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平安)’에서 생각한 점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평안(平安)’은 누구나 소망하는 것입니다. 세인들도 ‘건강과 평안’을 인생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아름다운 추구로 여기며 타인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얼마 전 어느 날, 저는 ‘평안’이 비록 사람의 외적인 상태나 처지를 말하지만, ‘평(平)’과 ‘안(安)’ 두 글자가 사람의 내면 심경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내면의 심경과 외적인 ‘평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사색에 잠겼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평(平)’과 ‘안(安)’ 두 글자는 사람의 내면 상태를 표현할 때 그 내포가 매우 풍부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자연히 건강하고 평안해질 것입니다. 신이 전해준 한자는 정말로 공을 많이 들였으며 박대정심(博大精深)합니다.

1. ‘평(平)’자에서 생각한 점

‘평’자에서 저는 우선 ‘심평기화(心平氣和)’를 떠올렸습니다. ‘심평(마음이 평온함)’해야 ‘기화(기가 조화로움)’할 수 있습니다. 내면이 평온하지 않으면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반드시 평온하지 않습니다. 수련자로서 평온함은 우리가 반드시 도달하고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나는 항상 이런 이치를 말하는데, 바로 우주 중의 일체는 모두 평온한 것이다”(스위스법회 설법)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면이 평온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평’자의 또 다른 두 층의 내포인 ‘평형(平衡·균형)’ 및 ‘평정(平靜)’과 관련이 있다고 체득했습니다.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한 가지 원인은 마음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법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 질투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 ‘질투심’ 단락에서 마음의 ‘불평형’ 상태를 여러 차례 언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그 마음속은 평형을 이루지 못해 위아래로 다니며 불평하는데,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질투심은 사람의 마음속 균형을 깨뜨립니다. 도덕이 날로 실추되는 현대 사회에서, 중공 문화(당문화)에 심령이 침식된 사람들은 이미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며 투쟁, 비교, 질투를 예사로 여깁니다. 이른바 ‘투지투용(鬪智鬪勇)’, ‘부러움, 질투, 증오’ 등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입버릇이 돼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진정으로 갖춰야 할 상태가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면이 평온하지 않은 또 다른 원인은 마음이 평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평정해지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을 유지해야 하며, 어떤 교란도 영향을 받지 않고 내면을 잔잔한 수면처럼 유지해 물결이 일지 않게 해야 합니다. 법을 통해 우리가 마음을 고요(靜)하지 못하게 하는 교란 중 일부는 외부에서 오지만, 더 많은 것은 사람 내면의 집착, 칠정육욕, 내려놓지 못하는 각종 욕망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현대인과 현대 사회는 보편적으로 조급해 전통문화 속의 수양과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수신양성(修身養性)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자아와 사욕을 방종하며, 쉽게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기에 ‘마음이 고요함(心靜)’의 경지와는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평(平)’자에 대한 해석은 ‘평(平)은 어평서야(語平舒也)’라고 해, 사람이 말할 때의 어조가 평온하고 완만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전통문화 속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상태입니다. 내면이 평온하고 조급하지 않으며 타인을 존중해야만 ‘어평서야’를 할 수 있는데,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입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현대인이 걸핏하면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말투가 뒤틀려 있거나 냉소적이며, 감정을 배설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욕설을 내뱉는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상황입니다. 이를 통해 도덕이 타락한 세인들은 수구(修口)할 줄 모르고 수심(修心)할 줄은 더더욱 모르며 곳곳에서 ‘불평(不平)’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찌 ‘평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내면이 청정하지 못하고 평정하지 못한 것이 단지 개인의 심성 경지가 부족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보편적으로 이 상태에 진입했을 때 인류 사회에 위험을 가져다준다고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평화’와 ‘평정’을 잃는 것은 바로 ‘평안’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2. ‘안(安)’자에서 생각한 점

