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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하여 말해본다

글/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11월 23일] 최근에 우리 지역에서 개별적인 동수들이 법을 떠나 이른바 ‘깨달음’을 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심지어 사용하는 명사와 개념도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리와 어긋났다.

나는 대법의 기점에 서지 않고 법을 떠나서 이른바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발전해 나아간다면 선종(禪宗)의 ‘공리(空理)’, ‘공오(空悟)’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 ‘사오(邪悟)’를 향해 나아가 철저히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낡은 우주가 무엇 때문에 쇠패하고 해체로 나아가게 되었는가? 우주는 무엇 때문에 정법을 하는가? 바로 우주 중생들이 기나긴 세월 속에서 모두 각종 변이가 나타나 정념정오(正念正悟)하지 못하였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모두 우주 제일 바른 시기의 그 층차의 법을 표준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변이가 발생했으며 법에서 어긋났다. 심지어 부동한 층차의 주, 왕들은 모두 자신이 우주 중에서 제일 높다고 여겼으며 행하는 것과 깨달은 것도 제일 바르다고 여겼다. “누가 하늘의 주인인가, 층층이 법을 떠난 자로다. 스스로 천궁의 주인이라 하건만……” (《무미(舞迷)》) 따라서 변이된 낡은 이치, 낡은 관념에 집착하며 자신의 바르지 않은 ‘깨달음’으로 정법을 교란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자신과 중생의 미래, 정법에 어떤 엄중한 결과를 조성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비로 우주 중 ‘낡은 세력’의 표현이다.

수련은 엄숙하다. 만약 수련인이 법에서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신념이 바르지 않아 법에서 어긋난다면 다른 공간의 흑수, 썩은 귀신들은 틈을 타 들어와 수련인이 집착하는 누락이 있는 마음을 붙잡고 박해를 가했다. 심지어 가상을 만들어 수련자들이 ‘사오(邪悟)’로 향하여 걸어가게 유혹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자멸에 이르도록 했다. 이 방면에서 침통한 교훈을 얻은 수련생의 예는 이미 적지 않게 사이트에 게재되었다. 수련인이 마음이 바르지 않아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에게 교란을 받고 박해를 받으며 중도에서 그만 두고 심지어 생명이 훼멸된 슬픈 사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있었다. 예를 들면, 대법 중에 있는 명나라의 한 수도인(修道人)이 뱀에게 부체당하여 원신이 죽고 나중에 사람의 몸이 뱀에게 전부 점유된 등 이런 무서운 사례는 모두 우리들로 하여금 깨어나 깊이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사존께서는《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이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관념이다. 어떤 자는 가짜 이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지언정 개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대법제자로서, 새로운 우주 미래의 각자(覺者)로서 우리들은 절대 낡은 관념 및 변이된 일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낡은 세력의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를 버리고 완전히 대법에 동화되어야만 진정한 정각정오(正覺正悟)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새 우주 그 속의 그 시간, 공간, 생명, 기제, 법 등 일체는 모두 새롭게 배치한 것으로 낡은 우주와의 일체 연계가 없게 되는데…”(《2003년 캐나다 밴쿠버 법회에서의 설법》) 낡은 우주의 모든 중생들은 반드시 대법에 동화된 후에라야만 새로운 우주에 진입할 수 있다. 우리들의 지혜, 우리들의 생명, 우리들의 미래, 전체 대궁의 모든 것은 사존께서 대법으로 만든 것이다. 만약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와 대법의 깨우침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지금까지도 순진하고 천박하며 바람 따라 흔들리는 세속의 속인처럼 계속 무명무지(無明無知)속에서 업을 지을 것이었다. 인생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진정한 생명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이 존재하는 이 공간이 사람에게 정해 준 생존의 사상행위규범, 이 공간에서 사람으로 되는 진정한 표준, 올바른 도리 즉 다시 말해 ‘인도(人道)’도 마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집착할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스스로 옳다고 여길 것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위에 있는 층층의 생명들도 모두 이러했던 것이 아닌가? 기나긴 세월 속에서 모두 자신이 있는 층차의 가장 바른 시기의 법의 표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오늘 새로운 우주 대궁의 원용불파한 새로운 바른 이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이 또한 그들이 감히 대법과 저촉하는 원인이다.

한 수련자로서 우리들은 지혜가 얼마나 뛰어나든지 시야가 얼마나 넓든지 용량이 얼마나 크든지 모두 무변무량(無邊無量)한 대궁 중의 한 입자에 불과하며 극히 한계가 있다! 사존께서는《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중에서 “당신이 상상한 이 우주가 얼마나 크든지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그 경지 속의 한개 입자이기 때문에 그 한 개 입자가 그 경지 중에 존재하려면 그 경지의 표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 표준은 또 법이 그 한 층차에서의 구체적인 법을 체현한다.”고 하셨다. 드넓은 대법의 바다에서 우리들의 지혜는 마치 한 방울의 물처럼 미미하다. 우리들은 스펀지가 물속에 담긴 것처럼 모두 ‘법에 용해’ 되어야 한다. 절대 잘난 체 하지 말아야 하고 법을 떠나 우쭐거리면 더욱 안 된다. 《뿌리를 캐다》, 이 경문에서 사존께서는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이 법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당신들은 그 법리를 영원히 전부 알고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전체 대궁을 포함하고, 전체 대궁의 일체를 만든 이 한부의 법속에 우리들은 빨리 용해되어야 하는데 법을 떠나 “법외(法外)”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더욱 미묘한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는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진정하게 ‘정오(正悟)’ 해야 하고 비뚤게 나아가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시시각각 법을 스승으로 여겨야 한다. 사존의 대법은 전체 우주대궁의 가장 낮은 데로부터 가장 높은데 이르기까지 층층의 법리를 포함했다. 우리들은 법속에서 수련하고 법속에서 깨달아야만 가장 바르게 깨닫고 가장 바르게 걸으며 가장 빨리 수련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만 대법 속에서 진정하게 법리를 증오(證悟)할 수 있고 각자의 제일 높은 경지에 원만하여 되돌아갈 수 있다. 법을 이탈한 어떠한 이른바 ‘깨달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사오를 향해 나아가 나중에는 자멸하게 된다!

현재, 우리들의 정오(正悟)는 바로 사존의 정법노정에 바싹 따라가는 것이다. 사존의 이끄는 대로 나아가야만 우리들은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전력을 다해 사존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세 가지 일을 잘 하여야 한다. 즉 시간을 아끼어 법을 실증하고 전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또 법공부를 많이 하고 잘해야 한다. 우리들의 머리에서 있는 후천 관념의 ‘진흙’을 남김없이 쏟아내고 최대한 ‘금’을 집어넣기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정념정행하고 세인을 구도하자.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하게 법속에서 가장 바르게 걷는 것으로 되며 가장 바르게 깨닫는 ‘정오(正悟)’를 하는 것으로 된다.

개인적인 깨달음이니 부당한 부분은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2004년 11월 22일
문장발표: 2004년 11월 23일
문장갱신: 2004년 11월 23일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11/23/897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