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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외우면서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고, 집착심을 제거하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11월 16일】 매일 법을 외우고 조리 있게 시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는 중에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점화하고 계오(启悟)하게 하여, 진정으로 대법의 심오함과 끝없는 내함을 감수하게 하였으며 어떻게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나는 진정으로 “안으로 찾는다”는 것의 신성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들이 연공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은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수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고 씬씽(心性)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고층차의 법은 사부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주었고, 안으로 수련하고 안으로 찾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수련 중에서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법을 금방 얻어서부터 늘 안으로 찾는다고 말했는데, 개인수련 시기에는 자신을 수련하는 중에서 간단하게 표현되었으나, 정법시기에 이르러 더욱 광범위하게 더욱 침투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낡은 세력을 전면 부정하고 낡은 세력의 박해를 제거하는 것과 함께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진정한 연공 인으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안으로 찾고, 자신의 그 마음을 수련하고, 법리에 분명하게 하려면 쉽지 않다. 그것은 정말 재주이다.

10년의 정법수련 중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2000년 하반기에는 진상자료점을 건립하고 대량적으로 자료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모든 신심을 집중하여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했으며, 가지고 있는 소유의 저축액, 소유의 여력, 가족 대법자원을 포함하여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일체 조건과 환경을 충분히 이용했다. 집에서는 또 몇 사람이 수련하고 있으므로 수련하지 않는 속인도 모두 두말없이 매우 주동적으로 대법의 일을 도왔으며 또한 집의 경제적 상황이 좋음으로 인해 모두 합당하게 법을 실증했다. 이것이 수련이라고 여겼고 많이 할수록 지불이 많을수록 수련을 더 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전법륜》) 라고 이야기하셨다. 온 몸에 업력이던 사람으로부터 광염무제한 신(神)으로 수련되자면 얼마나 많은 집착을 버려야하고, 얼마나 많은 업력을 전화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전반 수련과정을 일하는 것으로 대했다. 기점이 틀렸으니 수련이라고 말할 수 없었으며 심성도 제고될 수 없어 수련을 해도 제고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모순에 봉착하면 안으로 찾는다는 것이 사실에 근거하여 일을 논하고 찾았으며 마지막에는 네가 옳다 내가 옳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그 목적은 자신을 회피하고 책임을 미루는 것이며 기점은 자아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안으로 찾는다는 것이 항상 조건에 따라 찾았으며 늘 속인의 관점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정(情)에서 문제를 보았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모순과 시끄러운 일에 봉착하면 내가 법을 실증하는 것에 대한 교란이라고 여기고 발정념을 하여 그것을 제거했으며, 내가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안으로 찾지 않고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잊고 대법의 일을 하는 것과 심성을 제고하는 것을 갈라 놓았으며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은 바로 수련이며 무슨 기타의 것이 없다.” (《각지설법6》)라고 이야기하셨다. 일체의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사부님께서는 “고층차의 법을 반드시 투철히 배워 어떻게 수련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법을 얻고 법공부를 10년 했지만 아직도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를 모르니 사부님의 요구와 10만 8천리나 떨어졌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여겼다. 안으로 찾는다는 것이 대부분 수련생을 가늠하는 자로 되었으며 다른 사람을 안으로 찾으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도리어 속인의 관점, 속인의 생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자신을 개변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만 개변시키려고 했다.

늘 한 가지 구체적인 일에서만 안으로 찾았으며 표면에서만 찾고, 근원을 파내지 않고, 근본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당연히 같은 착오는 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집착은 다른 공간에서 모두 생명이 있는 것으로서 방식을 바꾸어 표현되므로 나는 찾고 또 찾았으나 자신의 근본 집착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 수련을 하고 해도 자신이 제고됨을 느끼지 못했으며 이 몇 년간 나는 기본상 이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을 모르는 이런 과정은 사실 매우 괴로우며 늘 게으르고, 마비되어 있었다. 조리있게 일하여 사부님께서 준 임무를 완성한 것 같았지만 대법제자가 미래의 우주를 위하여 책임지는 그런 사명감을 체험하지 못하며 모호한 개념처럼 자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법에 대한 인식도 한 개 방면으로 이해하고 어떻게 무사무아를 수련하는지 모르며 평소에 늘 무사무아를 수련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매우 표면적이고, 얕은 인식이었다. 사실 바로 어떻게 수련하는가를 모르며 소뿔 끝까지 뚫고 들어간 것처럼 더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다.

