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6년에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에 입문했습니다. 지난 세월 제가 걸어온 수련의 길을 되돌아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의 향상은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일깨움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몇 가지 체험과 잘한 부분들을 적어 수련생들과 교류하고 사부님께 보고드리며, 이를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과 사부님의 위대함을 실증하려 합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저는 한 초등학교 교사이며, 올해 만 62세입니다. 1960년대에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비록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근면하고 선량한 분들이셨고, 아버지는 사숙(私塾)에서 글을 배운 적이 있으며, 두 분 모두 전통적 관념이 깊어 신불(神佛)의 존재를 믿고, 선한 일은 선한 보답이 있고 악한 일은 악한 업보가 있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또한 저희 남매에게도 “작은 이익을 탐하면 큰 손해를 본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왜 작은 이익을 탐하면 오히려 큰 손해를 본다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전법륜(轉法輪)’을 본 뒤에야 그 속에 담긴 내포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 시절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매우 강했지만 저는 예외였습니다. 위로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온 가족은 오히려 딸이기를 바랐고, 이름도 미리 지어 두었습니다. 저는 섣달 초여드렛날 밤에 태어났는데, 그 전날인 초이렛날은 몹시 추워 매서운 바람에 눈발까지 날렸습니다. 그런데 초여드레가 되자 바람도 눈도 그치고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아이는 복이 많다”고 하셨고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뒤 가족들은 모두 무척 기뻐했고 아버지도 딸을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온 가족의 환영 속에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로는, 제 어린 시절에는 목숨을 잃을 뻔한 큰 고비가 세 번 있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였을 때는 홍역 비슷한 발진이 크게 나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고, 조금 자라서 혼자 걸어 다닐 무렵에는 어머니가 바빠서 잠시 저를 보지 못한 사이, 길가에서 혼자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돼지가 코로 미는 바람에 깼습니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살짜리 남자아이가 돼지에게 물려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또 열 살쯤 됐을 때는 산골짜기에서 장작을 줍다가 늑대를 만났는데, 늑대가 저를 둘러싸고 세 바퀴나 돌았습니다. 저는 겁에 질려 어머니를 크게 불렀고 어머니는 제 목소리를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늑대는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어머니가 가까이 오시자 그제야 꼬리를 사리고 산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는 늘 “네 목숨은 질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뒤에야 제가 태어날 때부터 사부님께서 이미 저를 보호해 오셨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행운처럼 대법을 얻다
저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유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강한 편입니다. 성격은 내향적이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조용히 책 읽는 것을 즐겼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일하시던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이후 저는 사범학교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는 고향의 학교에 배치돼 교편을 잡았습니다. 결혼할 때는 주택까지 배정받아 또래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남편은 성실하고 능력 있으며 저를 각별히 아껴 주었습니다. 그 후 태어난 딸은 총명하고 활발하며 참으로 사랑스러웠습니다.
1995년, 저는 남편의 직장 이동을 따라 새로운 지역, 새로운 학교로 오게 됐습니다. 1996년 5월, 동료의 추천으로 저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접하게 됐습니다. ‘전법륜’을 읽은 후, 저는 인생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많은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인생의 등대를 찾았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됐습니다.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의 길 위에 발을 디디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억만 년 동안의 윤회 속에서 기다려 온,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을 마침내 찾게 된 것입니다!