‘안’자에서 저는 ‘안심(安心)’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안심은 공자가 말한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우불구(不憂不懼)’ 할 수 있을까요? 공자는 “안으로 반성해 부끄러움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부끄러움이 없고 득실과 영욕을 가볍게 보며 심지어 생사를 내려놓는다면 자연히 근심도 두려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수련 중에서 저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에 집착하며 늘 다른 사람이 어디가 잘못됐는지만 주시하곤 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서 제 수련에 영향을 주거나 법을 실증하는 일, 혹은 가족 관계 등에 영향을 줄까 봐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목이나 수련과 법 실증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필사적으로 타인을 변화시키려 했을 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매번 다툼과 갈등의 고조로 끝났고, 결국 상대방을 전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발견하며 끝이 났습니다. 이때 제 내면은 다시 불안해졌고 ‘이대로 가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했으니, 공자가 말한 군자의 경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오랫동안 내면의 불안 상태에 처해 있었던 이유가 늘 밖을 보았기 때문이며,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지 않았고 진정으로 사부님과 법을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주변 수련생들과 협력하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들은 우리에게 제공된 수련 환경이자 우리 자신의 수련 제고의 길이며 타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이 잘하고 심성이 대법이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한다면 앞길은 거침없이 통할 것이며, 우리가 상상하는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나에게 연루돼 영향을 줄 것’이라는 등의 우려 상황(본질은 사심)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번거로움이나 어려움을 만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심성 어딘가에 문제가 생겨서 제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으로 찾아 자신이 어떤 집착을 드러냈는지 보고, 그것을 닦아버리려 노력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순정하게 해 대법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겉보기에 다른 사람의 원인으로 자신이 매우 고통스럽다면, 그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업력을 갚아야 하는 것이며 원인 없는 일은 없습니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역시 이익에 대한 사심을 내려놓지 못해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명백히 안 후에는 더는 안심하기 위해 밖으로 타인이 잘하기를 추구하지 않게 됐습니다. 타인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외부 요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인데, 여기에 집착하면 너무나 힘들고 마음속에 원망이 생겨 자신을 매우 피동적인 순환에 빠뜨리게 되며 점차 자신의 본심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이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함정입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안’자의 또 다른 내포는 ‘심안(心安)’, 즉 내면이 자족하고 구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옛사람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처지에도 마음을 편히 하며 도를 닦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음)’를 고상한 처세 경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정반대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음’,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인생의 의미와 추구로 여깁니다. 물론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높은 곳’이란 도덕 수양을 끊임없이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거의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받드는 기준이 돼, 인생의 의미가 분투와 노력에 있다고 믿으며 각종 목표를 위해 헛되이 애를 씁니다. 가계를 꾸리든 자녀를 위해서든 부모를 봉양하든 거의 모두 물질적 부로 가치를 측정합니다. 만약 누군가 현실에 안주한다면 ‘향상심이 없다’거나 ‘장래성이 없다’는 취급을 받습니다.

수련 후에 우리는 사람의 일생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사람마다 타고난 복덕과 업력은 모두 전생에 심은 인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의 일생을 바꾸고 싶다면 오직 수련이라는 한 갈래 길, 즉 심성과 도덕을 높이는 길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인이 명리와 이익을 위해 다투고 심지어 부도덕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업을 짓는 것이며, 이는 생명을 타락시키는 것이지 승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옛사람들이 말한 ‘안빈낙도’가 소위 향상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덕을 지키고 천명을 알며 고상한 도덕과 정신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무신론의 주입하에 윤회와 인과를 믿지 않고, 마음속에 불만을 품은 채 운명과 맞서 싸우며 중공 문화 속의 ‘인정승천(人定勝天,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 있다)’, ‘하늘과 땅과 싸우다’를 믿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도덕은 추락하고 복분은 다 사라졌으며 업은 하늘에 닿을 듯 커졌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천재인화(天災人禍)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위험과 액운입니다.

