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수련생이 납치돼 박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거나 보게 될 때마다,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整體, 공동체)이며 우리에겐 즉시 사악을 폭로하고 억제해 수련생이 박해당하는 일을 줄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타지역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한 수련생의 소식을 듣고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전염병 봉쇄가 가장 심각했던 시기에 저는 C 수련생이 사악의 박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련생의 가족은 차를 몰고 감옥에 가려 했지만 고속도로 검문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로막혔습니다. 불법 재판에서 C를 본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수련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모두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생기는 대로 빨리 C의 시신을 확인하고 관련 책임자들을 고발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 인터넷을 통해 지역 간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중공) 악당은 많은 수련생의 신분증에 표시를 해두었기에, 일부 수련생은 사악의 감시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는 외지로 나갈 때 반드시 신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속도로 안전검사를 통과할 때 신분증을 스캔하면 바로 경보가 울려 가로막힐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수련생이 검찰원이나 감옥 같은 기관과 접촉해 본 경험이 없어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했습니다.
우리에겐 진상을 조사하고 수련생이 박해로 사망한 원인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법 집행자들이 박해 증거를 파기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수련생들과 교류한 결과, 제가 이전에 수련생 구출 과정에서 해당 감옥의 여러 직원을 접촉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사회 경험이 풍부한 S 수련생과 함께 가족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중공의 박해를 여러 차례 받았기에 이번 일이 잘못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이 시기 역사의 주역인바, 지금 사악이나 정신(正神)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당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정진요지 3-길을 바르게 걷자) 그러자 정념이 솟구쳤습니다.
S는 협력 경험이 적었기에 저는 특별히 그에게 미리 핵산 검사를 하고 차량번호 제한을 확인하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라고 당부했습니다. 고속도로 안전검사를 피하려고 일반 도로로만 가야 했기에 길에서 4~5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가기로 결심은 했지만, 저 역시 이전에 중공 악당에게 두 차례나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기에 빅데이터에 조회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매일 체온과 위치를 보고해야 했고, 직장에서도 도시를 벗어날 때 반드시 신고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상태였습니다. 가는 도중 문제가 생기면 직장에서 알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고, 나머지는 우리의 정념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가는 길은 순조로웠습니다. 도중에 검문소 하나를 만났지만 기지를 발휘해 우회했습니다. 우리는 사악이 대비하지 못하도록 미리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C가 입원해 있던 기간의 병력을 받는 것, 둘째는 검찰원에 직접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 셋째는 C의 시신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 병원에 도착해 관련 직원들에게 방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병원 직원은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병력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공적인 업무에만 제공할 뿐 개인에게는 가족이라 해도 줄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가족이 감옥 직원에게 전화했지만 그들은 병력을 줄 수 없다며 회피했습니다. 우리가 주지 못하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자, 그들은 상부 보고 후 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현지 검찰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소장을 검사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내실에서 검사에게 연락해 우리를 데리러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하자 검사는 마침 출장 중이라며 30분 뒤에 조수가 나가서 받아 가겠다고 정중히 답했습니다.
가족 수련생은 이미 70대였고 날씨는 꽤 더웠습니다. 밖에서 30분을 기다려도 조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화하자 일이 생겼으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또 30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악이 고소장 전달을 방해하려는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노수련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게 했고 그들은 또 기다리라고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 발정념을 했습니다. 2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야 조수가 나와 고소장을 받아 갔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검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목적을 밝히고 수련생의 시신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검사는 단번에 거절하며 “예약도 없이 왔고 가족은 화장 서명에 협조하지도 않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했습니다. 제가 전화를 건네받아 말했습니다. “검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조카딸입니다. 검사님을 뵙거나 친척을 만나는 데 예약이 필요한 줄은 몰랐습니다. 이모가 화장 서명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검사님의 가족이 여러 번 면회를 요구했는데도 거절당하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심지어 임종 직전에도 영상 통화조차 시켜주지 않아 마지막 작별 인사도 못 했습니다. 감옥은 늘 인도적인 관리를 말하는데 이것이 그 모습입니까?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정도 헤아려 주십시오. 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검사님의 요구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인 요구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검사는 제 말을 듣고 상의 후 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 시간 뒤 다음 날 시신을 볼 수 있으며 병력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세 가지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인터넷에서 중환자실에 있는 수련생의 소식을 보다
