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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생의 수련 체험

글/대륙 대학생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5월1일】 나는 한 대학생 대법제자이다. 비록 나는 정진하는 제자는 아니며 특히 몇 년 전에는 아주 큰 굽은 길을 걸었지만, 앞으로 꼭 존경하는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사부님께서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 배치한 수련의 길을 잘 걷기로 결심했다. 현재 나는 한 대학생 제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수련의 길을 잘 걷게 되었는가 이야기하겠다.

또다시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림

98년에 우리 네 식구는 전후로 대법을 수련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때 나는 13세가 채 안되었으며 남동생은 거의 11세였다. 어머니는 계속 밖에서 일을 하셨고 집에는 아버지가 한편으로 우리의 생활을 돌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장사를 하며 날씨가 좋은 저녁에는 우리 오누이를 데리고 법공부하는 장소에 가서 법공부하셨다. 그때의 수련시절을 회고해보면 나는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된다. 비록 우리가 법공부하는 장소는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법공부를 견지할 수 있었다. 사부님의 은혜에 잠겨있었던 날들은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쉽게 눈 깜박할 사이에 다 지나갔다.

99년 사악이 미친 듯이 대법을 모욕했을 때 우리는 비록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tv에서는 왜 저렇게 말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사악의 박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수련생이 북경에 들어가서 법을 수호하는 모습에도 매우 무감각해졌다. 법리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한 원인으로 모든 가족은 수련을 포기하였다. 유일하게 행운인 것은 악당이 아버지를 핍박하여 대법서적을 바치라고 하였을 때에 그는 견결히 협조하지 않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풀이 죽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후 다시는 감히 우리를 핍박하여 책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매우 행운인 것 같다. 그 험악한 날에도 여전히 한 가닥의 정념이 있었기에 우리의 수련을 지도하고 우리들을 하늘로 올라가도록 보조해주는 사다리를 보존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그 후 수련의 길로 돌아오는데 기초를 닦아주었다.

99년 가을,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6년간 완전히 속인 중에서 길을 잃었다. 속인의 학업에 바빴으며 속인의 여러 가지 정에 이끌려 기뻐하거나 근심하고 개인의 득과 실을 따져서 대법의 법리와 점점 멀어졌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존의 존재를 감수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모든 가족은 불교로 들어갔다. 현재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다.

어느 때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중학교 3학년이거나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우리에게 법을 얻게 한 수련생이 아주 전면적으로 정리한 한부의 진상자료를 우리의 수중에 갖다 주었다. 이 수련생은 오래 전에 상당히 긴 한 단락 기간에 사악에게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당하였다. 그가 마귀굴에서 나온 후 속인 중에서 길을 잃은 우리 가족에 한번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후에 깨달았는데 사존께선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자세하게 진상자료를 보시더니 다시 수련의 길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와 남동생은 매우 무감각하여 근본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가 강렬히 권고한 끝에 우리들은 차츰차츰 진상을 요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진상이 내 마음의 촉동은 너무나 컸고 그런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속인 중에서 길을 잃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각종 사람 마음, 욕망과 집착은 내가 수련의 길로 회귀하는데 강렬한 저애가 되었다. 대법의 법리는 나의 머리 속에서 너무 모호해졌으며 너무 멀어졌다. 그렇다. 한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머리에 어떻게 이렇게 높고 깊은 대법이 남아있겠는가. 아버지의 권고 하에 고등학교 3학년말에 나는 또다시 《전법륜》을 들었다. 그때 두려운 마음이 매우 중했다.

내 기억에 한번은 몰래 《전법륜》을 침실에 갖고 갔던 그날 저녁, 침실 친구들은 갑자기 대법을 담론하였다, 그전에 우리는 종래로 이 화제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제3자의 신분으로 몇 마디 공정한 말을 하였다. 그때 어쩌다가 한 번씩 대법책을 보곤 하였다. 그러나 구하려는 마음이 강렬하였다. 이로 인해 대학교 수능시험에 좋은 성적을 따내기 바랐다. 결과는 뻔한 것이다. 나의 성적은 이상적이지 못하여 심지어 좀 비정상적으로 보통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것은 2005년 가을이었다.