대법 책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신화 이야기나 수련에 관한 책을 좋아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수련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법륜’처럼 사람을 선하게 만들고 수련할 수 있게 하는 천서(天書)를 읽은 뒤에는 손에서 놓을 수 없었습니다. ‘전법륜’을 여러 번 읽는 동안, 책장에서 오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거나, 글자가 커지거나 굵어지고, 혹은 색이 변하는 현상이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저는 놀라서 “이건 정말 보물 같은 책이구나!”하고 감탄했으며, 이것이 사부님께서 제가 잘 수련하도록 격려해 보여주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파룬따파를 굳건히 수련하며 반본귀진의 수련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수련을 통해 남편을 따라 직장을 옮기게 된 일부터 대법을 만난 것까지 모두 사부님의 세심한 안배였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롭고 고심한 제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련 후의 변화
대법을 처음 얻었을 때 저는 막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였고, 젊고 건강했으며 일도 안정적이고 가정도 화목했습니다. 수련 후 저는 겉으로 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했지만 세계관이 크게 뒤바뀌고 사상 경지가 높아지면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예전의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약간 도도한 면이 있었으며, 일이 생기면 쉽게 긴장하고, 사소한 것도 따지며, 모든 것을 저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수련한 후에는 성격이 밝고 너그러워졌고, 일이 생겨도 긴장하지 않으며 상대를 먼저 생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신도 맑고 힘도 넘치며 생활은 충실하고 즐거웠습니다. 일터에서도 개인적인 손익을 따지지 않고, 명예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묵묵히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고, 언제나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으로 저 자신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대법은 저에게 지혜를 주셨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업무 능력이 점점 향상됐습니다. 저의 변화는 주변 환경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더 철이 들고, 싸우거나 다투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정말로 ‘전법륜’의 구절처럼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다(佛光普照, 禮義圓明)”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의 저는 억누르고 꾸짖는 방식으로 반을 관리했지만, 수련 후에는 인내심과 사랑이 생기고 말투도 부드러워졌습니다. 공부를 못하거나 장난이 심한 학생에게도 차별하거나 비웃거나 좌절시키지 않고, 진심과 선한 마음으로 교육하고 감화시키려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자주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해주며, 사람은 성실하고 선량하며 너그럽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도와야 한다, 부모님이 어렵게 공부시켜 주는 만큼 열심히 배워 부모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수업 중에도 진선인의 법리로 아이들을 이끌어 좋은 사람이 되도록 지도했습니다. 그 결과 학급 기강이 좋아졌고 학습 분위기도 매우 진지해졌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가 뒤처진 친구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며 격려 중심의 방식으로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책, 공책, 펜 같은 작은 선물을 준비해 성적이 뛰어난 학생, 발전이 있는 학생,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학생을 적절히 칭찬하고 격려했습니다. 또한 학급비로 학습용 도서(자전, 사전, 성어 이야기, 각종 이야기책, 작문 관련 책)를 구입하고, 학습 신문도 구독해 교실 한쪽에 비치했습니다. 책 읽기와 배움의 분위기를 조성해 학생들이 여가 시간에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제가 맡은 반은 규율이 좋고 반 분위기도 바릅니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우리 반에서 수업하길 좋아했고, 특히 여러 활동을 할 때면 학생들이 과목 선생님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줬습니다. 학기말 전교 통합시험에서는 우리 반 성적이 항상 상위권이었고, 학교에 많은 명예를 가져다줘서 학교와 학부모들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중공(중국공산당) 악당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3년 연속으로 우수 교사, 중견 교사로 선정됐고, 제가 쓴 교육 논문도 성(省) 단위에서 3등상, 1등상을 받아 지역 교육위원회에 명예를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이런 성과들이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평범하고, 이기적이고, 보잘것없는 저였을 것입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은 제자들에게 사회에서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사부님의 요구와는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학생 이야기
학생 중에 샤오잉(小影)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샤오잉의 아버지는 늘 외지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함께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샤오잉은 늘 울먹이고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가끔 지각도 하고,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기운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후 저는 그녀를 챙기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너희 엄마는 돌아오실 거야. 한 달만 지나면 돌아오실 거야. 너를 두고 못 떠나실 테니까.” 제 말을 들은 샤오잉은 마음이 한결 나아졌고, 이 이야기를 오빠에게도 말했습니다. 한 달 후, 정말로 샤오잉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샤오잉의 아버지는 이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오전, 제가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한 중년 남성이 교실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그에게 다가가 “누구를 찾으세요?”하고 묻자, “저는 샤오잉의 아버지입니다. 샤오잉을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샤오잉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며, “정말 너무해요! 창피해서 말도 못 합니다. 돈을 들고 딴 사람과 도망갔는데, 돈을 다 쓰고 나니까 다시 돌아왔어요. 저는 샤오잉 엄마와 이혼하려고 합니다. 샤오잉에게 누구를 따라갈지 물어보려고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번 한 번만은 샤오잉의 엄마를 용서해 주라고, 이혼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샤오잉은 아직 어린데 엄마 없이 자라는 건 너무 가엾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샤오잉의 아버지는 제 말을 듣고 샤오잉의 엄마와 이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샤오잉과 오빠는 제게 많이 고마워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일을 나눠 맡겼는데 그 소식을 들은 샤오잉의 오빠가 일부러 저를 돕겠다고 달려와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또 샤오창(小强)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전학을 와서 제 반에 들어오게 된 아이였습니다. 