대법제자는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는 중에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로 평안을 보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즉 내심으로부터 중국공산당(중공)의 당·단·대 조직 탈퇴(삼퇴)를 하면 말세에 도태를 면하고 평안하게 재난을 넘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인들이 삼퇴를 한 후에는 생명의 근본이 중공 악당의 ‘가(假)·악(惡)·투(鬪)’에서 멀어지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알게 됩니다. 파룬따파는 사람에게 선을 가르치며, 세인의 내면이 우주 특성인 ‘진선인(眞·善·忍)’에 순응해야만 내면의 ‘평(平)’과 ‘안(安)’에 도달할 수 있고, 그래야만 정말로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복과 화를 어찌 짐작하기 어렵겠습니까? ‘삼퇴로 평안을 보전한다’는 말은 참으로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3. 자신의 수련 여정에서 생각한 점

생활 속에서 수련하고 고비를 넘길 때를 돌아보니, 아주 오랜 시간 제 내면은 ‘불평’과 ‘불안’의 상태였습니다. 정(情)과 이익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 늘 자신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고, 마음속의 불균형과 억울함 때문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습니다. 다투고 빼앗으며 득실에 연연하고 강렬한 원망에 통제돼 마음이 매우 답답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원망이 증오로 변해 보복하려는 마음까지 생겼고, 자신이 받은 고통을 저를 해친 사람에게 되돌려주어야만 마음이 ‘통쾌’할 것 같았습니다. 비록 법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심성은 오랫동안 제고되지 않았고 수련자가 갖춰야 할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법을 외우는 중에 ‘업력의 전화’ 단락을 외우게 됐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일거사득(一擧四得)’의 법이 제 마음을 확 트이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더는 세인과 따져서는 안 되며 세인과 같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무슨 수련자이겠습니까? 저는 내면을 살폈습니다. 저의 목적이 사람들 속에서 이득을 얻는 것입니까? 사람들 속에서 ‘강자’가 되는 것입니까? 손해를 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련 중에서 제고를 얻는 것입니까? 만약 제 목표가 심성을 높이는 것이라면 다른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갈등 속에서 제가 제고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일이 아닙니까? 법공부를 그렇게 오래 했는데 어째서 여전히 사람들 속의 그런 집착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제가 그동안 법공부와 착실한 수련을 따로 떼어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책은 아주 익숙하게 읽었지만 실천 속에서 심성을 연마할 때는 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 못했고 대법의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사람의 것을 구하려 했고 고생하기 싫어했으며 인내하려 하지 않았고, 대법과 수련을 차순위에 두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고심해 안배하신 제고의 기회들을 매번 저버렸던 것입니다.

한번은 사부님의 ‘전법륜’ 중 ‘질투심’ 단락을 공부하며 자신을 대조해 보았을 때, 당시 저는 매우 힘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힘들고 지친다고 느끼는 것 역시 질투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힘들고 더 지친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고, 억울함을 느끼며 자신이 이런 ‘힘듦과 지침’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담담하고 원망하지 않으며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가벼움을 느껴야 합니다. 마음속의 ‘힘듦과 지침’ 역시 일종의 바르지 못한 상태인데 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자신이 ‘헌신’을 많이 해서 생긴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런 생각이나 상태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단번에 가벼워졌고 더는 힘들거나 지치지 않았습니다.

심성이 어느 정도 제고된 후 제 정서도 점차 안정됐고, 가족과 ‘이성을 잃고’ 다투는 상황도 줄어들었습니다. 내면에 그토록 많았던 질투, 원망, 쟁투심이 사라지자 더욱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대법은 끊임없이 제 내면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저는 수련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체득했으며 가족과의 사이도 더욱 화목해졌습니다.

제 내면이 그런 평온한 상태를 체득할 수 있게 됐을 때,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평(平)’과 ‘안(安)’의 이런 심경, 그리고 그것과 사람의 평안의 관계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저는 이 두 글자가 바로 제가 오랫동안 해내지 못하고 잘하지 못했던 부분이며, 바로 저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지금 비록 좀 나아졌지만 아직 완전히 해내지는 못했으며, 대법과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비하면 아직 너무나 멀었고 정진하는 수련생들에 비해서도 차이가 큽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와 수련생들의 포용에 감사드리며, 저는 계속 정진하고 대법을 확고하게 수련해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개인 수준에서의 소견이므로 부족한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이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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