매일 법을 견지해 외우고 조리 있게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수련하는가를 모르던 상태에서, 법을 더 많이 외움에 따라 차츰 법에 용해되었으며 진정 대법의 원용을 감수했으며 사부님께서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까지 계통적으로 서술한 고층차의 법리를 감수했으며 진정 안으로 찾는 것의 신성함을 깨달았다.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함에 있어서 모순에 봉착하고 교란할 때, 먼저 자신을 찾고 자신을 보며 마음에서 찾고, 회피하지 않고, 미루어 버리지 말고, 무조건 자신의 그 마음에서 찾아야한다. 말은 쉽지만 진정으로 하려면 하나의 차츰 성숙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두 번째에는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그럼으로 하여 낙담해 하였으며 차츰 한시기 연마를 거쳐 먼저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찾는 과정은 바로 불성과 마성이 겨루는 과정이었으며 어떤 때는 정말 마음을 도려내는 것처럼 뼈가 사무쳤다. 이때 사부님의 법이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 (《전법륜》) 이렇게 마음은 삽시간에 안정되었고 정념은 자신을 가지하였다. 다시 돌아다보니 “유암화명우일촌”이었다.

나는 평상시 자신의 일사일념을 틀어쥐고 안으로 찾았으며 염두가 나타나면 즉시 자신을 찾았고 이 염두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염두가 있게 되었는지 정법이 요구하는 것인지를 보았다. 만약 부정한 염두라면 자신의 그 마음에서 찾았다. 혹시 집안일을 하다가도 자신의 사상을 청리하고 집착을 제거했으며 자신의 사상을 귀정했다. 비록 어떤 때, 진정한 나와 가짜 나를 가리지 못하여 천 백년에 형성된 이치, 관념에 좌우지 되어 자신의 주의식으로 간주하고 그중에 빠졌지만 자신의 일사일념에서 찾았으며 자신의 매개 마음에서 그것의 근본 집착을 찾았으며, 그럴 때 자연히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안으로 찾는 기제가 형성되어 최후에는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서 버렸는데, 법을 외우고 법공부를 하는 중에 사부님께서 나를 도왔으며 대법이 나를 바로잡아 주었다.

나는 사람으로부터 수련에 이르기 까지 완미함을 추구하는 하나의 관념이 있었으며 수련을 10년 해도 그것을 사람의 관념으로 대하지 않고 일종 수련의 상태로 대했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거나 개인의 수련에서도 늘 어떻게 잘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며 다른 사람의 평가, 칭송을 매우 중히 여겼다. 사람을 구하는 것의 긴박함에 따라 법을 실증하는 항목들이 증가되어 항목을 보급하기 위하여 나는 큰 가방 작은 가방에 자료, 기자재를 지니고 각 큰 성시와 향진에 다녔으며 비오는 날에 우산을 쥘 손마저 없어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동수들은 감동되어 눈물이 글썽였고 칭찬하는 소리가 끝이 없었다. 표면상에서 이것은 자신을 고험하는 것이기에 심성을 지키자고 깨우쳤지만 마음속은 매우 상쾌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 자아를 실증하는 이런 마음이 갈수록 커졌으나 자신은 아직 감촉하지 못했으며 그래도 법을 실증한다고 여겼다. 동수들이 질책할 때, 오해할 때, 특별히 억울하다고 느꼈으며 한 시기 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심지어 연공을 할 때에도 머릿속에는 영화처럼 떠올랐다. 법을 외우면서 사부님께서는 나를 점화했고 모순이 나타나면 수련인으로 말하면 심성을 제고할 기회가 왔고, 집착을 버릴 기회가 왔으니 이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모순은 이런 것을 위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나는 응당 이 기회를 잘 잡고 진정으로 자신을 연공인으로 대하고 안으로 찾았다. 즉시 자신의 여러 가지 마음을 찾았는데 완미를 추구하는 것은 자아를 실증하기 위해서이며 목적은 대법 중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마난에 봉착했을 때, 억울하다고 느끼고, 듣기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 역시 명예를 추구한 것이며, 또 동수의 위에 있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자신이 수련한 것이 괜찮다고 여겼으며 일하는 것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고, 자신이 법을 인식한 것을 고수하는 이런 상태, 자아의 마음, 이런 마음은 모두 정으로부터 파생하여 나온 것이며 근원은 위사위아이다.

