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사람에서 신으로 성취되는 길을 걷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과학적 관념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서, 저는 일찍이 대법 수련에 들어가 신이 존재함을 믿었지만, 당시에는 신이 아주 멀게 느껴졌습니다. 입문 후 수많은 기적을 직접 듣고 목격했음에도 늘 어딘가 허무맹랑하다고 느꼈습니다. 박해 속에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正法)하는 사명을 짊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사람에서 신으로 성취되는 이 길에서 이미 아주 멀리 걸어왔음을 발견했습니다.

1. 본성을 되찾고 진아(眞我)로 가아(假我)를 대체하다

사람은 명리정(名利情-명예, 이익, 정)을 위해 살아가며 명리정을 내려놓지 못하면 사람에서 신으로 가는 이 문턱을 넘을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수련생들과 비교할 때, 제게는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는데, 바로 어떻게 사람의 이 껍질을 깨부수고 자신을 아주 단단히 싸매고 깊이 감춰둔, 집착해 마지않는 그 사람 마음들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 역시 수련생인데,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당신이 참 쉽게 수련하는 것 같아요. 성품이 어질고 후덕해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남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때로는 당신 수련이 정말 어렵다고 느껴져요. 당신 스스로 두꺼운 껍질로 자신을 싸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거나 건드리고 싶지 않은 집착을 꽁꽁 싸매놓고 있으니, 당신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을 움직일 수 없어요.” 이 말은 매우 옳았으나 당시 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껍질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밖에서 그것을 찔러 터뜨리려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매번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진정한 전환점은 ‘전법륜(轉法輪)’을 외우기 시작하면서 나타났습니다. 법을 외우는 과정 자체가 바로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란이 매우 컸습니다. 책만 들면 몽롱하고 졸음이 쏟아지며 마음이 불안정하고, 속인 속의 각종 잡념이 끊임없이 솟구쳤습니다. 자꾸 이것저것 하고 싶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내려놓으면 아무 일도 없었고 금세 괜찮아졌습니다. 다행히 법공부 기초가 있어서 이것이 연공초마(煉功招魔)로 마를 부른 것이고 마의 교란임을 알았기에, 끊임없이 배척하며 끈기 있게 외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정념을 발했고, 머리가 맑아지면 다시 이어서 외웠습니다. 이렇게 꼬박 2년 시간을 들여 ‘전법륜’을 한 번 다 외웠습니다. 이후로는 속도가 붙어 1년에 한 번 외울 수 있었습니다.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수련 상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특히 두 번째로 다 외운 후 그 변화가 더욱 뚜렷했습니다. 화강암처럼 완고하던 그 집착들이 어느 순간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완고한 집착을 진정으로 제거하기는커녕 제거하려는 생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것을 제거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습니다. 정말 제거한다고 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최소한 이런 완고한 집착들을 직면할 수는 있었고 밖을 싸고 있던 그 껍질도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마치 명리정 속에 빠져 있던 상태에서 단번에 걸어 나온 것 같았고, 빠져나와 제3자의 입장에서 명리정을 살필 수 있게 됐다고 느꼈습니다. 대체 그것들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 속에 빠져 취하고 미치게 만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지 보게 됐습니다.

먼저 명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속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내심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느끼는 일종의 감정일 뿐입니다. 남이 좋게 보면 기뻐하고 나쁘게 보면 기분이 안 좋은 것인데, 본질적으로 이 역시 정의 한 가지 표현입니다. 수련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것은 정으로 인해 생겨난 일종의 물질입니다. 기쁠 때 심신이 즐겁게 되는 것은 하나의 집착이므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우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소업하는 것이므로 나쁜 일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사람의 일종의 감정일 뿐입니다. 속인도 “외부 사물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자신의 불행으로 인해 슬퍼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사명을 짊어진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는 해야 할 일이 그토록 많은데, 어찌 그런 것들을 느낄 한가한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이(利)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에 대한 집착은 잃고 얻는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반영하며, 속인 속에서 장기간 이익을 추구해 온 습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수련 초기에는 법리에 대한 인식 층차가 비교적 낮아 주로 이익을 잃으면 덕으로 바뀐다는 것으로 균형을 잡았습니다. 나중에 본질적으로 이것 역시 이기적인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물질적 이익을 잃으면 덕으로 바뀌는 것은 우주의 특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이익을 잃은 후 이것으로 심리적 균형을 맞춘다면 본질적으로 여전히 이익에 대한 집착입니다.

