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법공부를 중시해 바른길을 걷고 사람을 많이 구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복명(復明)

[명혜망] 나는 올해 76세로 아내, 딸과 함께 1996년에 다행히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에 들어섰다. 막 수련에 들어섰을 때 사존께서 우리 온 가족의 신체를 정화해주셨고 우리의 병은 모두 나아 대법의 병을 없애고 건강을 증진하는 신묘한 효과를 체험했다. 우리는 또한 인생의 의미가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해 자신이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래에 온 가족이 어떻게 가정 법공부를 중시하고 정법시기 수련의 길을 잘 걸어왔는지에 대한 심득을 써서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1. 가정 법공부를 중시해 정법시기 수련의 길을 잘 걷다

1999년 ‘7·20’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전 우리집은 바로 법공부 장소였다. 처음에는 아내 사무실에서 법공부를 했고 1999년 ‘4·25’ 이후 우리집으로 바꿨다. 법공부 팀에는 전후로 수십 명의 수련생이 와서 참가했고 우리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해 다 함께 ‘전법륜(轉法輪)’ 두 강의를 공부했다. 법공부 팀은 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지 한 달여가 지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중단됐고 이후 우리는 가족끼리 함께 단체 법공부를 하는 것으로 바꿨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특히 진상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 후 우리는 일하는 것만 중시하고 법공부와 수련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구세력에게 거듭 틈을 타게 해 반복해서 납치돼 박해당했다. 2016년 아내와 딸이 출옥해 돌아온 후 우리는 다시 매일 저녁 가정 법공부를 시작했다. 아내가 박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와 딸은 지금까지 계속 함께 법공부를 하고 있다.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우리는 보통 법공부 시간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섣달그믐날에 션윈 신년 공연을 볼 때조차 낮에 시간을 내어 ‘전법륜’ 한 강의를 공부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전법륜’ 한 강의를 공부하거나 상황에 따라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한 강의 시청했다. 사부님의 다른 설법과 ‘정진요지’는 주로 각자 공부했다. 아내는 법을 외우고 읽는 것을 위주로 했고 나는 법을 외우고 대법서적을 필사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새로운 경문이 나올 때면 우리는 다 함께 몇 차례 통독하고 공부한 후의 심득 체득을 서로 교류했다. 갈등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법공부를 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아 대법의 요구에 따라 수련인의 기준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1999년 ‘7·20’ 중공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한동안 붉은 공포가 중화 대지를 뒤덮었고 각종 매체는 미친 듯이 유언비어를 날조하며 파룬궁을 비방했다. 하루는 악당 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던 셋째 동생이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지금 국가가 이미 파룬궁 수련을 금지했으니 형님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지 마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말했다. “수련하고 안 하고는 다 개인의 선택이다. 나는 이미 지천명의 나이라 선악과 좋고 나쁨은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다 겪어본 사람들이잖니. 공산당이 벌인 운동이 적더냐? 한 나쁜 짓이 적더냐?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사람마저 박해하니 너는 이것이 어떤 당인지 똑똑히 봐야 한다.”

이후 셋째 동생이 일하던 공장이 개편되는 과정에서 재산을 사적으로 빼돌리는 일이 발생하면서 그는 중공의 부패와 사악함을 똑똑히 보게 됐다. 이후 그는 ‘희망지성(希望之聲)’ 등 해외 라디오 방송을 듣기 시작했고 일부 진상을 알게 됐다. 재작년에 셋째 동생도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그가 사부님의 설법 영상 제2강을 다 보았을 때 사부님께서 그에게 천목(天目)을 열어주셨고 그는 많은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아마도 법공부 기초를 단단히 다진 덕분인지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 세 식구는 모두 대법에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 전 나는 신문사에 청원하러 간 적도 있고 관련 부서에 진상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그래서 박해가 막 시작됐을 때 나는 자주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에게 소환됐고 직장에서 연 세뇌반에 한 달 반 동안 갇혀 있었다. 대법서적을 내놓지 않자 국보 경찰은 집으로 찾아와 불법 가택수색을 했고 거처를 감시당해 세 식구가 외출할 때마다 미행당했다.

