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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실과 도피

글 / 창춘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1월 8일] 한동안, 나 스스로 일종의 거리감이 있었는데, 법에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면사에 가려진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가로 막은 것인가? 대법속에서 수련하면서, 나는 마땅히 청성해야 하며, 이지적이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나 왜 이런 면사에 가려진 감각을 느끼는가? 나는 나 자신에 잘 물어봐야 하고, 자신은 마땅히 “적게 쉬고 자아 성찰해 정념을 더하고, 부족함 똑똑히 알고 다시 정진하거라.”《홍음(2)》 말씀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1, 대법은 출발점이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구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한 수련인으로서, 대법이 요구하는 시점으로 일체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할 때 우선 자신은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후에야 자신의 행위가 대법에 부합되는지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단 사후에 생각한다면, 어떤 때에는 집착심을 버리지 못하여 법속에서 자신을 위하여 이유를 찾기 때문에, 단장취의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때 내가 게으름 때문에 연공을 하기 싫어 연공하러 가지 않았을 때, 잘못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할 때면, 곧 자신에게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 연공하는 것은 본체를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본체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누구나 본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일념이, 나를 연공하는 이 문제에서 시종 철저하게 돌파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악한 생명은 전문적으로 당신이 집착하는 사상을 찾아 그것을 감화하고, 그것에 의해 통제되는 목적에 도달한다. 마에 이용당한 후에 표현되어 나온 잘못된 깨달음(邪悟)을 아직도 이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자신이 단장취의하여 법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2001년 《워싱턴DC법회에서의 설법》)고 하셨다. 나를 사오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서 나 자신의 집착심 때문에, 마에게 빈틈을 타게 되고, 심지어 한 동안 공제당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자꾸 한 가지 일을 반복적으로 맞는지 틀렸는지를 가늠한다면, 꼭 덮으감추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대법의 요구각도에서 출발한다면, 자연적으로 어떻게 잘 할 수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반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2, 표면에 집착하는가, 내심을 승화시키는 것인가

우리들이 대법 속에서 자신을 위하여 이유 또는 구실을 찾을 때, 꼭 자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고, 자신의 표면적인 행위가 맞다는 것에 불과하다. 신이 한 사람을 볼 때, 이 사건에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서 심성을 본다. “표면적인 개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당신이 제도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자신의 마음의 개변과 승화에 달린 것이고, 그곳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제고될 수 없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대법은 이용당 할 수 없다》 어떤 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표면적인 표현은 마치 아주 평화롭지만, 내심으로는 매우 집착하고, 무수한 염두들이 나온다. 또 어떤 때에는, 분명 고험인 줄을 알면서도, 사람에게 도리를 따지려고 하고,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자신에게 말한다. 사실 나는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말할 뿐이다. 이왕 집착하지 않는다면, 또 무엇을 말하는가, 말을 했다는 것은 내려놓지 못했단 말이 아닌가?

3, 집착을 똑똑히 인식하고, 극단으로 가지 말자

지난 한 동안 박해로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곧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일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주동적으로 일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인과 일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졌고, 그들은 수련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은 더욱 많은 시간이 있어서 수련을 잘하여, 더욱 좋은 상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점점 속인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싫어졌다. 후에 동수들의 깨우침 하에, 착실하게 안으로 찾았고 나자신의 많은 집착을 발견하였다. 시간에 집착하고 고생을 두려워 했으며, 일을 하는데 집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등등이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게 된 후 나는 주동적으로 일을 찾게 되었고, 일체는 순리로웠는데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사람은 세속 중에 있지만 생각은 그밖에 있는 사람으로서”《2005년 맨하튼국제법회에서의 설법》 우리들은 세간의 일체를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의 일체를 잃는다는 것은 아니며, 아울러 우리는 바로 이런 수련 방식이다. 그중 또 그의 중대한 사명이 있다.
“당신들이 오늘날 한 것들은 바로 미래에게 개창하여 준 것이며 이 한 갈래의 길은 바로 이렇게 걸어간다. 이는 가장 바른 한 갈래의 길이며, 미래의 수련인은 참조할 것인바, 그러므로 당신들에게서 어떠한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출현해서는 안 되며, 또한 어떠한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되는데, 그것 또한 인위적으로 자신이 자신에게 장애를 만들어 줄 것이며 번거로움을 만들어주게 된다.”《2004년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사실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데, 일체 문제의 나타남은, 사람의 마음이 반영해 낸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을 버리면 바로 수련이다. 당신이 당신의 사람의 마음을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당신의 지혜로운 눈을 가리는 것이고 당신을 안개속에서 꽃을 보고, 물속에서 달을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이 글은 이미 오래전에 써 놨는데 오늘 동수들의 글을 읽고, 나자신의 오랫동안 깊이 숨겨진, 또한 수시로 아울러 제때에 수련해 버리지 못한 하나의 마음 — 도피심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많은 것은 이렇게 하고 싶지 않고, 저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고 모순이 있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도망가고 버려야 할 마음을 포장하여 밀봉시키고, 보기에는 없는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완고해졌고, 점점 완고해 지면서 취약해 지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보호하려고 하는데–바로 덮어 감추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린 것은 단지 표면의 사람의 마음이고, 그런 사람의 마음과 관념의 뿌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일부 문제에서 잎 하나로 눈을 막아 태산이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많은 때에 나는 도피를 선택했고, 어떤 때에는 구실을 찾기 위하여, 듣기 좋게 말한다면 회피한 것이다. 더욱 교활한 것도 있는데, 변의되게 중한 것은 피하고 경한 것을 고르는데 이런 심리는, 편하게 지내고 싶은데 불과하고, 곧 바로 잠시적인 안일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매우 깊이 뿌리 박혀있는 사심이었다.

사실 자신은 무엇을 도피하려고 하는가? 자신이 한 서약을 도피하려고 하고, 중생의 주목과 바램을 도피하고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 일체는 우리들이 꼭 직면해야 할 것이며, 도피하는 것은 포기를 선택한 것과 같다.

일찍 신의 관환도 모두 감히 포기하고 삼계로 내려왔고, 오늘 대법이 세간에 있는데, 우리는 또 어떤 사람의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겠는가?

이상은 단지 개인의 체험이니, 타당치 못한 부분이 있으면,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2005년 11월 7일
문장발표: 2005년 11월 8일
문장갱신: 2005년 11월 7일 17 : 21 : 44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1/8/11400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