사부님께서 ‘정진요지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고통을 나는 다 알고 있으며 사실 나는 당신들 자신보다도 더 당신들을 소중히 여긴다!” 사부님의 이 말씀에서 저는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를 느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강렬한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사부님의 정법 시각에서 보면, 대법제자는 사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의 수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이는 우리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가운데 자신의 서약을 실현하고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자신을 인식하면 사명과 책임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이미 정법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토록 집착해 마지않는 명리를 또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겠습니까? 소유한 부는 모두 자신의 덕으로 바꾼 것이며 또한 모두 대법의 자원입니다. 속인 중에서 수련하기에 속인 상태에 부합해야 하고 속인의 정상적 생활을 유지해야 하므로 합리적으로 잘 계획하고 안배하며, 나머지 부분은 모두 대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는 그저 재산관리인일 뿐입니다. 얼마만큼의 덕을 가져다가 공(功)으로 연화(演化)시킬지, 얼마만큼의 덕을 가져다 부로 전환할지는 모두 사부님께서 안배하시니, 마음을 바르게 놓고 다방면으로 균형을 잘 잡으며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명리를 내려놓는 과정에서 정도 옅어졌지만, 명리에 비해 정은 내려놓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정이 비교적 옅다고 생각했지만, 진정으로 정을 내려놓고 사람에서 벗어나려 할 때 비로소 정말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음을 발견했습니다. 부부의 정을 예로 들면, 저와 아내는 30년에 가까운 정법 수련의 과정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함께 천안문에 가서 법을 실증했고 함께 박해에 반대했으며, 함께 세 가지 일을 하며 사부님을 도와 정법했고 수련의 길에서 크고 작은 각종 고난에 함께 직면했습니다. 이미 단순한 부부의 정이 아니라, 수련의 길에서 서로 돕고 생사를 함께한 동수(同修)의 정도 있었습니다.

더욱 수련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 정이 무엇이 나쁜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제거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수련의 길은 모두 질서 정연해, 제거해야 할 때가 되자 상응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한동안 저와 아내 사이에 갑자기 불화가 생겼습니다. 많은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고 의견이 엇갈렸으며, 심지어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법을 외운 후 어느 정도 제고돼 주도적으로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모두 아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으로 찾는 과정에서, 저는 충돌의 원인이 자아가 충격을 받아 원망심이 생겼기 때문임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저를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줄곧 아내에 대한 정이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은 조건부였고 자아가 충격받지 않고 만족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자아를 건드리면 그것은 즉시 자아와 대립했고, 외부의 위협이 있으면 다시 자아를 거두고 정을 꺼내 외부를 향해 일치단결했습니다. 이는 제게 정의 나약함과 믿을 수 없음을 보게 했습니다.

저는 ‘본성’, ‘진아(眞我)’ 바깥을 싸고 있는 것이 관념으로 형성된 ‘가아(假我)’이며, ‘가아’ 밖에는 각종 정과 기타 사람 마음의 집착이 들러붙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명리정을 느끼는 것은 후천적 관념으로 구성된 ‘가아’이고, ‘본성’과 ‘진아’는 오히려 묻혀 있었습니다. 수련인이 만약 진아를 찾지 못하고 가아가 주재하는 상황에서의 이른바 수련이라는 것은 바로 거짓 수련이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진수해 진아를 되찾고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하려면 가아를 멸해야 하는데 가아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속임수를 써 형식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며 바쁘게 보내게 하고, 스스로 아주 정진한다고 여기게 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명리정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명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없으니, 바로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 일하기에 바빠 진정으로 마음을 닦지 못했기에 근본적으로 밖의 이 껍질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법을 외우고 착실히 수련한 것은 밖에서부터 이 껍질을 깨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성 진아의 정념을 충실하게 했기에, 비로소 제가 정에서 벗어나 반대로 그 본질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정이 어떻게 해야 자비로 대체될 수 있는지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체득했습니다. 명리정이 조금씩 닦여 없어질 때, 각종 후천적 관념으로 구성된 가아가 약화될 때, 본성 진아가 착실히 수련하고 법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갈수록 강대해질 때, 이런 내심에서 흘러나오는 선(善)이 바로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이 수련 과정이 바로 반본귀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에서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저는 수련 중 어떻게 해야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이기적임에서 벗어나 사심 없는 경지를 닦아낼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타적이고 사심 없는 경지를 닦는 것 역시 수련 원만을 위한 것이니 여전히 이기적인 목적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알게 됐습니다. 가아의 주재를 받는 한 이기적인 뿌리를 제거할 수 없는데, 가아는 바로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아를 돌파하고 진아가 주인이 될 때, 자비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때, 비로소 은은하게 이타적이고 사심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수련은 바로 이렇게 진실하고 실재하는 것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2. 관념을 전환하고 신의 일념으로 사람의 생각을 대체하다

