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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작품] 신적이 나타날 때마다 사부님의 은혜를 찬송

글/ 푸지(福稷-중국대륙)

[밍후이왕] 1995년 5월 20일 나는(25세) 행운스레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만나 대법 수련 속에 들어왔다. 16년간 정진의 발걸음을 중지한 적이 없다. 사부님을 따라 수련하면서 나는 비할 바 없는 영광과 행복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세월 속에서도, 엄혹한 형벌과 고문에 직면해서도, 인간세상의 일체를 잃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길로 걸어오면서 걸음마다 사부님의 일깨움과 가지와 가호를 떠날 수 없었다. 비록 닫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수련하는 나이기는 하나 깊이깊이 사부님의 호탕한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호탕한 사부님의 은혜여!

지면의 제한으로 내가 경험했던 몇 가지 아름다운 장면을 적으려 한다. 이로써 사부님의 위대함과 대법의 초상(超常)함을 실증하려 한다.

그때 나는 홀가분함을 느꼈고 조금의 고통도 없었다

2000년 5월 1일 나는 사악한 중공의 감시를 물리치고 어렵게 두 번째로 천안문광장에 도착했다. 나는 대법의 한 입자이며 사부님과 대법이 모함을 당하고 세인이 독해되어 진상을 알지 못할 때 걸어 나와 대법을 수호함은 대법도의 신성한 천직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좌시한다면 자신의 생명이 메말라 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사부님의 법을 외우면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인산인해의 천안문광장에서 가부좌하고 수인을 했다. 강인한 대법제자의 바른 형상으로 세인 앞에 나타났다. 나는 자신이 높고 특수하다고 느꼈고 커다란 천안문광장은 마치 나 혼자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언제인지 모르나 나는 두 명의 경찰에게 경찰차에 실려 쳰먼(前門)파출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각지 대법 수련생으로 가득 차있었다. 한 무리 한 무리 실려 들어왔고 또 한 무리 한 무리 어디론가 실려 나갔다.

나는 청원할 요구만 제출하고 기타 어떠한 물음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경찰은 비열한 목적으로 밤에 나에게 등으로 수갑을 채우는 혹형을 가했다.(한손은 어깨너머로 한손은 아래로 두 손이 등에 가게 한 후 수갑을 채움) 나는 팔이 부러지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잠시 후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감돌며 끊어질 듯 아프던 팔이 단번에 부드러워졌다. 아픔이 단번에 많이 경감됐다.

경찰은 계속해 심하게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에게 기마자세로 서서 머리는 위로 향하도록 했다. 한 경찰은 나의 발을 밟고 이 자세를 유지하도록 감시했다. 게다가 때때로 한 대씩 때리고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한 경찰은 내 손을 붙잡고 수갑을 잡아당겼다. 잡아당길수록 수갑은 더 옥죄어 들었다. 수갑은 살에 박혔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허우대가 큰 경찰이 들어서더니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다시 원래대로 세워놓았고 또 바짝 마른 경찰이 담배에 불을 붙여 나의 콧구멍 앞에 놓았다. 말로 형용키 어려운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콩알만 한 땀방울이 전신을 적셨다. 담배 연기에 흘러나오는 눈물과 땀방울은 끊임없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할진대 내 마음에는 아무런 원망이 없었으며 처음과 같이 평화롭고 선량했다. 타협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타협이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말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생각했다. 수갑이 조금만 느슨해도 좋을 텐데. 그러나 갈수록 괴로웠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라 생각되는 순간 즉시 마음을 다졌다. 우주의 진리를 위함에 죽음인들 아깝겠는가? 사부님의 법이 나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태어나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홍음』「무존」) 점차 나는 육체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었고 그때 나는 홀가분해졌고 조금의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경찰은 수갑을 풀었다. 나는 마치 지옥에 다녀온 것 같았고 전신이 허탈했다. 두 손은 이미 마비됐고 감각이 없었다. 경찰은 불구가 될 수 있으니 나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라 했다. 이튿날 나는 현지에 강제로 이끌려갔고 4개월 후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10Kg의 족쇄를 차고 있었으나 결가부좌는 자유로웠다

2000년 5월 중순 나는 두 번째로 간수소에 납치당했다. 우리가 실외 단체 연공을 2개월 간 조직해 견지하다 사악한 ‘610’사무실에 파괴당했다. 여러 명의 수련생이 붙잡혔다. 나와 수련생은 교류했다. 어디든지 모두 우리의 대 연공장이다. 대법은 바른 것이며 우리가 법공부하고 연공함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무장경찰이 총을 우리에게 겨눠도, 간수소 경찰이 큰 소리로 우리를 저지해도 우리의 연공을 막을 수 없으며 환경은 우리 스스로 개창해 내는 것이다.

