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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 출산(出山)하시기 전후, 공을 전하고 설법하시던 과정의 일부 경력을 회억하며(1)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2005년1월25일】편집자 주역:본 문장의 작가는 아주 일찍부터 사부님을 따라 공을 배웠으나 장기간 법학습을 중시하지 않아, 박해가 전면적으로 벌어진 후 이 몇 년 사이에 크게 빗나간 길을 걸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는 놀라 깨닫기 시작하여 이 한 단락의 회상을 적어내게 되었다.
우리가 이 문장을 발표하는 목적은, 더 많은 수련생과 세인들이 사부님의 언행으로부터 가르침을 얻게 하며, 사부님을 존경하고, 대법이 세간에 널리 전해지는 이 다시 없을 기연을 소중히 알게 하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를 저버리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잘 놓아야 함을 더욱 새기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본 문장의 작가에게 우리는, 이 수련생이 교훈을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시간을 다그쳐 법학습하여 법을 잘 배워 최대한 빨리 엄정성명을 발표하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모든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이 잘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착실하게 하는 가운데서 과거의 착오를 보완하고 이후의 길을 잘 걷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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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이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기공과 수련에 아주 흥미를 가졌다. 1990년의 어느 날, 군사박물관을 나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의식 중에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공원 문 앞에서 누가 연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주 특별한 힘이 나를 이끄는 것을 느꼈고 느낌이 아주 강하였다. 나는 조심조심 다가갔다. 나이가 어려 쑥스러웠기에 나는 그들이 나를 볼까봐 조용히 듣기만 하였다.

밤에 사부님은 그들에게 공을 강의하셨다. 나는 듣자 마자 그 내용이 비록 옅고 간단하지만 급소를 찌르고 근본을 짚은 것으로, 나 자신이 예전에는 듣지도 못했던 것이라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조심스럽게 사부님께 말하자 사부님께선 나를 보시더니 북경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아 가르칠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미루었다. 나는 단념하지 않고 군사박물관 접수실 옆의 숲에서 그들이 유장을 걷는 것(走游樁; 편집자주 : 연공 동작의 걸음걸이)을 가서 보았다. 사오 일 간을 보고 나서 사부님께서 아직 떠나시지 않은 것을 보고 연마하겠다고 나는 또 다시 요청을 드렸다. 사부님은 따님과 단독으로 말씀을 나누신 후, 나에게 연공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그때 나는 얼떨결에 수련이라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선, 나를 따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는 점치기, 풍수와 병치료 같은 것은 가르치지 않겠다. 이런 것은 사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진정으로 고층차에로 사람을 이끌려고 하므로 이런 것을 난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당신에게 있게 해서도 안 된다.
둘째는 ‘우리 서로간에 모두 보기로 하자. 내가 당신을 지켜보기로 하고 당신도 나를 가늠해 보라’였으며, (사부님께선 아주 정중하게 말씀하셨다)
셋째로, 당신에게 가르쳐 주는 이런 것은 가족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며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동의하였고 그때로부터 사부님을 따라 공을 배웠다.

1. CCTV의 거짓말을 폭로한다 — 리징차오(李晶超)는 공을 늦게 배웠기에 사부님을 도와 공법을 창립하고 편집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991년, 사부님은 사부님의 모친과 함께 태국에 친척을 방문하고 오셨다. 귀국하신 후 베이징을 거쳐 창춘으로 가셨다. 리징차오(李晶超)는 그의 형 리징펑(李晶峰)의 소개로 사부님을 따라 공을 배우게 되었다. 그 때 나와 기타 몇 명의 수련생은 사부님을 따라 공을 배운 지 1년이 넘었다. 1999년 7월 23일부터 방영한, 사부님을 고의로 나쁘게 묘사하고 악독하게 공격한 다큐멘타리 ‘이홍지 기인기사(其人其事)’ 중에서 리징차오(李晶超)는 그가 사부님과 함께 파룬궁을 창립 편찬했다고 말했다. 이는 리징차오(李晶超)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그 자신의 양지(良知)를 팔아먹는 짓이다.

1992년 사부님께서 출산하시기 전후, 리징차오(李晶超)는 천목으로 사람들의 병을 보고 돈을 받았다가 사부님의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그에게는 집착심이 나왔기에 자신이 천목으로 본 것에만 집착하고 기공으로 병을 보고 돈을 받으면서 사부님의 비평도 아랑곳 하지 않았고 갈수록 멀어져 가다가 마침내 대법과 대립하는 면으로 나아갔는데, 이것은 아주 심각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베이징에서 류씨 성을 가진 자가 9살 때부터 사부님을 따라 다녔고, 천목으로 본다면서 대법제자 중에서 떠들며 다니고 있다. 이것을 과시하면서 수련이 깊지 않은 수련생을 미혹시키는가 하면, 심지어는 수련생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사부님께선 1990년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공을 가르쳐주지 않으셨고 사부님의 가족분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1990년 이후, 나는 줄곧 사부님께서 출국하여 해외에서 공을 전하실 때까지 사부님을 따라 다녔으나 이 사람은 본래부터 없었다.

2. 사부님께서는 매 한 걸음마다 바르게 걸으셨고, 설법하여 사람을 제도하셨지, 공능을 표연(表演)하지 않으셨다

1992년, 사부님께서 공개적으로 공을 전하실 때는 중국에서 기공의 붐이 한창 일어나는 때여서 사회상에는 여러 가지 문파의 기공이 전해져 나왔고, 그 중에는 일부 난잡한 부체공도 섞여 있었다. 그때 사람들의 기공에 대한 인식은 바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공능을 좀 나타낼 수 있는가와, 두 번째는 병치료를 할 수 있는가였다. 기공 연구회의 공법 감정평가 역시 이 두 가지 표준이었다.