물론 수련의 진실과 실재함은 그저 간단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착실하게 걸어오는 것입니다. 정에서 벗어나 그 본질을 되돌아보고 법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명리정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와 능력을 갖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속에서 장기간 형성된 각종 관념, 명리정에 대한 집착 및 그 배후에 얽힌 각종 역사적 연원과 요소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기에, 어찌 쉽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실질적으로 소멸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업을 소멸하고 집착을 제거하려면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사람은 날 때부터 고통을 거부하고 고생하기를 원치 않으며 향락을 좋아합니다. 이 관념을 바꾸어 태연하게 고난에 직면하고 능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마음이 꽉 막혀 그 기분이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저는 ‘고생을 낙으로 삼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경지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난에 직면해 사람 마음으로 대하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이 본능적으로 고통을 거부하게 됩니다. 만약 수련인의 마음가짐으로 대한다면 이 이치는 완전히 반대로 됩니다. 고난에 직면해 일단 수련인의 사유로 들어가면 마음가짐이 즉시 바뀝니다. ‘이것은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겨냥한 것이니 마땅히 내려놓아야 하므로 좋은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게 하려는 것이니 마땅히 직면해야 하므로 좋은 일이다. 이것은 나의 용량을 넓히려는 것이니 마땅히 참아야 하므로 좋은 일이다…’

끊임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하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고난을 피하고 고통을 거부하는 마음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고통에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직면하며 도전을 받아들이는 수련의 마음가짐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성이 제고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으며 수련의 즐거움과 오묘함을 느꼈습니다. 고난에 직면한 태연함과 자신감, 그리고 승화한 후의 기쁨, 이것이 바로 ‘고생을 낙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은 일에만 체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도 체현됩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늘 현대인의 도덕 수준이 너무 낮아 사람과 어울리기 참 어렵고 좋은 사람이 되기도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만약 수련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사람들은 다 저의 제고를 돕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제가 제고할 수 있도록 사람들은 ‘나쁜 사람’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며(사실 반드시 그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며 그 속에 저의 집착이란 요소도 들어 있음), 저를 돕고 있는데 어찌 그들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말씀을 정말 체득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와 같아서는 안 되며, 당신은 정말로 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데, 그가 당신을 아래위로 납작하게 만들어 고개를 들 수 없게 했다고만 보지 말라. 당신은 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또 감사드려야 하는데, 정말 그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이 경지에 도달하고 이 층차의 이치에 동화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 또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좋게 보이고 모두 제고를 돕고 있다고 느껴져 진심으로 모든 사람을 선하게 대하면 이 자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일에 대해서는 고생을 낙으로 삼고, 사람에 대해서는 덕으로 원망을 갚는 것, 이것이 고난 속에서 마음가짐에 체현되는 관념의 전환입니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유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즉 문제에 부딪혔을 때 더 이상 급히 해결할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이 반영하는 것이 자신의 어떤 집착인지 살펴보고 다시 그 집착을 겨냥해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그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유는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집착심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련인의 사유는 집착심을 찾아내 닦아 없애면 문제가 존재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3. 기준을 높여 무조건 안으로 찾다