새벽 4시 경, 같은 감방의 6명 수련생은 모두 일어나 가부좌했다. 잠시 후 야근 경찰이 큰 소리로 우리의 연공을 제지했다. 경찰의 위협과 핍박으로 수련생들은 하나하나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밖의 일체는 나를 동요할 수 없었다. “속인은 나를 몰라봐, 나는 심오 속에 앉아있노라.”(『홍음』「각자」)

경찰의 외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전반 간수소가 조용하지 않았다. 모든 속인이 모두 나를 질책했다. 경찰은 죄수를 시켜 내 다리를 내려놓고 강제로 나를 눕히라고 했다. 그러나 몇 명이 큰 힘을 들여도 누구도 나를 눕힐 수 없었다. 겨우 나의 한 쪽 다리를 풀어냈으나 조금만 느슨해져도 손이 필요 없이 다리를 들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가부좌할 수 있었다. 몇 번 반복되어 그녀들은 힘이 빠졌다. 나중에 경찰은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너를 족칠 것이다.” 이렇게 나는 줄곧 날이 밝을 때까지 가부좌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서 얼마 안 돼 두 명의 경찰이 몇 명 남자 죄수와 족쇄를 들고 감방 문을 열었다. 나에게 입구로 나오라고 했다. 한 경찰이 내 뺨을 열 몇 대를 쳤다. 한 대 때릴 때마다 내 뒤통수는 철문에 부딪쳤다. 그러나 크게 아프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뒤통수가 크게 부어있었다.

그들은 욕지거리하면서 두 발에 족쇄를 채웠다. 10Kg는 더 돼 보였다. 네가 더는 가부좌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이는 사형수만 차게 되는 형벌 도구였다. 같은 감방의 죄수들도 너무하다고 했다. 그들은 연공한다 해서 이 정도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내가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 마음은 아주 조용했고 대법에 대한 무너뜨릴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은 족히 이 일체 어려움과 저애를 타파할 수 있게 했다. 나는 다리를 들어 결가부좌했다. 마치 다리는 아무런 무게가 없는 듯 했고 몸은 국수 면발처럼 나른헤졌했다. 전혀 족쇄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간수소 20개 감방에서 이 소식은 폭발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파룬궁이 족쇄를 차고도 가부좌를 하고 있다네.” 뭇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파룬궁 사부님은 너무나 대단하다! 어찌 이렇게 확고한 제자를 가르쳐낼 수 있단 말인가!” 같은 감방 죄인들은 나에 대해 존중으로 바뀌었고 방법을 찾아 내 고통을 경감시키려 했다. 몰래 내 족쇄를 풀어주기도 했다. 수련생들은 단체로 단식했고 형벌을 해제할 것을 강렬히 요구했다. 나중에 간수소 복도를 경과할 때 매 감방의 남자 죄수들은 모두 입구에 모여들어 나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파룬궁, 잘했어!”

그 후 매일 이른 새벽 이 감방에는 기이한 광경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이 줄을 서서 단체 연공했다. 1999년 7월 박해 이전의 실외 연공과 같은 정경이 나타났다. 간수소 경찰과 무장경찰은 이를 보고 모두 웃고 가버렸다.

2층에서 뛰어내렸으나 몸이 제비처럼 가벼웠다

나는 끊임없이 중공 고층 두목에게 편지를 써서 대법이 좋음을 실증했다. 각급 부서에 대량의 진상편지를 보냈다. 사당의 시위 서기는 국가안전부에 명령을 내려 편지를 보낸 자를 찾아내라고 했다. 2000년 9월, 내가 편지를 보낼 때 공안국 2층 ‘정보과’에 납치됐다. 나는 어떠한 단서도 제공하지 않았으며 늦은 밤 그들은 사무실에 나를 가둬놓고 퇴근했다.

나는 자신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여겼고 이곳에서 감금당함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갈 것인가? 정황을 살펴보니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또 망설였다. 사상적으로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렇게 높은데 다리나 팔이 끊어지면 어쩔까?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손전등으로 비춰 발견되면 어쩔까? 온 머리에 만 가지 잡념으로 하늘땅이 들끓었다.

