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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자업자득

【명혜망 2005년 11월29일】 사부님께서는, ‘때문에 이런 경험이 있는 동시에 또한 인생의 관념이 형성되었고 경험은 또 실천 중에서 관념으로 하여금 완고(頑固)하게 변하도록 하였다.’ (《최후일 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중) 라고 말씀하셨다.

경험, 자부, 현시, 관념, 시기, 집착 – 자아 반성을 하면서 나는 이 몇 개 단어를 연이어 써냈고 더 써내려 간다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어 나는 또 자업자득이란 말이 생각난다.

내가 수련의 길에 들어서는 날 부터 나에게서 제일 큰 집착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이 명예심이 뿌리를 깊이 내렸고 심지어 가지를 치고 무성하게 자랐으며 또한 경험이 직접적으로 조건을 촉발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경험’이란 것을 심사해 보면 마치 나무 뿌리와 같이 자신을 중시하고 그가 멋대로 하게 방임하여 많은 가지를 치게 만들었다. 경험이 없을 때는 걱정하고 초조해하고 낙심하게 되고, 경험이 조금만 있으면 환희심이 생기게 된다. 경험이 많아지면 자부감을 갖게 되고, 경험을 운용할 때면 현시심이 나타나게 되며, 경험을 비교할 때면 시기심과 쟁투심을 조금 갖게 된다.

경험으로부터 이런 마음이 생기는 동시에 또 경험으로 이런 마음을 보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경험을 끊임없이 누적하다보면 집착심이 끊임없이 늘게 된다.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을 강조하고 자신을 긍정할 때면 자신이 경험이 있다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된다. 그때면 무엇이 포기하는 것인지, 무엇이 묵묵히 보충하고 원용하는 것인지 잊게 된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그것은 사람의 온갖 방법이지 신의 관념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경험이란 미혹성이 강해 형성되기만 하면 사람의 사유를 고정시킨다. 마치 사람의 이 육안이 본래 변화무쌍한 물질세계를 한 상태로 고정시키는 것과 같이 경험으로 문제를 보면 육안으로 이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영원히 가상이다. 진상을 보려면 경험을 고수하거나 경험의 제약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점을 인식하게 되면 집착이 조금이나마 적어 질 것이고 평화와 관용이 좀 더 많아 질 것이다.

실상 우리는 매일 경험과 교제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바로 인생중의 여러 관념인데 작은 일이라도 우리의 경험이 그 속에 침투되어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자기의 생각대로 보게 된다. 이렇다면 평소에 어떤 일에 부딪히거나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나의 일념은 정념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경험(관념)에서 온 것인지 정말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념이 있고 또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좀 있다면 제일 이상적이지만 (정념만 있으면 경험이 아니고 바로 지혜이다.) 그렇지 않고 경험만 있고 정념이 없다면 마치 자업자득처럼 영원히 사람이란 이 껍질을 돌파하지 못한다. 또한 경험이 많을수록 자아를 보호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 질 것이고 이 층의 껍질이 더욱 두터워져 우주의 특성과 더 멀어지게 된다.

나는 그런 자비심을 수련해 내지 못해 줄곧 고뇌하였었다. 실상 원인은 아주 간단한 것으로 그 명예심을 버리지 못하면 ‘자비심이 전혀 나올 수 없다.(根本就生不出慈悲心)’ (《전법륜》 중) 나는 줄곧 그 명예심만 버리려고 애썼는데 그것은 명예심 문제만이 아니고 아주 많고 많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의식한 것들과 아직 의식해 내지 못한 것들은 마치 얼기설기 얽힌 그물처럼 자신을 그 속에 속박시켜 놓았는데 나 자신은 단지 그 매듭 하나, 혹은 매듭 몇 개 밖에 보아내지 못했다. 이 그물을 벗어나려면 마음의 모든 매듭을 다 풀어야 한다. 이런 매듭을 풀려면 오직 안으로 찾아야 하며 관념을 내려 놓아야 한다.

문장완성 : 2005년 11월 28일
문장발표 : 2005년 11월 29일
문장수정 : 2005년 11월 29일 13:34:12
문장분류 : [제자절차]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11/29/1154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