사람은 갈등에 부딪히면 늘 남의 문제를 찾지만 수련인으로서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각지 설법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 설법) 하지만 저는 사용할 줄 몰랐고 특히 처음에는 늘 일의 옳고 그름에 빠져, 찾으면 찾을수록 자신이 이치에 맞다고 느꼈습니다. 나중에야 일을 통해 자신이 어떤 집착심을 반영해 내는지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것이 비로소 찾을 줄 알고 수련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알게 됐습니다. 안으로 찾을 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문제들을 찾아낼 수 있는지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수련 기준을 얼마나 높게 정했는지, 또는 진실한 수련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수년간 알고 지낸 노수련생 한 분이 계시는데 법에 대해 매우 확고하십니다. 노수련생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내가 이 일을 잘못했어. 사부님께 죄송해!” 혹은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건 대법에 죄를 짓는 거야!” 혹은 “내게 문제가 있어, 내 마음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어!” 등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노수련생은 정념이 아주 충분하고 세 가지 일도 매우 정진해 하십니다. 비록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아 법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마음이 아주 정성스럽고 순수하며 자신의 심성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습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법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 폭로하고 바로잡으십니다.

그가 말한 자신의 바르지 못한 생각은 제가 보기에 모두 수련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지만, 그에게는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인식 속에서는 법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생각은 존재해서는 안 되며, 모두 수련인의 수치였습니다. 만약 수련인이 모두 이런 기준으로 안으로 찾는다면 자신의 문제를 찾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진수제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정진 상태일 것입니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고난 중에 있는 한 수련생과 교류한 적이 있습니다. 이 수련생은 자신이 평소 세 가지 일을 꽤 잘한다고 여겼고, 갑자기 나타난 고난에 대해 마음속으로 의아해했으며, 안으로 찾아봐도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일 욕심이나 쟁투심 등을 약간 찾았을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거듭 수련생을 일깨워주며 일하는 이면에 숨겨진 어떤 집착이 있는지, 어떤 기점을 품고 했는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은 다른 목적을 품지 않았고 그저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람을 많이 구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제가 수련생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와서 당신과 함께 교류하고 제고하는데,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수련생이 불쑥 대답했습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나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와줬는데…” 아내가 말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전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아직 완전히 당신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이 일을 할 가치가 있는지, 위험이 크지 않은지 저울질해야 하니 대법이 요구하는 이타적이고 사심 없는 경지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비록 지금 당장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수련인으로서 법의 기준을 모르면 안 되고 자신의 격차를 모르면 안 돼요.” 수련생은 이 말을 듣고 단번에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수련의 기준을 얼마나 높게 세우느냐에 따라 어떤 문제를 찾아낼 수 있고, 그만큼 높은 기준을 향해 닦아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련인은 매 순간 무조건 안으로 찾을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안으로 찾는 것입니다. 아내와 다툼이 발생했을 때 아내가 제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즉시 불평을 품었습니다. ‘둘 다 수련인인데 무슨 근거로 나더러 안으로 찾으라고 하는 거지?’ 심지어 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자꾸 나만 안으로 찾으라고 하는데 내가 수련을 다 해버리면 당신은 어쩌려고?’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여전히 안으로 찾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마음속으로 여전히 안으로 찾는 것을 꺼리며, 특히 갈등 속에서 마치 자기가 먼저 안으로 찾으면 자기가 틀린 것이고 자기가 꿀리는 것처럼 여겼는데 사실 이는 사람의 관념이 전환되지 않은 것입니다. 수련의 시각에서 볼 때, 갈등이 발생했을 때 능동적으로 안으로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심성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수련의 길은 사부님께서 안배해 놓으셨고 부딪히는 모든 일은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니, 그렇다면 당연히 이 얻기 힘든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겨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수련은 영원히 자신을 닦는 것이지 남을 닦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수련 길 역시 사부님의 안배가 있습니다. 갈등 속에서 남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남에게 안으로 찾게 하는 것은 스스로 무조건 안으로 찾지 못한 것입니다.