박해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념을 가로막지 못했다. 더 많은 수련생이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우리집은 수련생들의 연락처가 됐고 우리는 수련생들을 찾아 각종 교류에 참가했다. 끊임없는 교류를 거치며 수련생들은 서로 격려했고 많은 수련생이 걸어 나왔으며 적지 않은 수련생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거나 현지 정부 부서에 청원하러 갔다.

나와 아내도 청원하러 갔다가 한 달간 불법 구금된 후 또 직장에서 각각 감시를 받았고 나는 직장에서 반년 동안 불법 감시를 받았다. 2000년 성(省) ‘610’의 사악한 세뇌반을 배척하기 위해 나와 아내는 집을 떠나 유랑했고 이후 딸도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났다. 11개월 후 우리는 경찰에게 납치됐고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온 가족이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2010년 내가 감옥에서 돌아온 후 불법적으로 공직에서 해고당했기에 수련생들은 내가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내도 그렇게 여겼으며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한동안 법공부를 한 후 아내와 교류할 때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가 일하러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대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두려운 거요, 아니면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거요?” 아내는 “둘 다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럼 지금 악을 폭로하고 진상을 알리는 일이 중요하오, 아니면 일자리를 찾아 생활을 좀 더 낫게 하는 게 중요하오?”라고 물었다. 아내는 “당연히 중생구도가 중요하죠”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친구도 나보고 자기 병원에 와서 도와달라고 하고 수입도 괜찮다고 하오. 하지만 요즘 진료소를 하는 건 다 돈을 벌기 위해서잖소. 친구를 위해 돈을 벌어주려면 자신이 지켜온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고 부상자를 돕는다’는 직업도덕을 포기해야 하는데 나는 수련인으로서 더욱 영합할 수 없소. 다른 일을 하면 매일 8시간씩 일해야 하는데 여가 시간으로 대법 일을 하려면 아예 할 수도 없고 잘할 수도 없소.” 나와 아내는 교류하며 저울질해 본 후 역시 중생구도 하는 일을 위주로 하기로 결정했고 나는 일자리를 찾으려던 생각을 접었다.

사람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자 사부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아주 잘 안배해 주셨다. 우리가 걸어오면서 비록 경제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곤경을 많이 겪은 것 같지만 사람 마음의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았기에 모두 순조롭게 지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 때문에 걱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진상 자료를 만드는 면에서도 자금이 없어서 지체한 적이 없었다.

2. 가족 정을 내려놓고 갈등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다

법공부 교류 중에 수련생들은 늘 한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곤 했다. 대법제자는 보통 속인과의 갈등은 쉽게 해결하지만 수련생 간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속인과 갈등에 부딪혔을 때는 모두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고 속인과 똑같이 굴지 않으며 아무리 큰 손해를 보거나 어떤 모욕을 당해도 한 번 웃어넘기고 지나간다.

하지만 수련생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는 다들 상대방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대법의 기준으로 상대방에게 요구한다. “당신은 왜 그렇게 하죠?”, “당신이 그러고도 연공인인가요?” 특히 온 가족이 수련인인 경우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고부 사이 등에서 보통 어른이라는 이유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자기 뜻을 남에게 강요하기 좋아하고 다들 상대방을 바꾸려 한다. 갈등에 부딪히면 서로 비난하고 서로 포용하고 협력하는 것이 부족하다.

이는 수련을 심각하게 교란하고 정체(整體, 공동체)의 승화와 제고를 교란한다. 가족 중 나타나는 많은 병업 고비 시련은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체득은 가정 내 대법제자 간의 갈등을 잘 처리하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가족이 함께 법공부를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갈등과 모든 문제를 법공부 속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 식구 사이에도 자주 갈등이 발생하고 심지어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지만 이런 갈등에 부딪힌 후 다들 능동적으로 안으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제때 갈등을 해소했다.