당시 국장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과잉행동장애가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말도 많고 움직임도 많았습니다. 기초도 많이 부족하고 장난이 무척 심해서 반의 질서를 흐리고 다른 학생들의 학습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적에도 영향을 주니 다른 반 선생님들은 이런 학생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똑같이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를 맡은 뒤에 많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집안 배경을 믿고 버릇도 없고, 말도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교육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샤오창의 어머니와 상담을 하며 실제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어머니는 “저도 배운 게 별로 없어서 아이를 봐줄 수 없어요. 아이에게 큰 기대도 없고 글자만 좀 알면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다시 설명했습니다. “샤오창은 머리가 좋고 영리한 아이예요. 다만 말이 많고 움직이기 좋아해서 그렇지요. 기초가 부족하다 보니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더 산만해지는 거예요. 예전 내용을 좀 보충해 줄 수 있는 과외 선생님을 구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제야 어머니도 동의했습니다. 그 후 샤오창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저는 바로 칭찬해줬고,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를 도와주게 했습니다. 그러자 점차 그는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성적도 꽤 좋아지고 행동도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샤오창의 어머니는 제게 정말 고맙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1년 후, 샤오창의 집이 이사를 가면서 그는 다시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어느 해 기말고사가 끝난 뒤 샤오창이 아주 기쁜 목소리로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저 수학 78점 맞았어요!” 저는 전화로 그를 칭찬해 주며 계속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어떤 선생님들은 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자퇴시키거나 시험에 아예 못 나오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흐름에 휩쓸릴 수 없었습니다. 성적이 낮다고 학생을 차별하거나 상처 주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가 조금 부족한 학생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돼. 할 수 있는 만큼만 열심히 하면 돼.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으면 선생님이 바로 칭찬해 줄게.” 그렇게 하다 보니 아이들은 부담 없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반 전체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공부하는 좋은 습관을 갖게 됐습니다.
2000년 겨울방학 때, 저는 혼자 베이징으로 올라가 파룬궁을 위해 청원했다가 불법으로 구금된 적이 있습니다. 같은 해 6월 중순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파출소 담당 경찰이 집으로 와서 또 괴롭혔습니다. 그는 제게 “베이징에 갈 건가?”라고 물었고, 저는 “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다시 불법적으로 보름 동안 구금됐습니다. 7월 초에 치러진 통합시험에서, 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반 성적이 1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놀라워했습니다. 시험 전, 학생들은 제가 또 불법 구금됐다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 반의 서른 명이 넘는 학생들이 생활용품과 먹을 것을 사서 저를 면회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구치소 경찰이 면회를 허락하지 않자 아이들은 구치소 마당을 둘러싸고 서서 버티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치소 책임자가 교장에게 전화를 했고, 교장이 직접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교장은 몹시 화가 났고 어떤 아이들은 혼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알게 됐을 때 저는 오전 내내 울었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눈물이 납니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제 아이들 같았습니다. 그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었습니다. 학생들도 제가 좋은 선생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구금돼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한 명의 여자아이, 샤오옌(小炎)이 있었습니다.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친구들을 잘 도와주고 성격이 활발하고 시원시원한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고 반장도 맡겼습니다. 샤오옌은 반일을 아주 책임감 있게 했고 공부도 무척 열심히 했습니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나고 샤오옌은 외지로 시집가서 이제는 아이도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늘 저를 기억하고 있었고 친구를 통해 저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통화를 하는데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샤오옌이 울었고,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고, 고등학교에 떨어져 사회에 나가 일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안정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저처럼 대해준 선생님은 없었다며 마치 엄마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반장을 맡겨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고, 이는 이후의 일과 삶에 큰 도움이 됐다며 고마워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제 근황을 간단히 이야기했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통화했고 저는 샤오옌에게 파룬따파 진상과 왜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를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삼퇴에 동의했고 아이도 소선대에서 탈퇴시켰습니다. 설날이 되자 그녀는 특산품을 사서 친구에게 맡겨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예전에는 학부모가 주는 선물을 모두 사양했지만 이번에는 받았습니다. 이것은 샤오옌이 오랫동안 저를 기억해준 정성과 진심이 담긴 것이고, 저의 신앙에 대한 인정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족의 위챗을 통해 그녀 아이에게 용돈을 보냈지만 샤오옌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이 다른 방식으로 답례했습니다.