후에 깨달았는데 이것도 사존의 배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도시가 우리 집과 멀리 않았으며 차를 세 시간 타는 거리 이며 내가 배우는 전공도 매우 쉬어 많은 시간이 남았다. 이것도 앞으로 수련 중에서 법을 실증하는데 아주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대학교 1학년 상반년에 나는 점차적으로 참답게 법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겨울방학에는 99년 “7.20” 이전의 사존의 많은 설법을 보았으며 당시 마음속으로 대법에 회귀하려고 결심하였다. 06년 1월초, “7.20”이후 6년 반이다. 내가 또다시 연공하자 즉시 파룬이 두 팔 사이에서 돌고 있음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존께서 또다시 나를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또다시 자비롭게 구도해주신 사존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동수들이 수고스럽게 나를 세속 중으로부터 나오도록 일깨워주셔서 감사를 드린다.

대학에서 수련하고 법을 실증한 일부 체험

06년 2월 개학 한 후 나는 대법서적, 특히 “7.20”이후 사존의 설법은 거의 한권도 빠짐없이 학교에 갖고 갔다. 그때부터 대량으로 법공부를 했다. 처음 한 단락 시간에는 수업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에 거의 모두 법공부를 했다. 반복적으로 보면서 자신이 속인 중에서 6년간 길을 잃고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음을 알게 되어 후회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다행인 것은 나는 이 만고의 기연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법공부를 통하여 나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었다. 8명이 있는 침실에 나는 연공하고 발정념할 환경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진상을 이야기할 줄 몰라서 오직 제 3자의 신분으로 그들에게 대법이 매우 좋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으며 계통적으로 박해 및 삼퇴하는 진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진상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하며 법은 자신의 지혜를 개발할 수 있다.

사부님의 배치 하에 나는 즉시 현지의 한 50여세 되는 동수와 연락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정체적으로 수련의 정보내원이 있게 되었다. 그 후 차츰차츰 진상을 말하는 중심을 찾게 되었다. 당시 아직 중한 사람마음이 있었기에 매번 기회가 있을 때 단독으로 한사람한테 이야기한다. 그나마 나의 “말재주”가 좋아서 (실제는 법공부한 후에 지혜가 있게 된 것이다.) 매번 한 시간 혹은 더욱 오래 동안 이야기하면 기본상 상대방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최초의 한 단락 시간에 기본상 한사람에게 이야기하면 한 사람이 탈퇴한다. 어떤 땐 외지의 학생에게 진상을 우편으로 보낸다.

동시에 박해하는 지역의 그런 악인에게 일부 선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당시 오직 혼자 침실에 있을 때에야 연공을 했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아주 적었다. 대학교 1학년의 2학기는 이렇게 지냈다. 기본상 법공부를 견지하고 거의 연공하거나 발정념하지 않았다. 침실의 친구는 기본상 진상을 알고 “삼퇴”하였다.

대학 2학년이 되기 전, 여러 가지 원인으로 보도원이 사전에 이야기하였다. 대부분의 침실인원은 변동이 없지만 조건이 제한되어 한 칸 혹은 두 칸의 침실에 4명이 증가하여 12명이 되는 침실이 된다고 했다. 사실 거기에 뽑힐 확률은 매우 적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소곤거렸다. 모두 자기가 침실에서 변동이 생길까봐 두려웠다. 당시 나는 마음속에 일념이 있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나는 주변사람한테 진상을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일부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는 주동적으로 진상을 알려서 구도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두려운 마음과 근심하는 마음이 나를 가로막아 돌파하기 어렵게 했다. 개학한 후 많은 룸메이트 중에 오직 두개 침실이 변동되었는데 그중 우리 침실이 있었다. 같은 침실의 다른 친구들은 모두 불만이 있었다. 오직 나는 매우 기뻤다. 이것은 사존께서 고생스럽게 배치한 것임을 알았다.

그 해에 나는 사존의 배치 하에 매주에 한 번씩 연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 내가 상냥하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열정적이고 성실하여 학우들에게 보편적으로 비교적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나는 익숙하지 않은 학우에게 진상하지 못하였다. 단지 대법제자의 풍모만 그들 앞에 펼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학급의 한 남학생은 점점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것은 사악의 요소가 교란한 것이다. 처음에 나는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와 익숙하게 알게 된 다음 진상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후에 나는 이런 핑계로 계속 그와 아주 좋은 사이를 유지하였으며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나도 그에 대해 마음이 움직였다. 단지 줄곧 이 문제를 회피할 뿐이었다. 그 단락시간에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분명히 이렇게 엄숙한 시각에 절대 정속에 빠지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 각종 사람마음의 집착은 나로 하여금 놓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한쪽으로는 신을 붙잡고 놓지 않았으며 한쪽으로는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사존께선 정진하지 않으면 후퇴[不精進则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바로 이때 어느 날 저녁 나는 꿈을 꾸었다. 많은 대법제자는 모두 하늘에서 날아 올라갔으며 그 장면은 매우 장관이었다. 나도 하늘에 날아올라 그들 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땅에서 한 사람의 높이만큼 올라가는 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의 다리를 당겼다. 머리를 돌려보니 바로 그 남학생이었다. 나는 반쯤 뜬 다음 높은 하늘에 있는 동수들을 보면서 또 땅에 있는 그를 보았다. 마지막에 내려오기로 결정하여 그의 신변에 남았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매우 괴로웠다. 사존은 내가 이미 층차가 떨어져서 속인의 정에 빠졌다고 점화해주셨다. 그 단락시간에 나는 매일 대량의 법공부를 하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정마의 교란을 제거하였다. 이 기간에 나는 매우 괴로웠다. 각종 속인의 욕망과 집착에 매우 엄중하게 흔들렸다.