한번은 한 노년 수련생에게 뇌경색 병업 가상이 나타나서 나와 아내는 다른 수련생들과 정기적으로 도시 외곽에 가서 이 노년 수련생과 법공부를 하고 정념을 발했다. 하루는 나와 아내가 버스를 타는 문제로 다투었는데 아내가 “직행버스를 타요”라고 하자 나는 “외곽 노선은 배차 간격이 기니까 시내버스를 타고 어느 정류장에서 어떤 차로 갈아타는 게 지체되지 않소”라고 했다. 서로 고집을 부리자 아내는 “그럼 각자 알아서 가요”라고 했다. 나는 문득 일할 때 협력해야 한다고 하신 사부님의 법이 떠올라 “당신이 타자는 대로 탑시다”라고 했다. 결국 한 시간 남짓 걸려서야 수련생 집에 도착했다.

법공부를 마치고 집에 갈 때 우리가 어떤 노선버스를 한동안 기다리다 나는 의논하는 말투로 말했다. “이 차는 20분에 한 대씩 오니 다른 버스를 타고 갈아탄 뒤 다시 정류장에서 갈아타는 게 어떨까? 시내버스가 빨리 오니까.” 아내는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라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도착한 차에 탔고 이렇게 좀 차를 더 갈아타긴 했지만 시내버스는 회전이 빨라서 출발할 때보다 20여 분 일찍 집에 도착했다. 이 일 이후 우리는 무슨 일이든 상의해서 해결했고 다투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한동안 딸의 수련 상태가 좋지 않아 게으름을 피우고 연공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법공부도 정진하지 않았다. 아내는 몹시 조급해하며 자신이 말해도 소용이 없자 수련생을 집으로 불러 딸과 교류하게 했다. 하지만 수련생이 집에 올 때마다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이 일 때문에 모녀 사이에 마음의 벽까지 생겼다.

내가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는 내게 딸의 태도를 하소연했다. 나는 아내와 교류하며 말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문제를 보는 방법이 틀렸소. 당신은 수련인의 마음가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엄마로서 대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딸에게 요구하고 있소. 겉보기엔 딸의 문제 같지만 사실은 다 자신의 마음이 빚어낸 거요. 당신은 딸의 부족한 면만 보고 장점은 보지 못했소. 딸은 어릴 때부터 명리(名·利)를 담담하게 봤고 동정심이 있었소. 대법을 수련한 후로 요즘 젊은이들처럼 먹고 입고 노는 걸 따지거나 유행을 추구하지 않았잖소. 딸이 세 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7년간 검은 소굴에서 살았는데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요. 딸은 우리만큼 그런 집착심이 많지 않고 오히려 상당 부분 우리가 정에 대한 집착심을 없애도록 도와주고 있는 거요.”

아마도 아내가 딸에 대한 정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 딸도 법공부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딸이 내게 함께 연공하자고 제안했고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하며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2011년 내가 수련생과 협력해 인터넷으로 자수 사업을 하던 중 사악에게 틈을 타게 했는데, 분배해 준 자수품을 회수할 시기가 됐으나 제조업체가 수거 기간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좋은가? 아내는 나를 원망하지 않고 나와 교류했다. “그들이 계약을 어기긴 했지만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진선인’을 수련하니 직업도덕을 지켜야 해요. 우리가 아무리 큰 손해를 보더라도 사전에 한 약속은 지켜야지, 자수를 맡은 사람들이 손해 보게 해선 안 돼요.” 아내는 사장으로 있는 남동생에게서 15만 위안을 빌려 자수 노임을 전액 지불했고 자수품도 회수하지 않고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했다.

우리 가족은 병업 고비를 대할 때 모두 각자 대법의 기준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했고 때로는 그저 함께 정념을 발했는데 보통 빨리 넘길 수 있었다. 우리는 가족이 병업 고비를 넘길 때 사람의 정으로 보살피고 대하면 의존심, 나태함, 어리광 부리는 마음을 초래하게 된다고 여겼다. 원래는 단순한 병업 고비 문제일 뿐인데 가족의 정이 얽히면 일이 더 복잡해지고 오히려 시련을 가중시켜 어쩌면 병업 고비를 매우 길게 끌게 할 수도 있다.