진상을 알게 된 교장
그 당시 여교장은 저보다 몇 살 많았고, 젊고 아름다우며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의욕적이었고 저의 교육 능력과 인품을 깊이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1999년 7월, 박해가 시작됐을 때 그녀는 제게 대법 책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저는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번 저를 불러 이야기하며 많은 질문을 했고, 저는 대법에서 배운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답해 주었습니다. 이후 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그녀는 당시 국장으로 있던 남편을 데리고 우리집에 찾아와 제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저를 설득했지만 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000년 1월 초, 저는 혼자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다가 현지 베이징 사무소에 일주일 동안 불법으로 구금됐습니다. 이후 현지 공안국 경찰에게 넘겨져 두 달간 계속 불법 구금됐습니다. 이 일로 교장도 연루되어 반성문을 쓰고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같은 해 6월 중순, 저는 다시 불법 구금됐습니다. 제가 맡은 5학년 학생들이 구치소에 저를 면회하러 왔습니다. 당시 교장은 매우 화가 나 있었고, 제가 나온 뒤 한 달 치 월급을 삭감하고, 저를 후방 업무로 배치해 화장실과 복도 청소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원망하지도, 낙담하지도 않고 여전히 묵묵히 맡은 일을 해냈습니다. 이 기간 교장은 여러 동료를 보내 제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설득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불가(佛家)에서 수련하는 고덕대법(高德大法)이며,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하여 좋은 사람 중의 좋은 사람이 되어 사회에 백 가지 이로움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초등학생조차 ‘진·선·인’의 반대말은 ‘가·악·투(假惡鬪-거짓·악·투쟁)’임을 압니다. 진·선·인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고, 가·악·투를 따라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선과 악, 정(正)과 사(邪)는 한눈에 드러납니다.”
그때는 제게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갓 63세가 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마음의 고통, 사회의 공포 분위기, 가정의 시련, 직장의 긴장과 압박 등 모든 것이 겹쳐 있었습니다.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고, 마음속에 대법이 없었다면 저는 정말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 제가 대선대인(大善大忍)으로 행동한 것이 교장을 감동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해 여름, 그녀는 제게 치마 한 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새해가 되고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문제아가 많은 반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를 다시 교사로 배치해 그 반을 맡게 했습니다. 저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니 그 반의 성적이 다른 반을 능가했습니다. 몇 년 후 그 교장은 전근을 갔습니다. 저는 그녀가 이미 진상을 이해하게 됐음을 알았습니다.
2008년, 중공이 올림픽을 개최할 때 저는 또다시 납치됐고, 불법으로 5년형을 선고받아 우리 성 여자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사람의 마음, 사람의 생각, 사람의 정에 너무 얽매여 있었고,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바로 다음 날, 그 교장은 여자감옥에 있는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저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척은 여자감옥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고, 저를 묵묵히 돌봐 주었습니다. 제가 진상 편지를 그녀에게 전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녀들에게 매우 감사했습니다.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녀들이 틀림없이 좋은 미래를 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사부님의 보호와 배치였음을 깊이 깨닫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평범한 노동자였지만 교양이 있고, 책도 좀 읽으신 분이라 선악과 시비를 분별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중공 악당이 파룬따파를 박해한 후 제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자 원래 화목하던 가정이 계속 다투게 됐고, 아버지에게는 두려움과 불안만 더해졌습니다. 온종일 걱정하며 지내셨지만 그럼에도 제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이건 하나의 운동일 뿐이야. 문화대혁명 때처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1월 초, 제가 혼자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다가 두 달 동안 불법적으로 구금됐는데, 마침 그때가 설 명절 직전이었습니다. 사악은 저를 ‘전향’시키겠다며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노부친과 어린 딸을 구치소로 데려와 저를 흔들어 놓으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딸아이는 계속 “엄마 집에 가! 엄마 집에 가!”하고 울며 매달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가슴이 칼로 베이는 듯 너무 아팠습니다. 남편은 제 앞에 무릎까지 꿇고 파룬따파 수련을 포기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족 정(情)을 통한 시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대법의 소중함을 더욱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왈칵 납니다. 아버지는 제가 처한 상황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아셨고 늘 저를 걱정하셔서 아예 우리집에 머물며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박해가 가장 심하던 때, 국의 간부들은 남편의 일을 중단시키고 집에 있게 하면서, 저를 온종일 감시해 법공부와 연공을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제가 숨겨둔 ‘전법륜’을 발견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태우자니 업보가 두렵다며 아버지에게 들고 가 태워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책을 태우지 않고 숨겨두었다가 다시 제게 돌려주셨습니다. 2006년 7월 말,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발병해서 돌아가시기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큰 고통도 없이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저를 걱정하는 마음을 품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연세가 겨우 일흔셋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쯤 됐을 때, 아버지는 친척의 꿈에서 나타나 제가 수련하는 이 공법이 정말 좋다고, 저보고 잘 수련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미 금사다리 위에 올라 있어서 이제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고, 우리 자매들도 함께 수련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가 왜 꿈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큰 난관을 겪게 될 걸 보시고 미리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저는 또다시 불법적으로 납치돼 5년형을 선고받았고 직장에서도 강제로 해고됐습니다. 감옥에서 당한 고통과 수모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출소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여러 번 제게 정진하라고 일깨워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댁 식구에게 진상을 전하다