이 한 점에서 사부님께서는 출산하신 이래, 사람을 제도하지 공능의 표연을 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주 단호하셨다. 대법은 그의 엄숙성과 위엄성이 있는 것으로,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여러 가지 기공 및 난잡한 부체공과는 한데 어울릴 수 없으며, 공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사람을 제도함에 있어서 오로지 바른 것을 구해야만 비로소 당신들의 집착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집착을 더 없애자(再去執著) 《精進要旨)

사부님께선 또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전수함에 어떤 표연(表演)도 하지 않는 뜻은 바로 내가 나온 목적을 똑똑히 교대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한편으로 표연(表演)하면서 한편으로 법을 전수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법(邪法)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와서 배우는 것은 법이 아니라 당신의 기술을 배우러 오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도 당년에 역시 이렇게 하지 않았다. 병을 치료함은 괜찮은데 어쨌든 당신이 보아내지 못하며 그는 나았다고 느낀다. 어떻게 치료하였는지를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다. 환자가 나았는데 믿고 안 믿고 아프고 아프지 아니함은 제 3자가 모른다. 이 속에는 또 오성(悟性)이 존재하는데 병을 치료함은 괜찮다. 당년에 예수,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이렇게 하였다. 노자만은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인간이 너무나도 험악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법륜(권二)] ‘사람을 제도함에 설법을 하지 표연을 하지 않는다 (度人讲法不做表演))

그리하여 사부님께선 사람들에게 신체를 조절하고 기공 상담을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파룬궁을 인식하게 하셨다. 1992년 6월, 최초로 베이징 간자커우(甘家口) 상가의 건축국 5층 강당에서 오전, 오후 하루 종일 10일 동안 연이어 기공 상담을 하셨는데 효과는 대단히 좋았다. 종양 또는 자궁암과 같은 이런 것은 보고 난 후 엑스레이를 찍어 보면 없어졌고 유선증식도 치료 후 없어졌으며 만지면 아주 흐물흐물해졌다. 골다공증과 요추 혹은 경부 척추 돌출증은 치료한 즉시 나았고 엑스레이를 찍어보아도 없었다. 심장병으로 아주 괴로웠던 경우도 치료를 받은 그 자리에서 통증이 사라졌고, 엑스레이를 찍어도 보이지 않았다.

탕씨 아저씨는(당시 베이징 보도참 참장)사부님으로부터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베이징 제3병원에서 촬영한 엑스레이 상에도 이미 질환이 사라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파룬궁이 이토록 신기한 것을 목격하고는 모두 배우려고 하였기에 비로소 북경 제1기 학습반을 열게 되었다. 그때의 노수련생들이 회억하기에 학습반에는 약 200 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1999년 7. 20 이후 탕씨 아저씨는 압력을 못 견디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비판의 태도표시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와 그 자신은 대법이 그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3. 처음으로 사부가 제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많은 공법을 연습하였는데, 모두 제자가 사부를 공양하였지 사부가 제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1991년, 사부가 태국에서 귀국하신 후,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베이징 제타이스(戒台寺)에 함께 갔다가 점심때 길 옆의 작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가 앞다투어 계산하려고 하자 사부님께선 누구도 움직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는 사부님이 직접 계산하셨다. 이 일은 우리들에게 아주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예전의 규칙상 모두 제자가 사부를 공양하는 것이었기에 처음으로 사부가 제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해의 정경은 눈앞에 생생하다.

4. 사부님을 따라 다닌 그 몇 년간은 라면만 먹어 라면을 보기만 해도 정말로 지겨웠다.

그때는 사부님을 따라 각지에서 학습반을 열었다. 연속 몇 년간 기차에서 사부님은 라면만 드셨다. 사부님은 학습반을 여는 곳에서 밤에 설법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저녁식사를 종래로 하시지 않았다. 설법이 끝난 후 초대소(역자 주 : 한국의 여관과 비슷하나 대부분 식당이 있음)에 도착하면 밤 8, 9시이기에 식당에는 밥이 없었다. 사부님은 밖에 나가 식사하시지 않고 인스턴트 라면만 물에 불려 드셨다. 우리도 사부님을 따라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그 몇 년간은 정말로 먹기가 지겨워 냄새만 맡아도 불편했다. 때로는 큰 봉투에 든, 낱개로 포장하지 않은 라면을 샀는데 며칠씩이나 먹었다.

사부님의 식사량은 많지 않았고, 음식은 아주 빨리 드셨고 남은 것은 포장하여 가져 가셨으며 아주 검소하셨다. 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사부님은 수련생과 함께 계실 때면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약간 빨리 드시고는 먼저 계산하셨다.

5. 무더운 날에도 사부님은 버스를 타셨다.

1992년 7월, 사부님께서 베이징에 방금 오셨을 때였다. 나는 사부님을 뒤따라서 일처리를 하러 가게 되었다. 당시에 날씨는 아주 무더웠기에 나는 안일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택시를 타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부님은 버스 안으로 비집고 오르셨기에 나는 택시를 타려는 생각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버스 안은 사람이 많아 땀이 철철 흘렀으나 사부님의 이런 검소함은 나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사람은 사부님이 아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며 요언을 날조하였는데 나는 그것들의 그런 요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은사(恩師)를 모독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가? 사부님께서 출산하시기 2년 전부터 사부님을 따라 몇 년을 다녔어도 나는 지금까지도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실감한다. 사부님께서 그 해에 대법을 홍전(洪傳)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겪으신 고생과 감당하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금할 수 없다.

문장 완성 : 2005년 1월 24일
문장 발고 : 2005년 1월 25일
문장 수정 : 2005년 1월 25일 02:58:41
문장 분류 : 제자절차
원문 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25/9417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