했다. 수년간 조사정법, 중생구도의 이 길에서 기본적으로 정지해 있었다. ‘사’가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자아를 중시하고 안을 향해 찾을 때마저 ‘나에게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잘해야 한다, 구세력이 틈을 타게 할 수 없다.’, ‘나는 중생을 구도하고 나의 세계를 원만해야겠다.’, ‘나는 일을 많이 해야 비로소 위덕을 수립할 수 있다.’, ‘나는 어찌어찌해야겠다.’ 이러한 염두는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깊이 보면 여전히 ‘자아’를 품고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정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하고 있는 것 같으나 최종적으로는 구우주의 ‘위사위아’의 낡은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비로소 표준에 도달할 수 있고 새로운 우주의 신으로 성취될 수 있겠는가!

‘사’의 본질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일찍 ‘전법륜(轉法輪)’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그가 잘살수록, 그가 더욱 이기적일수록, 더 많이 점유하려고 생각하는데, 그는 우주의 특성과 더욱 어긋나며, 그는 곧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 또 ‘정진요지-불성과 마성(佛性與魔性)’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불성은 선(善)으로서, 자비로 표현되며 일을 함에 있어서 우선 남을 고려하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람의 마성은 곧 악(惡)으로서, 살생하고, 훔치고 빼앗고, 이기적이고, 사념(邪念)적이며, 시비를 걸고, 요언을 날조하며, 질투하고, 악독하며, 발광하고, 게으르고, 난륜(亂倫)인 따위로 표현된다.” 보다시피 사는 마성이며 우주의 특성과 어긋났으며 만일 자기의 고집대로 한다면 마치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중생을 훼멸시키려 하는 그런 구세력과 같이 최종의 결과는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때 자신의 육신을 특별히 중하게 보거나 조금 상태가 미달이면 곧 박해당할까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늘 ‘조절하자’는 구실로 집에 박혀 법공부하고 연공만 하면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수련생의 이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게으름에 대해 형상적인 비유를 한 말이 있다. “만일 당신에게 어린아이가 있다면 당신은 때에 맞춰 그에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일 것이다. 또 아이의 일체를 돌보며 당신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요 며칠간 내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절된 다음에 다시 아이에게 젖을 먹이자.’” 왜냐하면 당신이 며칠간 자신을 조절한다면 아이는 아마 굶어 죽을 것인데 그럼 왜 중생구도하는 일에서 ‘조절’해야 함이 필요할 것인가? 중생도 우리가 구도해주기를 긴박하게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에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음은 당신 자신이 반드시 가서 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 중생구도하는 일에서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그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며 ‘사’에 귀결된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에는 이런 표현도 있다. 여러분은 모두 “사부가 무엇을 원하면 우리들은 바로 무엇을 한다”(더 정진하자)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여전히 보기에는 이치가 있으나 실은 가소로운 착오를 범하고 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살생문제’에서 석가모니 제자가 목욕통을 청소하는 실례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에야 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명백해졌는데 그 제자가 이 문제에서 범한 착오는 살생이라는 미소한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는 사심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이 살생하여 업을 조성할까 두려워 사부가 한 말을 집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원래는 매우 간단한데,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한다면 완성할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가장 좋은 효과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또 자신의 집착을 강화시켰는데 역시 이 ‘사’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럼 사부님께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중생구도의 일을 잘하라고 부탁하셨는데 우리는 아직 늘 자신의 생각으로 절충하고 있는데 역시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사실 생활에서나 수련에서나 우리가 오직 조금의 사심만 지니고 일을 하거나 문제를 고려하면 이미 사부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정진요지-불성무루’에서 명확히 밝히셨다. “사실 당신들의 이전의 본성은 자신을 위하고 이기적인 것을 위하는(爲我爲私)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먼저 남을 생각하고 무사무아(無我無私),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성취되도록 하라.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에까지 생각해야 한다! 대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하여 생각해야 한다!”

표현하려는 내용은 사실 매우 많으나 문자로는 그 뜻을 표현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사’의 문제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찾은 것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이며 또 써내려했으나 장애가 매우 많은 부분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부님께, 수련생에게 말하고 싶다. “철저히 ‘사’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미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을 완전히 수립했다. 개인 수련상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조사정법, 중생구도하는 중에서 자신을 바로 잡을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음에 단순히 물질 상에서 사람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 ‘나의 수련을 제고’하려는 이 일념에 집착을 내려놓을 것이다. 신사신법하며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는다면 앞길은 반드시 무한한 광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수의 시로 결론을 맺으려 한다.

어려운 길을 걸으나 멈추지 말라밤비가 그치면 날이 개일 터. 마침내 정념을 얻어 미혹을 깨뜨리니 행할 수 있는 평탄한 하늘 길이 열리네.

문장발표: 2011년 7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7/4/2433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