또 한 번은 동수와 협조하여 배합할 때 수련생이 집착을 놓지 않고 각종 구실을 찾아 벗어나고, 덮어 감추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괴로웠으며 심지어 화가 났다. 그러나 또 마음을 안정하고 동수와 교류할 수 없었으며 드문드문 미지근하게 말을 던져 주었으며 속으로 수련생이 집착하는 것에 집착했다. 사부님의 법을 외우면서 “당신이 생각을 많이 하면 곧 집착심이다.”(《전법륜》)는 것을 읽고 다시 보니 자신은 이미 너무 집착을 했으며 비록 수련생이 집착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집착한 것으로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보았고 매우 자아가 강하고, 수련생을 얕잡아보고, 수련생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런 마음은 사실 질투심이다. 질투하는 마음의 근본은 위사위한 것으로서 속으로 불쾌해하고 또 동수와 교류하려 하지 않는 것은 쟁투심이다. 이런 마음으로 어찌 관용, 자비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이런 마음이 있게 되는가? 자신의 감수를 중시했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냐 안 하냐, 내가 좋아하냐 안 하냐, 내 마음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등등은 모두 정이 있기 때문이다. 정(情) 그 자체는 위사(爲私)한 것이다. 찾았으면 응당 버려야한다. 법을 외우는 중에 사부님의 가지와 계오하에 일종 마음이 확 트이고 밝아지는 것을 느꼈으며 매우 명랑하게 세 계선이 눈앞에 놓이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 세 가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1. 사부님께서 《전법륜》중에서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법리를 더욱 잘 이해하고, 자신의 인식을 고수하지 말자. 이렇게 큰 법을 어찌 나의 어느 한 가지 인식으로 독점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방의 법을 인식하는 상태, 방식 그리고 집착과 집착하는 방식을 관용(宽容)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완전히 상대방을 위해 선의적으로 상대방의 집착을 지적하자.

2. 정체의 각도에서,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를 고려하여 문제를 생각하자. 정체를 위하고 중생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보고 정체로 법을 실증하는데 유리한가? 중생구도에 필요한가? 사부님의 요구에 원용하는가? 이러한 것들을 많이 물어야 한다. 집착을 버리기 위해 버리고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동수지간의 관계를 잘 가져가야 한다. 동수지간의 목적을 가진 평화, 애호는 여전히 매우 협애하고, 인위적인 것으로서 사실 위사위한 것이다.

3, 낡은 세력을 전반 부정하고, 낡은 세력의 박해를 제거하자. 낡은 세력이 이간질하는 나쁜 수단을 간파하고 낡은 세력의 사악한 면을 꿰뚫어 보자. 낡은 세력은 우리들의 수련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여 모순과 시비를 조작하여 동수지간에 간격을 초래하며 마지막에 그가 박해하는 이유로 삼는다. 동수와 이 세 가지 방면으로 반나절이나 교류하여 우리는 인식상에서 진정 하늘이 맑고 몸이 투명함을 느꼈으며 자신이 진정 나를 위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감을 느꼈고 정법제자의 책임을 감수했다. 그 시각 나는 마침 한층의 껍질을 벗어버린 것을 느꼈으며 사부님의 불은호탕(佛恩浩荡)함을 감수했고,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 는 무한한 법리를 감수했다.

많은 경우, 한 가지 일이 나타나면 한두 가지 마음인 것이 아니라 많은 마음이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인지 분명하지 않아 나는 종이에 하나하나 찾아서 기록했으며 표면의 사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찾고 근원을 팠으며 법에서 바로 잡았는데, 그 효과는 매우 좋았다.

안으로 찾는 과정에서 사상업력의 교란은 갈수록 적어졌고 사람의 관념은 갈수록 적어져 문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 수련인의 각도에서, 정체의 각도에서, 정법의 기점에서 고려할 수 있었다. 안으로 찾는 것은 더욱 넓은 범위일 뿐만 아니라 더욱 심도 깊게 자신의 집착을 찾고 또 근원을 팠으며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았다. “특이공능에 근거해 볼 때 어느 곳에 검은 기가 있으면 병기(病氣)라고 인정하며; 중의(中醫)가 보면 바로 그곳에 맥이 통하지 않고, 기혈이 통하지 않으며, 맥이 막혀 있고; 양의(西醫)가 보면 바로 그곳에 궤양·종양이 자라며, 골질증식 또는 염증이 생겼다는 등 일부 현상인데, 그것이 이 공간에 반영되면 바로 이런 형식이다. 당신이 그것을 떼어버린 후 당신은 곧 이쪽의 신체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무슨 요추추간판탈출증, 골질증식도 당신이 그것을 떼어버리고 그 장(場)을 쳐서 내보내면 당신은 즉시 나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이 다시 X선 사진을 찍어보면 아무런 골질증식도 없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것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전법륜》) 사부님의 이 단락 법으로부터 수련에서 근본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부단히 버리고 부단히 바로 잡으면 사람의 염두는 신념(神念)으로 부단히 전화되어 정념을 늘 보존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안으로 찾은 마음의 노정이다. 부당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이 자비로 시정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09년 11월 16일

문장분류:【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11/16/2127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