아내가 때로 영문도 모르게 제게 태도가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안으로 찾았지만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종종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사상 속에 각종 나쁜 생각들이 있을 때, 혹은 사람의 일에 빠져 수련 상태가 좋지 않을 때, 혹은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제가 아직 의식하지 못할 때 아내는 자주 태도가 좋지 않았습니다. 반면 정념이 아주 충분하고 심성이 매우 빨리 제고될 때는 아내의 태도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때로 주위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반영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제게 사람 마음이 무거울 때 사부님께서 주위 사람을 빌려 저를 일깨워주시고 채찍질해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 부딪히든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 하며, 마음을 바르게 놓기만 하면 항상 수련이 승화하는 계기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안으로 찾으려면 안으로 찾는 것과 구세력을 부정하는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저도 다른 많은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착각하는 점이 있었는데, 고난 속에서 일단 안으로 찾으면 마치 자신이 구세력의 박해를 인정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정반대입니다. 진정으로 안으로 찾아 문제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근본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구세력이 박해하는 구실은 바로 우리 수련 상태의 빈틈이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안으로 찾는 기점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으로 찾는 것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수련하고 제고하기 위한 것이지 구세력의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심에서 진정으로 올바르게 인식하고 확고하게 다져야 하는 것입니다.

4. 대법에 동화하고 신의 일념으로 사람 마음의 속박을 돌파하다

수련의 길은 사부님께서 모두 닦아 놓으셨고 능력도 알맞게 밀어 올려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사람의 관념에 속박돼 진정으로 법에 동화되지 못해, 감히 걸어가지 못하고 행하지 못할 뿐입니다. 매번 승화한 후 자신의 관념을 돌파하고 신의 일념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즉시 새로운 경지가 열리게 됩니다.

병업 고비 돌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법을 얻기 전 몸이 비교적 건강해 무슨 병에 걸린 적이 없었고 수련 후에도 큰 병업 고비를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날씨가 변할 때, 특히 겨울에 속인의 감기 증상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법리상 이것이 병이 아니라 업을 소멸하는 것이며 세 가지 일을 하는 데도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약을 먹은 적도 없었으며 보통 일주일 정도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기침이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 겨울 한 달 넘게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수련인의 상태예요?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스스로 찾아봐요. 약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기준에 도달한 건 아니잖아요.” 아내의 말은 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온종일 기침을 하니 비록 무슨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수련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수련의 시각에서 보면 신체에 병업 가상이 나타나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병업 고비를 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력의 박해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모두 자신이 병업 고비 방면에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 누락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제 사유를 살펴보니, 기침이 업력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저 수련 중의 이런 표현에 동의하는 것일 뿐, 속인 속에서 장기간 형성된 병에 대한 과학적 관념이 사유 속에 여전히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날씨 변화, 감기 등입니다. 아마 이것이 구세력이 병업 형식으로 교란하는 구실일 것입니다. 똑같은 병업 가상이지만 사람 마음으로 보면 병이고, 개인 수련 시각에서 보면 업을 소멸하는 것이며, 정법 수련 시각에서 보면 교란이고 박해입니다. 겉보기에는 간단한 ‘표현’의 차이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실재하는 경지의 차이이자 사람 마음과 신의 일념의 차이였습니다. 저는 착실히 수련하는 가운데 이 층차의 법리에 동화돼야 했습니다.

정념을 확고히 하는 것은 자신의 사유를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침이 날 때마다 이것은 업력이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것이며 날씨 등 외적 요인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법시기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과정에서 업력을 소멸하도록 안배하셨지 이런 무의미한 소업은 안배하지 않으셨으니, 저는 소극적으로 감내해서는 안 됐습니다. 또한 바르게 행해야(正行) 했습니다. 어떤 기후 환경 아래서든 더 이상 마음대로 기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의식적으로 기침을 억제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웠고 심지어 잠시 참을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 후에는 기침이 더 심하게 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날씨와 무관하다는 정념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기침을 억제했습니다. 점차 기침이 가벼워졌고 간격도 갈수록 길어졌으며, 마침내 기침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번에 착실하게 수련한 경험을 통해, 병업 고비를 넘는 방면에서 바른 믿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저는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고 심성의 누락을 제때 찾아내 바로잡기만 하면, 몸을 통제해 이런 올바르지 않은 상태가 나타나지 않게 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세력을 부정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한번은 아들 가족이 타지에서 돌아와 우리와 사돈이 함께 며칠간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일정을 마치기 전날 밤 식사 후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전신에 한기가 들고 두통과 목 통증이 느껴져 곧바로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니 요 며칠간 스스로 너무 느슨하게 했고 각종 사람 마음이 너무 무거움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즉시 사상을 바로잡고 확고한 일념을 발했습니다. ‘절대 이럴 때 병업 교란이 나타나 수련하지 않는 속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정념을 발하고 누워 잤는데 밤새 혼미하게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증상은 기본적으로 사라졌고 단지 몸이 약간 무기력하게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오후에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먼저 제 대신 차를 좀 운전해 주었고, 저는 차에서 잠시 잤습니다. 깨어나 보니 완전히 정상을 회복해 다시 100여 km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는 병업 상태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만 하면 사상 속에서 즉시 확고한 일념을 발했습니다. ‘즉시 멈춰라! 병업 교란이 나타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몸에 병업 상태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런 다음 다시 제 수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고 제때 바로잡았습니다.