나는 쌍수허스하고 마음속으로 사부님을 불렀다. 노력해 스스로 냉정을 찾으려 했다. 밖에 얼마나 많은 법을 실증할 일들이 있는가! 나는 반드시 나가야 한다! 이상하게 이 일념이 정해지자 모든 잡념이 다 없어지고 일체가 모두 정리됐다.

나는 새벽 2시 반에서 3시 경 문지기가 순찰를 마치고 출입인원이 드물 때 행동을 취하려 결정했다. 나는 우선 몸에 지니고 있던 짐을 아래로 던지고 동정을 살폈다. 이어서 창문을 타고 에어컨 상자 위에 섰다. 곧바로 2, 3개의 전선줄이 있어서 전선줄 위에 섰고 1층 창문 난간을 잡은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했고 곧바로 깊은 구덩이를 피해서 떨어졌다. 조금의 충격도 없었고 정말로 몸이 제비처럼 가벼웠다.

나는 짐을 들고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2명의 수위가 야근실에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내가 대문 가운데를 향해 가는 것을 보고 어렴풋하게 손으로 당직실이 있는 쪽으로 걸으라고 했다. 그때 나는 가운데 철문은 차가 다닐 때만이 열게 되는 것을 몰랐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수위 신변을 지나 걸어 나갔다.

온 신체가 정지됐고 움직일 수 없었다

역대 전통적인 수련방법의 영향으로 대각자로 수련성취하려면 반드시 큰 고생을 겪어야 한다고 여겼다. 나중에 사부님의 신경문이 발표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일념이 곧바로 구세력이 배치한 악독한 검증에 부합됐고 조금만 틈이 있어도 그것들은 나에게 소위 마난을 배치했다. 2001년 3월 나는 박해로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했다. 이곳의 사악한 정도는 간수소보다 더욱 험악했다. 곳곳이 함정이고 곳곳마다 험악했다. 수련인의 정념정행이 아니라면 뛰쳐나오기가 그야말로 어려울 것이다.

5월 14일 나는 ‘엄관대(嚴管隊)’에서 ‘전향대(轉化隊)’로 납치됐다. 감옥 경찰은 사오한 자를 조종해 일체 악독한 수단으로 나를 전향시키려 했다. 나는 줄곧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다. “어떤 환경이든지 막론하고 사악의 요구·명령과 시킴에 다 협조하지 말라.”(『정진요지 2』「대법제자의 정념(正念)은 위력이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날마다 수단을 바꿔 괴롭혔다. 며칠 후 20여명이 나를 둘러싸고 가장 듣기 민망한 말로 나를 욕해댔다. 내가 화를 내지 않자 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사부님의 법을 더듬었다. “참는다(忍)는 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고, 거스르는 것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욱 아니다.”(『정진요지 2』「더는 참을 수 없다(忍無可忍)」) 나는 자신은 금강부동의 대법도이며 힘이 무궁하다고 생각했다. 곧 팔을 휘둘러 그녀들을 모두 뿌리쳤다. 그녀들이 나에게 악행하려 들면 나는 곧 그녀들을 뿌리쳤다. 그러면서 그녀들이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녀들은 나에게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날마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전향’ 두 글자는 수련자에게 치욕이며 모독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천지에 맹세한다. 만일 내가 금생에 사부님을 배반한다면 번개에 맞을 것이다.” 낭랑한 맹세는 드넓은 천지간에 세 번 울려 퍼졌다. 일종 에너지가 나의 전신을 감쌌다. 온 몸이 정지됐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들이 내 손을 끌어당기려도 움직이지 않았고 간질이려고 해도 안됐다. 눈을 괴롭히려 해도 눈동자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3시간 남짓이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생각되어 다리를 들자 갈 수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두려워했고 더는 나를 관계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이곳에서 떠났다.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고 대법 진상에 감사를 표시했다

6월 중순 한 수련생이 나에게 발정념 구결과 자세를 알려주었다. 많은 수련생은 아직 몰랐다. 나는 사부님께서 사악을 제거하는 법보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기뻤다. 이것이 단번에 머릿속에서 통했다. 각종 방법을 이용해 이 소식을 전파해야 했고 수련생의 이해를 도왔다. 사부님은 나의 이 마음을 보시고 많은 수련생과 접촉할 수 있게 일일이 배치하셨다.

