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막 검은 소굴에서 나왔다.
검은 소굴에 갇힌 후 계속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법이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이곳에 와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여기는 수련 장소가 아니며 대법제자가 머물러야 할 곳은 더더욱 아니다. 이곳은 사악의 중심이니, 바로 여기에서 정법하고 박해를 끝내야 한다!’ 아울러 대법제자는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해야 할 사명도 짊어지고 있으며, 사람을 구하는 것과 박해에 반대하는 것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다. 이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예전과는 달리 반드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생각을 명확히 하자 머릿속에 이런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박해가 막 시작됐을 무렵, 우연히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온갖 고난과 사방의 추격을 겪은 끝에 마침내 성배가 숨겨진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앞에는 더 이상 길이 없었고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에 기대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그곳에 분명 길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의연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신비로운 길이 그의 발아래 나타났고, 그가 걸어감에 따라 계속 뻗어 나갔다. 이 장면을 통해 내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따라 걷는 길이 미래를 개창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사부님과 법을 믿고 생사를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신의 길을 걷는 것이고, 진정으로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법을 스승으로 삼고 한 걸음 한 걸음 정법과 박해 반대의 발걸음으로 여러 고비를 지나왔으며, 상상 속에서 가중되던 박해를 씻어냈다. 그러자 뜻밖의 기쁨을 맞이하게 됐고, 매일 법 속에서 늘 새로운 수확이 있었다. 뭇 중생이 모두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중공 악당의 세뇌에 미혹돼 진정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진상을 깨닫지 못하도록 마귀가 겹겹이 쳐놓은 변이된 관념을 대법제자가 도와 타파해주기를, 아울러 중공 악당에 대해 감정이 남아 있는 중생들을 자비로 일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매번 손길을 내밀어 안과 밖의 경계를 뚫도록 도와주셨다. 많은 신께서 암암리에 대법제자를 돕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고, 검은 소굴 안의 사람들도 사실 진상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최후의 시각에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새로운 함의를 깨닫게 해주신 사존께 감사드린다. 제자가 우둔해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중생이 몸을 돌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을 구하는 이 마지막 시간이 정말 너무나 소중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며 한 무리의 중생을 이끌고 되돌아가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하지만 검은 소굴에서 나온 후, 지역 수련생들 속에서 꽤 보편적일 수 있는 문제 하나를 발견했다. 많은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을 층차가 떨어졌거나 잘하지 못한 결과로 여기며, 시련을 겪었는지 여부로 수련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가늠한다는 것이다. 법으로 미혹을 깨뜨리지 않다 보니 이것이 수련생들에게 시종일관 사람을 구하러 걸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됐다. 어떤 수련생은 일단 붙잡히면 사람 마음이나 두려움 때문에 전향해 버리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해 박해를 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기도 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으로 인해 구세력에게 꼬투리를 잡혀 박해가 가중됐다. 이른바 스스로를 구속하게 만들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게 했고, 그 결과 사람을 구하는 강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무척 안타깝다.
이에 대한 내 이해는 이러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응당 안전에 주의하며 매 걸음을 흔들림 없이 잘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붙잡히게 되면 더더욱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더 강하게 박해를 반대해야 하고 그것을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현재 사부님의 정법은 이미 인간 세상의 표층에 근접했고 진선인(眞·善·忍)의 에너지가 이미 인간 세상의 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사악한 중심이 바로 정법하고 박해를 반대하며 사람을 구하는 장소가 아니겠는가? 사실이 그러하다. 사악은 이미 궤멸하는 추세에 있으므로 대법제자의 정념만으로도 그것들을 제약할 수 있고, 심지어 세뇌된 생명들이 즉각 진상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인간 세상은 늘 미혹의 공간이기에 겉으로 나타나는 박해는 여전히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두려움, 사람 마음, 사람의 정 등의 집착을 제거하는 데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바르게 걸었고 나 역시 잘했으므로 지금부터 시작하여 어떤 마난(魔難)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아마 당신의 이 마음이, 또 그것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마난(魔難)을 만들어 주도록 부추길 것이다. 왜냐하면 구세력은 이것 역시 그것들에 대한 일종의 승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그는,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마난이 없이 자재(自在)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안 된다. 이 마음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럼 또 그것에게 빈틈을 타게 한 것이 아닌가?”(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이에 대해 나는 우리가 시련을 피하려고 잘하거나 안 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다잡고 정법의 기점에 서서 대법제자가 응당 해야 할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박해를 가로막을 때 그 구세력과 우주의 뭇 신들은 모두 말한다. ‘당신의 정법(正法)은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무슨 법을 바로 잡는단 말입니까? 당신은 바르지 못한 것을 가져다가 정법으로 간주합니까? 그가 당신 제자가 맞습니까? 당신이 보십시오, 그가 당신을 사부로 여깁니까? 박해하면 할수록 그는 도리어 사람마음이 더욱 많아집니다. 박해받는 중에 박해 당할수록 더욱 견강(堅強)해지고 정념이 갈수록 충족해져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 말해 보십시오, 이를 어찌할 것인지? 줄곧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자신을 대법제자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이에 대해 나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소극적인 감내, 도피 등은 모두 생사 고비를 넘지 못한 것이며, 이 또한 수련인과 속인의 경계 문제라고 이해했다.
더구나 박해 속에서 피동적으로 감내하거나 떨어지기보다는, 차라리 생사를 내려놓고 박해를 반대하며 죽을 각오로 임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어쩌면 그 끝에 새롭고 희망찬 국면이 열릴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체득한 바다.
시간이 촉박해 우선 이 정도만 써서 수련생들과 토론하려 한다.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6년 10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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