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제가 타지에서 일하다 돌아온 지 3년이 넘었습니다. 이 3년 동안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일과 변화가 일어났기에, 이 기간의 수련 경험과 보고 깨달은 바를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수련 상태를 점검하고, 어떻게 사람마음을 찾고 제거했는지 그 과정을 돌아보며, 법회라는 소중한 장을 빌려 상태를 조정하고 언행을 바로잡아, 집착을 제거하고 다시 제고하고자 합니다.
1. ‘근본 집착’에 관한 한 차례 교류
한번은 수련생과 ‘근본 집착’을 주제로 교류했는데, 그가 한 말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걸어온 길을 반성해 보니, 진정으로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안으로 찾다(向內找)’에 도달하지 못했고 자신의 많은 집착을 덮어 감췄으며, 특히 아직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낡은 악의 세력이 대법(大法)을 박해하는 가장 큰 구실 중 하나가 바로 당신들의 근본적인 집착이 덮어 감춰진 것임을. 그리하여 이 난을 더 크게 해서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그는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구체적인 집착을 찾는 것도 비교적 피상적이었고, 장기간 수련의 병목 현상을 초래해 아무리 수련해도 돌파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문제가 쌓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도리어 구세력이 박해 구실로 이용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에서 근본 집착이 발생하는 원인과 해악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몇 년을 보면서도 진정한 함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기간 그는 계속 법을 외우고 법공부를 했으며, 명혜망에 실린 수련생의 교류 문장 ‘본질적인 변화만이 사악을 타파할 수 있다’(https://www.minghui.or.kr/archives/xiulian/148311)를 보았고, 또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경문을 반복해서 공부했습니다. 그제야 근본 집착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깊은 인식을 하게 됐고, 자신의 근본 집착을 진정으로 찾게 됐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련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동경과 소원을 실현하려는 것, 즉 생로병사의 윤회와 고통에서 해탈하여 부처의 큰 자유자재함[大自在]을 성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우주 생명의 근본 속성인 사(私)에 기초한 수련이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을 성취하라는 요구와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대법을 이용해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은 일종의 죄악입니다. 이런 근본 집착을 가지고 대법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신우주 생명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인식에 대해 저도 동감합니다. 저는 원래 줄곧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고 있었는데, 당시 자신의 근본 집착은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라고 확정했습니다. 돌발 사건 때문에 직장에서 면직됐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일반 직원으로 변해버렸으니, 그 커다란 낙차와 쓴맛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출근길에 내디디는 발걸음마다 아주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동료와 마주치지? 어떻게 인사하지?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진심일까?’ 등등의 질문이 마음을 휘감았습니다. 동시에 직장 내에는 백안시하는 사람,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 비꼬고 풍자하는 사람, 비웃는 사람 등 온갖 풍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저는 법을 얻었고, 머리를 파묻고 법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명리의 얽힘과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은 셈이었기에 근본 집착이 명리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명리심은 물론 제거해야 하지만 근본 집착에도 뿌리가 있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뿌리를 캐내고 근원을 찾아 철저히 베어버림으로써 그 근본 집착이 더는 발붙일 곳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때 저는 상실감이 매우 컸고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었기에, 법공부는 순전히 의지처와 정신적 기탁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법공부를 하면 조바심이 사라지고 조용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부 사람들도 제가 담담하게 내려놓았기에 기공을 연마한다고[사실 파룬궁은 불법(佛法) 수련입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 속마음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전혀 담담하게 보지 못했고 더욱이 내려놓지도 못했으며, 단지 겉으로만 태연한 척했을 뿐입니다.
당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나는 이미 대법을 얻었는데 너희가 날 어쩔 수 있는가?’ 대법으로 자신의 상실감을 덮어 감춘 것입니다. 대법을 통해 정신적 위안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잘못인데, 계속해서 대법을 이용해 집착을 덮어 감추는 것은 잘못 위에 잘못을 더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강렬한 추구심, 명리심, 체면, 덮어 감추려는 마음, 경쟁심, 쟁투심, 대법의 힘을 빌리려는 더러운 생각 등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사용하고, ‘나’의 수요를 채우며, ‘나’의 곤란을 해결하려는 뿌리와 근본은 모두 ‘나’를 둘러싸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 뒤에 숨어 있는 큰 녀석은 바로 ‘사사로움(私)’인데, 그것이 바로 제가 파내야 할 근본 집착의 ‘뿌리’입니다. 병통(病痛)에 시달리거나 몸이 좋지 않아서든, 혹은 기타 원인으로 들어왔든 간에, 모두 대법을 이용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려 하고, 무엇을 얻으려 하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면 그 실질은 모두 ‘사사로움’이 머리에 있는 것이니, 이런 것들은 모두 마땅히 닦아버려야 합니다.