2020년 중공 바이러스(우한폐렴) 전염병 사태 기간에 나와 딸은 모두 열이 나고 오한이 들며 온몸과 목이 아픈 소위 ‘양성’ 증상이 나타났다. 우리는 둘 다 하소연하지 않고 평소처럼 각자 해야 할 일을 했다. 하루는 딸이 괴로워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수련생에게 진상 자료를 전해줄 시간이 됐다. 내가 딸에게 “괜찮겠니?”라고 묻자 그녀는 두말없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복 2시간 가까이 걸려 자료를 다 전해주고 돌아온 딸은 땀을 흠뻑 흘린 뒤 샤워를 하고 한숨 잤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3. 서로 협력해 중생구도의 서약을 실현하다

1999년 ‘7·20’ 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직장에서 연 학습반에서 성(省)의 관련 간부와 부서 간부가 와서 ‘전향’시키려 할 때나, 국보 경찰이 불법 소환해 구류하는 기간에 피동적으로 파룬궁 수련이 우리 가족에게 가져다준 변화와 파룬궁 수련의 훌륭함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렇게 피동적으로 박해받아서는 안 되고 우리가 더 폭넓게 민중에게 파룬궁이 박해받는 진상을 알려야겠기에 우리는 능동적으로 진상 알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1) 각계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

처음에 우리는 수련생과 협력해 성 밖에서 보내온 진상 자료를 인쇄한 후 각 주, 시, 현의 관련 부서에 우편으로 보냈다. 당시 현지에는 아직 자체 자료점이 없어서 대부분 성 밖에서 온 진상 자료였고 매우 간단했다. 복사점에 가서 복사하거나 먹지로 베껴 써서 배포했다.

나와 아내는 소속 계통의 상급 ‘610’ 관련 간부에게 자료를 보내고 나를 소환한 경찰에게 진상 자료를 보내는 것 외에도 직접 그들을 찾아가 우리 가족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변화와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는 내용으로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이어 나와 아내는 실명으로 각급 관련 부서 간부와 직장 간부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진상 편지를 썼다. 동시에 선생님, 동창, 전우, 동료들에게 공개편지를 우편으로 보내 그들이 진상을 알게 했다.

이후 우리가 박해받는 동안 그들의 이해와 지지와 도움을 얻었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의 큰 흐름 속에서 그들 대부분이 중공 악당 조직에서 탈퇴했다. 특히 우리가 집을 떠나 유랑할 때 공안 내부 수배가 내려지고 길목에 검문소가 설치돼 거듭 위험에 처했지만 모두 친구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 다른 성에서 사법국 국장을 맡은 한 전우는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해 위험을 피하게 하려 했으나 우리는 선의로 사양했다.

2) 박해도 우리가 자료점을 운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000년 우리는 거의 모든 저축을 꺼내 컴퓨터 한 대를 샀다. 처음에는 주로 사부님의 경문을 다운로드해 인쇄한 후 복사점에 가서 복사해 수련생들에게 나눠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아내가 사악한 세뇌반을 배척하기 위해 집을 떠나 유랑하면서 자료 만드는 일을 중단했다. 이후 우리는 여러 지역을 떠돌며 친척, 친구, 전우, 예전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받는 진상을 알리고 우리 가족이 박해받은 사실을 이야기했으며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을 설명하고 중공의 거짓말을 폭로했다.

이후 각급 공안의 괴롭힘으로 딸도 집을 떠나 우리를 찾아왔다. 당시 우리가 찾을 만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 찾았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사방을 다니며 진상을 알리는 것은 범위가 너무 좁고 강도도 약하다고 늘 느꼈다. 이때 나는 문득 진상 자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 딸과 상의했고 둘 다 찬성했다.