우리 지역 Y 수련생이 감옥의 박해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Y의 누나와 이전에 그와 협력했던 G 수련생을 찾아갔습니다. Y의 누나는 가족과 수련생들이 이미 병원을 방문했지만, 남동생만 유리창 너머로 잠깐 봤을 뿐 본인은 면회를 거부당해 몹시 원통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게 해드릴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Y의 누나는 희망을 품고 현지 수련생들과 상의했습니다. 이전에 병원을 다녀오던 수련생들이 검문소에서 가로막히고 Y의 누나도 수감될 뻔했기에, 주변에서는 그녀가 다시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단순히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Y를 만나 정념을 보태 그가 난을 빨리 벗어나게 도와야 했습니다. 저는 현지 수련생들과 여러 차례 교류하며 협력을 구했고, 결국 두 수련생이 다른 차를 타고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환경을 익히기 위해 하루 먼저 출발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검문소를 피해 일반 도로를 이용했습니다. 안전하게 도착해 병원 환경을 살피며 Y를 기다릴 수 있는 과를 파악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시간 넘게 발정념을 하고 나왔습니다. 여관에 묵는 동안 남동생의 위중한 상태와 면회 거부로 감정이 무너진 Y의 누나를 저와 G가 정성껏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 7시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두 수련생을 먼저 내려 보내 어제 파악한 장소에서 기다리게 하고 저는 주차하러 갔습니다. Y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어 작은 선물을 준비해 의사를 만나려 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와 두 수련생과 만났는데, 그들은 매우 흥분해 Y를 만난 과정을 들려주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옆에서 경찰이 Y를 데리고 타는 것을 보고 급히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출구에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상봉에 경찰도 당황해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걸어가며 대화를 나눴고 검사가 끝날 때까지 동행하며 Y에게 정념으로 고비를 돌파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주치의를 만나 Y의 상태를 묻고 그가 겪은 고난을 설명하며 편견 없이 대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 수련생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재작년 5월, 한 협조 수련생으로부터 우리 시 관할 현의 L 수련생이 베이징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다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에게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다 L의 어머니를 만나 알게 된 일이었는데, 저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L의 어머니를 만나보니 수련하지 않는 가족이 일반 변호사를 선임하고 어머니의 개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또한 현지 수련생들은 구출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예전에 협력했던 수련생들과 상의한 결과, 진상을 모르는 변호사와 가족에게만 맡기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교류해 정의로운 변호사를 선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제가 변호사를 추천했고 L의 남동생이 연락해 면회 일정을 잡았습니다.
L이 베이징에서 납치된 것은 우리에게 큰 시험이었습니다. 평소 우리는 사악을 폭로하고 가족과 함께 직접 진상을 알리며 사람을 구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 경찰을 직접 상대하거나 변호사와 동행하려니 다들 신분증 문제로 큰 부담을 느꼈습니다.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마다 검문소가 있고, 특히 중공의 양회 같은 기간에는 보안이 더욱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수련생의 신분증에는 표시가 돼 있어 조회되면 파출소로 인계되거나 가택수색, 박해를 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선임된 변호사가 처음 L을 면회하러 갔을 때 구치소 경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전에도 가족이 영치금을 넣으러 갔다가 선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베이징의 사악이 강하고 교란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위험을 두려워해 정념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사악이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변호사가 홀로 이 상황을 마주하게 하는 것은 대법제자답지 못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내일 제가 차를 몰고 가겠습니다. 변호사와 함께 면회 방해 공작을 타파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5시, 구출 경험이 없는 두 가족 수련생을 태우고 출발했습니다. 걱정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가장 바른 일을 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격려했습니다. 순조롭게 검문을 통과해 구치소 앞에서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저를 보더니 “큰 누님이 오셨군요!”라며 반가워했습니다. 협력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진상을 아는 이 변호사는 박해 반대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두려워하는 L의 어머니에게는 “직접 나서지 말고 옆에서 발정념만 하세요”라고 안심시킨 뒤 변호사와 함께 접견실로 향했습니다. 경찰은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가족의 협조 덕분에 무사히 절차를 밟았습니다. 변호사가 2시간 동안 면회하는 동안 우리는 문밖에서 계속 발정념을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베이징 모 구의 공안분국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급변해 흙먼지를 동반한 강풍이 몰아쳤습니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30분 동안 간절히 발정념을 했습니다. 변호사와 남동생이 돌아올 때쯤 비바람이 멎었습니다. 그들은 국보 경찰이 파룬궁의 합법성을 설명하는 변호사의 말을 막고 가족의 권리 행사를 포기하라며 위협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돌아와서 현지 수련생들과 이 과정을 교류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수련생들은 이후 법원 단계에서 고소 문서를 제출하고, 불법 재판 때는 관념을 타파하고 직접 베이징으로 가 발정념을 했습니다. 이런 체험이 공유되면서 더 많은 수련생이 구출 활동에 참여하게 됐고, 베이징으로 가는 것을 더는 장애로 여기지 않게 됐습니다.
지난 몇 년간 수련생의 구출 요청이나 박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저는 거절하지 않고 제 일처럼 임했습니다. 수많은 법 집행 기관을 찾아가 진상을 알리며, 처음에는 망설이고 두려워했지만 점차 이성적으로 마주하게 됐습니다. 날카로운 대치보다는 선의와 자비로 대하려 노력했습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사부님의 일깨움과 배치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원문발표: 2026년 3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3/11/50579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3/11/505796.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