발정념은 그때 노동교양소의 박해 형세를 해체하는 것에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한번은 우리를 감시하는 4명의 죄수가 권고를 듣지 않고 수련생을 모욕하고 사부님을 한바탕 욕했다. 나는 발정념으로 바르게 경고했다. “너희들이 아직도 이렇게 한다면 너희들은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죄범 4명의 후두가 부어 고통스러워했다. 독감에 걸린 것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일주일간 링거를 주사해서야 나았다. 그 뒤로 악행을 거둬들였다.

이러한 예는 아주 많다. 사악한 감옥 경찰과 감시에 대해 우리는 고밀도로 집중해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악한 요소를 깨끗이 제거했다. 그것이 현세현보 받도록 했다. 그녀들의 물질 신체는 감당해내지 못했고 정력을 너무 소모해 더는 악행을 저지를 힘이 없어졌다. 좋게 변하여 관계하지 않거나 아니면 달아났다. 나중에 많은 감시자는 우리를 도와 나섰다. 때문에 우리의 법공부, 연공, 발정념은 모두 견지할 수 있었고 신경문도 제때에 얻을 수 있었다.

다른 공간의 사악은 우리 정체의 힘이 너무 큰 것을 보고 또 우리를 분리시켰다. 나는 ‘생산대’로 납치당했다. 내가 노역 노동을 하지 않았으나 매일 밤 감시자를 따라 생산 현장으로 갔다가 일이 끝나서야 돌아왔다. 나는 가는 것에 저항했고 낮에도 가지 않았다. 대장은 7, 8명의 죄인을 시켜 나를 들어서 옮겼다. 나는 한길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라는 좋다)’, ‘파쩡쳰쿤(法正乾坤)’을 외쳤다.

현장에서 나는 큰 소리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천안문 가짜 분신자살사건의 의혹점, 대법 수련생이 당한 잔혹한 박해를 알렸다. 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사람을 시켜 나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나는 자신의 힘이 산을 가를 수 있다고 상상했고 누구도 나를 저지시키지 못했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나를 저지시키지 못했고 일어서서 또 말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정의와 양심으로 파룬따파를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다른 대장은 죄인을 시켜 스피커로 대법을 모함하는 방송 원고를 읽게 했다. 나의 소리를 제압하려 했다. 나는 달려가서 외쳤다. “린나, 읽지 말라! 대법을 모함하면 보응을 당한다.” 그녀는 덜덜 떨었고 몇 마디 읽지 못하고 소리가 없어졌다.

나는 진상을 알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알리기를 마치고 『홍음』을 외웠다. 외우기를 마치고 『보도』, 『제세』를 음창(吟唱)했다. 4백여 명의 생산 현장은 물 뿌린 듯이 조용했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법의 진상에 감개했던 것이다.

용모가 노쇠하지 않는 것도 파룬따파의 위대함과 신기함을 실증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지 8년이 됐다. 나는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각종 일에 다망했다. 나는 전반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해야 하는 법리를 알았기 때문에 전에 박해를 당한 근본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냈다. 때문에 줄곧 평온하게 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에 위험에 닥친 것 같았으나 나 여기에서는 풀어졌다.

대법 수련 16년, 사람 표면 육체는 노화되지 않는 초상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이미 41세 됐으나 27세로 보였다. 지난 해 9월 학교에 딸을 보러 갔는데 딸의 친구들은 나의 뒷모습을 보고 내가 신입생인줄로 알았다.

지난 해 11월 기차로 옥중 수련생을 보러갔다. 옆에 앉은 한 여인이 인사를 건네 왔고 나는 그녀를 ‘이모’라 불렀다. 이야기 중에서 그녀의 딸은 내 딸과 비슷한 나이였다. 나는 잘못 불렀음을 알아챘다. 그녀 나이를 물었더니 나보다 1살 더 많았다. 나는 바삐 그녀에게 사과했다. ‘언니’로 고쳐 불렀다. 4줄로 앉은 사람들은(중국 열차는 보통 마주 앉았고 가운데 길이 있고 좌우로 모두 4줄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들 옆에 앉은 사람과 나이가 비슷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내어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부심있게 말했다. “나는 파룬따파의 수련으로 얼굴이 늙지 않았습니다. 나의 용모가 늙지 않는 것도 파룬따파의 위대함과 신기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파룬따파는 세상 사람이 구도될 유일한 희망입니다.”

문장발표: 2011년 2월 2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 神在人間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23/2364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