2001년 중순, 우리는 현지로 돌아와 친구가 지원해 준 1만여 위안으로 컴퓨터, 프린터 등 장비를 샀다. 수련생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친구가 제공한 아파트 한 채에 가정 자료점을 세워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웠다.

자료점을 세운 후 딸은 기술 및 장비 유지보수를 맡고, 아내는 인쇄를 담당했으며, 나는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 글 등을 작성했다. 당시 수련생 조카가 2~3일마다 소모품을 보내왔고 동시에 인쇄된 자료를 가져갔다. 잉크젯 프린터를 사용했기에 며칠마다 잉크를 보충해야 했고 소모품을 얼마나 썼는지 진상 자료를 얼마나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당시 우리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다. 비록 외부와 격리돼 때로는 밤에 외출해 수련생을 찾아 교류하거나 아침 일찍 시장에 가서 채소를 좀 샀을 뿐이지만 그때는 아무런 두려움도 몰랐고 피곤한 줄도 몰랐다. 오직 진상 자료를 더 많이 만들어 사람을 더 많이 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후 친구가 외지에서 온 사람을 접대해야 했기에(사실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신 것이고 경찰이 이미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장소를 옮긴 지 얼마 안 돼 국보 경찰에게 납치됐고 세 식구 모두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2003년 내가 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자료점을 복구했다. 2004년 에포크타임스 사설 ‘9평 공산당’이 발표된 후 ‘9평’과 합해 진상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고 대량의 진상 전단과 소책자를 편집 인쇄해 민중에게 널리 배포하며 민중이 중공 악당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동원하기 시작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하는 데만 바쁘다가 또 구세력에게 틈을 타게 해 우리 세 식구는 다시 국보 경찰에게 납치됐고 모두 불법 판결을 받았다. 나는 5년형을 선고받았고 아내와 딸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8년 아내와 딸이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정법 노정을 따라가고 민중에게 진상을 알리는 강도를 높이려면 대량의 자료가 필요했기에 그녀들은 집에서 다시 자료점을 복구했다. 당시 주로 ‘9평’ 등의 CD, 진상 지폐, 진상 스티커, 대법 진상 호신부(護身符) 등과 진상 전단, 소책자를 만들어 진상 자료가 더욱 풍부하고 전면적으로 됐다.

내가 감옥에서 돌아온 후 역시 곧바로 진상 자료를 만드는 일에 합류했다. 당시 자료 사용량이 상당히 많아 주변 수련생과 법공부 팀 수련생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 외에도 주로 일부 주(州)와 시(市)의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고 배포할 수 있도록 공급했다. 진상 자료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법공부 팀의 70대 노년 수련생 몇 분도 자원해서 컴퓨터를 배우겠다고 나섰고 딸은 시간을 내어 수련생들이 컴퓨터를 배우도록 도왔다.

이후 한 수련생은 인쇄를 배워 진상 자료를 만들었고, 한 수련생은 컴퓨터를 배워 인터넷에 접속해 삼퇴 명단과 수련생들이 수집해 온 진상 전화번호를 전송하는 일을 맡았으며, 원래 통신 전보 업무를 하던 수련생은 타이핑 작업을 담당했다. 내 딸은 주로 기술적인 일을 맡았는데 끊임없이 모색해 스스로 프린터 수리하는 법을 익혔고 현지 수련생들의 프린터 수리를 도울 뿐만 아니라, 다른 수련생과 협력해 각지의 주와 시에 가서 컴퓨터 등 기술 문제 해결을 도왔다. 나는 여전히 글 작성과 자료 수집 및 정리 작업을 담당했다. 모두가 서로 분업하고 협력하며 조화로웠다. 나와 아내는 하루걸러 다른 수련생들이 인쇄한 자료를 모아서 전달했고 동시에 주와 시의 수련생들이 가정 자료점을 세우도록 격려하고 도왔으며 장비를 제공하고 소모품 구매를 협조했다.