수련하기 전 저는 건강했지만 차멀미가 심해 차를 타면 항상 겁이 났습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속이 뒤집혀서 엉망진창으로 토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수련한 후, 어느 순간부터 차멀미가 없어져 어떤 차를 타도 멀미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어느 날 넷째 시누이를 만났는데 그녀는 차멀미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차멀미했어, 아주 심하게 했지.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 멀미가 없어졌어.” 그러자 그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좋아졌는데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수련을 해서 좋아진 거야.”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제가 왜 우월한 조건을 포기하면서까지 수련을 계속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시댁 식구들에게 진상을 전했습니다. 파룬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선인을 따라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고덕대법이며, 수많은 이로움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고, 수련하는 사람은 누구든 혜택을 받고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시누이의 시누이에게도 진상 방송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들은 진상을 이해한 후, 모두 삼퇴를 했습니다. 둘째 시누이와 셋째 시누이도 수련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두 시동생과 두 올케도 삼퇴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모두 저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대법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지금 남편은 대법의 진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저의 수련을 지지하며, 중공 간부들의 괴롭힘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됐습니다.
사부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악의 소굴에서 나온 후 집안의 시련이 매우 컸습니다. 큰 고난을 겪은 뒤 다시 작은 고난 속으로 들어온 저는 결국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련생의 도움으로 저는 외지에 있는 A 수련생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는데, 혼자 사는 A는 사심 없이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제가 와서 그녀에게 많은 불편을 끼쳤습니다. 그녀의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검소했습니다. 한 번 밥을 지어 하루나 이틀 먹고, 반찬은 만들지 않고 절인 채소를 먹으며 시간을 오로지 세 가지 일에 쏟았습니다. 저는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저 자신과 A 사이의 차이도 볼 수 있었습니다.
A는 천목(天目)이 열린 상태로 수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꿈을 꾸었는데, 우리 지역 사람들이 저를 찾으러 그녀 집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떠난 후, 제 고향 파출소 담당 경찰, 국보, ‘610’, 정법위원회, 주민센터에서 저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금 두려워하며, 제게 전화를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외출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외출하면서 저를 집 안에 두고 문을 잠갔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수련을 하지 않아 제 존재를 알게 될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떠난 후 저는 문 뒤에서 빨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녀가 돌아온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곧 누군가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참 열어도 열리지 않았고, 낯선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 왜 안 열리지? 이 열쇠가 맞는데.” 한참을 열어보려 했지만 열리지 않자 떠났습니다. 저는 문 뒤에서 긴장하며 숨을 죽였습니다. A의 가족이 아마 무언가를 가지러 온 것 같았습니다. A는 여러 차례 불법 구금, 강제노동, 판결을 받았고, 박해로 몇 번이나 생명이 위독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정과 안정된 일자리도 잃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를 위해 큰 감당을 하고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그녀를 매우 엄격히 보호했습니다. 사부님은 저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녀의 가족이 열쇠를 가지고도 문을 열 수 없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사부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고,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맺음말
저는 거의 30년 가까이 대법 속에서 수련해왔습니다. 대법이 저를 만들어주고 단련시키고 정화하며 완성시켜 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수련해온 모든 순간마다 사부님의 보호가 함께했음을 느낍니다. 감사한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 마음을 담아 수련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며,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를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에 감사드리며,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도움에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님께 큰절 올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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