나의 이 나이에 만약 속인이라면 완전히 이 문제를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대법제자이다.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나는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대해야 한다. 법공부를 통하여 나는 장기적으로 줄곧 진상을 이야기한다는 구실로 정의 집착을 덮어 감추었으며 이 집착은 이미 나의 수련을 엄중하게 교란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그와 매우 자주 연락하고 주동적으로 정욕으로 가득 찬 속인의 일사일념을 감수하였다. 나는 이 일체는 우연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목적은 나로 하여금 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여 대법제자의 대열에서 이탈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정속에서 나오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차츰차츰 정에 대한 집착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접촉하고 연락하는 것도 점점 피동적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러 회피하였다. 이 과정은 정말로 매우 간고하였다. 정말 사람마음과 집착을 포기하는 과정이었다. 비록 몇 번이나 정에 이끌려 몰래 눈물을 흘렸으며 수련의 곤란을 느꼈다. 하지만 시종 견지하여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되는 것은 법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1년이 지나서 이 정에 대한 관을 넘었다. 단지 안타까운 것이라면 속도가 매우 늦었던 것이다.

이 기간에 나는 자연적으로 그에게 진상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마음이 아주 중하였기에 투철하게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그는 “삼퇴”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이 일체를 그는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아주 정상적인 친구로 되었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해 더욱 깊이 진상을 이야기할 것이며 더욱 전면적으로 할 것이다. 구도 받아야 할 한 생명에 대해 완전히 한 대법제자의 자비심으로 대할 것이다.

남녀의 정에서 걸어 나온 후, 나는 전심전력으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홍류 속으로 돌아왔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아주 좋은 수련환경이 있었다. 진상을 알고 있는 친구 3명과 함께 한 침실에 있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나는 아침6시와 밤12시의 발정념에 참가할 수 있었다.(낮과 밤 6시의 정념은 수업 등 원인으로 아직 하기 어렵다.) 처음에 아직 명혜망에서 대륙대법제자에게 아침 3시50분의 단체연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몰랐다. 나는 어떤 때에는 아침 4시 반에 이어나 앞의 4가지 공법을 연마하면 이어서 여섯시에 발정념한다. 그러나 정공은 줄곧 해결하지 못했다. 매일 밤 모두들 늦게 잠들기에 적합한 시간과 조용한 환경에서 정공을 연마하기 어렵다. 나도 줄곧 각종 핑계로 자신이 정공을 연마하지 못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은 자신이 근본적으로 고생을 겪으려 하지 않고 정진하려 하지 않으며 가부좌하면 다리가 아플까봐 두려워하고 장기적으로 속인의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에 이끌렸다. 명혜망에서 아침 3시50분에 단체연공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4시 반에 일어나서 연공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극한이라고 생각하며 명혜망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법공부를 통하여 동수들이 정체적으로 협조하는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사존의 요구를 홀시하고 자신이 잘난 체하는 엄중함을 알게 되어 자신의 각종 안일함을 구하는 마음의 교란을 극복하도록 애썼으며 점차적으로 매일 아침 3시50분의 연공을 견지하였다, 이렇게 정공을 연마할 시간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주 모닝콜이 울려도 일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깨어나 보면 이미 시간을 놓쳤다. 그때 매우 괴로웠으며 쇠가 강철로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떤 때엔 게을러서 일어나기 싫어서 모닝콜을 끄곤 한다. 그러나 어쩌다가 한 번씩 시간이 되면 나는 갑자기 깨어나곤 한다. 이것은 사존께서 나를 깨웠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나는 매우 격동되며 또 매우 부끄럽다.