매번 억울한 옥살이 박해를 겪고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대법 진상 자료를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가족의 중생구도 사명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알았다. 수련생들이 중생을 구하는 데 필요한 진상 자료가 바로 우리의 임무였다. 비록 조금 고생스럽고 피곤하긴 해도 매우 충실했다. 중생들이 하나하나 구원받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3)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생활 속에 녹여내다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데 있어 우리는 진상 자료 만들기를 위주로 했기에 수련생들처럼 밖에 나가 대면해 진상을 알릴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대면해서 진상을 알릴 모든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집 사람들은 사악의 감시 대상이어서 소위 민감한 날이나 명절이 되면 공안, 사법소, 주민센터 등 각종 직원들이 찾아와 ‘안정 유지’를 했다. 전후로 국보 대장, ‘610’ 주임, 주민센터 주임, 종합치안사무소 주임 등 수십 명이 우리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진상을 들으러 온 중생으로 여기고 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으며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안 뒤 삼퇴를 했다.

관할 구역 경찰은 본인이 삼퇴를 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 경찰과 친구를 데리고 와서 삼퇴하게 했다. 딸은 그에게 인터넷 우회 프로그램을 설치해 주었다. 어느 해 5월 13일, 그가 조수와 함께 우리집에 와서 우리는 다 함께 사부님의 생신을 쇠었다. 그는 기쁘게 다시 진상 USB를 받았고 조수에게 “파룬궁 자료는 아주 훌륭하니 자네도 잘 보고 이분들 말을 많이 들어봐. 큰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단지에 케이블이나 가스관을 매설하고 단지 개조 공사를 하러 온 인부, 수도와 전기 요금을 걷는 사람, 가스 계량기를 확인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사람 등에게 나와 아내는 진상을 알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대부분 사람이 삼퇴했다. 아내가 억울한 옥살이에서 돌아온 후 공안은 감시하기 편하도록 직장에 안배해 아내가 청소 일을 하게 했다. 그 기간에 아내는 직장에 업무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시켰다. 청소비를 거둘 때를 이용해 입주민들에게 진상 자료를 전해주었다. 경비원이 여러 번 바뀌었고 주차장 관리인도 계속 바뀌었다. 방금 진상을 듣고 삼퇴한 사람이 얼마 안 돼 떠나고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곤 했다.

한번은 주차장 관리인으로 법원에서 퇴직한 재판장이 왔는데 그는 군에서 전역한 연대급 간부로 가만히 있지 못해 주차 관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진상을 알리자 그는 아주 잘 받아들였고 실명으로 중공의 당 조직에서 탈퇴했다. 내가 진상 USB를 하나 주자 다음 날 그는 내게 “USB를 가져갔더니 아내와 딸이 서로 보겠다고 새벽 3시까지 봤는데 내 차례는 오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다른 내용으로 하나 더 드릴게요. 각자 TV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서로 바꿔가며 보세요”라고 하자 그는 무척 기뻐했다.

그가 진상을 안 후 한 번은 중공 당수가 현지에 오자 파출소 부소장이 경찰들을 데리고 우리를 감시하러 왔는데 이 재판장은 파출소 부소장(그의 친구)에게 “이 가족은 아주 좋은 사람이고 선량한데 당신들은 이 사람들을 감시해서 뭐 하려는 건가?”라고 말했다. 부소장은 “저도 압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위에서 오라니 와야죠”라고 했다. 비록 부소장이 이틀 동안 지켜보러 왔지만 우리가 단지를 드나들어도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각종 동창, 친구, 전우 모임이나 결혼식 등 각종 연회에 참석할 때면 우리 온 가족은 함께 참여해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로 협력해 진상을 알리고 대법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우리의 소원은 바로 더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파룬따파의 제도를 받게 하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를 잘하고 안으로 자신을 수련하며 진상을 많이 알리고 사람을 많이 구해 자신의 역사적 서약을 잘 실현하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7/511204.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9/7/511204.html

© 1999-2026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