이처럼 신의 일념은 입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표면적으로 지어내는 것도 아니며, 수련해 낸 진실한 경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련 중에서 정진할수록 심성이 높아지고 경지가 높아지며 능력이 커져,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가운데 발휘하는 작용이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수련 중에는 끊임없이 더 높은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합니다.

5. 자아를 내려놓고 대법을 수호하다

대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박해받지 않게 할 것인가는 줄곧 풀리지 않은 마음속 매듭이었습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서로 다른 층면의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명리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고생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개인 수련 방면의 문제에 속합니다. 둘째,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는 것이 부족했습니다. 자신의 수련에 누락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었고,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대법이 자신을 보호해 이 정법 수련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수련에 대한 자신감 부족 같지만 사실 여전히 대법을 믿지 않는 것이며, 사부님과 대법을 믿는 정도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 기점이 틀렸습니다. 명색이 정법시기 대법제자면서 마음속으로 늘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고, 대법이 어떻게 자신이 박해받지 않도록 보증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법제자, 곧 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 대법이 박해받는 것에 직면해, 마음속으로 마땅히 어떻게 대법을 지키고 우주를 수호하며 중생을 보호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으로 이 경지에 도달한다면 또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대법 수련은 때로 정말 어렵습니다. 수련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치를 고집스럽게 품고 습관적으로 사람의 사유에 따라 한다면 영원히 신의 길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수련하려는 사람에게 대법 수련은 또 매우 쉽습니다. 사부님께서 대부분의 업력을 우리를 대신해 감당하셨으니, 마음을 바르게 놓고 법공부를 제대로 하며 법의 기준과 요구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사부님의 보살핌 속에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속인 중에서 저는 사람의 관념과 과학적 관념이 매우 무거운 사람이며 깨달음도 좋은 편이 못 됩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 저는 마음을 다해 법공부를 할 수 있었고, ‘전법륜’을 이미 5번 외웠으며, 사부님께서 각지에서 하신 설법도 체계적으로 20번 정도 배웠기에 사부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압니다. 비록 때로는 정진하지 못해 아주 느리게 걸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길을 바르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호기심으로 신기한 것을 추구하지 않았고, 지름길을 가거나 높게 닦기를 추구하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법공부(특히 법 외우기) 속에서 법리를 깨닫고,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심성을 제고하며 사람을 구하는 가운데 정념정행하고 승화 속에서 대법에 동화됐습니다. 고뇌를 지나고 갈등을 넘으며 고난을 이겨내는 매 한 걸음은 모두 사람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대법 수련이 사람에서 신으로 성취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공능이 나타나고 얼마나 많은 기적이 출현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실재하는 경지의 승화에 있습니다.

사람에서 신으로 성취되는 이 길을 멀리 걸어갈수록 마음속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은 반석같이 확고해지고 앞에 펼쳐진 길이 더욱 또렷해지며, 사부님께서 ‘홍음2-대법도(大法徒)’에서 하신 “신의 길은 멀지 않도다”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법 수련 과정에서 참여한 모든 기회, 했던 모든 일은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제고하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제자가 수련하고 제고하는 매 한 걸음에는 모두 사부님의 거대한 감당과 헌신이 담겨 있으니 사부님에 대한 감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고 착실한 수련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아주 많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 수련생과 교류하고자 하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2026년 명혜망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6년 10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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