비록 현지의 한 동수와 연락할 수 있지만 아주 드물게 진상자료를 받는다. 처음에 나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존께서 매개 대법제자에게 배치하신 수련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료내원이 없으면 압력을 받으면서 자료를 배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이런 상태는 근본 상 옳은 것이 아니다. 사존께선 말씀하셨다. “한 대법제자가 걷고 있는 길은 바로 한 부의 휘황한 역사로서, 이 한 부의 역사는 반드시 자신이 증오(證悟)하여 개창(開創)한 것이다.”(《길》)내가 객관적인 환경의 제한을 받는 이유로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면 되겠는가. 게다가 장기적으로 나의 주변에 그 어떤 진상자료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아직도 그토록 많고 많은 당원, 단원, 소선대원이 진상을 모르고 있는데 누가 구도할 것인가?! 점차적으로 나는 스스로 진상자료를 제작하였다. 제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내가 쓴 박해를 폭로한 선을 권고하는 편지를 대량으로 복사하였다. 그리고 수련생이 배포해준 진상소책자 중에 한편의 권고하는 편지 및 ‘삼퇴’방법을 넣어서 주었다. 나는 먼저 이런 내용을 컴퓨터에서 타자하고 usb에 넣어서 복사하는 곳에 가서 프린트하여 대량으로 복사한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하에 줄곧 평탄하게 이 일을 했다. 나는 이런 진상자료를 하나하나 모두 봉투에 넣어서 기회가 있으면 밖에 나가 배포했다.

끊임없이 수련하며 사존의 점화 하에 편지의 내용도 점차적으로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몇 권만 있는 진상소책자 중에서 또 “일화일석일결(一花一石一诀)”의 상세한 소개 및 대법의 홍전정황을 소개하였다. 이런 내용을 대량으로 복사하여 매개 편지봉투 안에 충실하게 채웠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봉투에 아무것도 안 쓰면 너무 밋밋하여 좀 아까웠다. 나는 사존께서 제자에게 게시해주시기 바랐다. 이때 머리 속에 “기연을 소중히 여기자(惜缘)”는 두 글자가 나타났다. 그 후에 나는 편지마다 “기연을 소중히 여기자(惜缘)”이란 글자를 직접 쓴 진상편지를 보냈다.

전 한 단락 시간에 쓴 동수의 교류문장을 읽고 어떤 수련생은 고생도 마다하고 다른 지역과 진상자료의 내원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록 일부 기초적인 진상자료가 있긴 하지만 cd와 진상소책자와 주간신문 등이 없어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한다면 법을 잘 실증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일념이 생겼다. 수련생은 두 개 지역 심지어 더욱 많은 지역에도 뛰어다니면서 지역 간의 지료내원문제를 해결하는데, 사부님이 계시니 나도 꼭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에 자료내원이 없지만 나는 자주 집에 돌아가서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요즘의 대부분 자료는 모두 고향에서 갖고 온 것이다. 내용도 매우 풍부해졌다.

고향에서 나는 또 몇 명의 동수와 연락이 되었다. 그녀들과 토론하고 교류한 끝에 나 자신의 많은 부족점을 보았다. 수련하면서 집착을 제거하는데 대해 더욱 깊은 이해가 있게 되었다. 그녀들의 협조 하에 나는 또 현지의 다른 한 동수와 연락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더는 집에 돌아가서 자료를 가져오지 않아도 되었다.

이 일체는 모두 사존의 오묘한 배치셨다. 사실 일찍부터 나는 자료를 배포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부터 마음속에는 자주 사존께 또 한 명의 현지 동수와 연락되도록 청하였다. 자료 내원문제를 해결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존께선 급히 나에게 배치해주지 않으셨으며 나에게 한 갈래 자신이 법을 실증하는 길을 열도록 이끌어주셨다. 나는 사존의 이 일체 배치는 법에서 여러 해 뒤떨어져 아주 늦게야 수련에 회귀한 제자로 하여금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중에서 자신의 한 갈래 길을 걸어서 위덕을 수립하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나에 대한 사존의 요구는 점차적으로 높아지고 나도 점차적으로 본래부터 자신에게 속하는 자신의 수련과 법을 실증하는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수련하는 과정에서 각 동수들처럼 사은호탕(师恩浩荡)한 불법의 위엄을 심각하게 느꼈다. 오직 앞으로 수련의 길을 잘 걸어야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족한 점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문장작성:2008년04월25일
원고발표:2008년05월01일
문장갱신:2008년05월01일 00:44:17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5/1/17753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