물론 자신에게 존재하는 다른 집착과 관념들도 모두 ‘사사로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컨대 기세가 등등하고 다투는 것은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함이고, 수구(修口)하지 않는 것은 말로 남을 이겨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며, 설사 이치에 맞지 않아도 말로는 손해 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다른 수련생을 좋지 않게 보고 원망하는 것은 수련생이 번거로움을 끼쳐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중공 악당의 당문화(黨文化) 9대 유전자의 실질은 바로 폭력을 숭상하고 자아를 방임하는 것으로, 핵심은 이기적이고 사적인 것입니다. 온갖 집착은 모두 사아(私我)를 둘러싸고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구우주가 편이되고 멸망하게 된 원인입니다. 신우주가 어떻게 사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생명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2. ‘불쑥 튀어 나온 정(情)’에 갇히다
제가 ‘불쑥 튀어 나온 정’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내와 이혼한 지 이미 10여 년이 됐고 아이가 줄곧 그녀 곁에 있었기에 아이에 대한 정이 아주 담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수련생이 아이에 관해 물으면 저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의 귀속이 있는데 제가 어찌 좌우하겠습니까, 사람마다 각자 운명이 있지요.” 속으로는 때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 조건으로는 아이가 곁에 없는 게 더 낫다. 게다가 수련인이 어찌 자녀의 정에 얽매이겠는가?’
아이를 대하는 제 태도에 대해 이해하는 수련생도 있었고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수련생도 있었지만, 저의 실제 처지는 인위적으로 난을 더하거나 곁가지를 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억지로 추구하느니 순리대로 하는 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자연히 다시 만날 것이고, 인연이 다했으면 굳이 서로 얽매일 필요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저는 이런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정이 아주 담담하고 또 담담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올해 아이의 대입 시험(가오카오)이 다가오자 제 마음은 더는 평정하지 못하게 됐고, 그 ‘정’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왔습니다. 당시 스스로 이렇게 위안했습니다. ‘평소에 아이 공부에 관해 별로 묻지도 않았는데, 이제 대입 시험이니 좀 관심은 가져야지, 최소한 대강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유는 상당히 충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가족이나 친구가 아이 상황을 물어보며 몇 점을 받았는지, 어느 학교에 합격했는지 등을 물으면 제가 좀 알아야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다는 식이었습니다(이런 것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남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일종의 임기응변 심리이지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아이를 걱정한 것이 아니며, 곳곳에 사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성적 조회가 가능해지자마자 저는 즉시 측면으로 아이 성적을 알아봤습니다. 본과(4년제) 합격선에는 몇 점 모자라 별로 이상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고,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좋았습니다. 속으로는 그 학교가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계속 밖으로 찾음). 본과 진학은 물 건너갔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문대로 방향을 돌려 아이 점수대에서 어떤 학교에 지원하는 게 적합할지 분석하고, 인터넷으로 해당 학교의 지난 3년간 합격 점수와 학과 점수, 지원 학과의 장단점 등을 알아봤습니다. 흔히 새벽까지 알아보다가 발정념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때로는 다음 날 아침 밥을 해놓고 또 알아보러 가서 밥이 다 식을 때까지 연구하고 궁리했는데, 며칠 동안 계속 이랬습니다.
이 기간에 전처와 한 번 연락해 아이의 대학 지원과 전공 선택 문제를 상의하려 했는데, 세 마디도 안 돼서 그녀는 전화를 끊으며 상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처의 거절은 아주 명백했지만 저는 당시에도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황소고집이 올라왔습니다. ‘당신이 상관 못 하게 해도 난 기어코 상관하겠다.’ 그래서 계속 관심을 두고 알아보며 여전히 전화로 학교에 문의했습니다. 그 며칠간 정신이 피폐해지고 생각이 혼란스러워 머릿속은 온통 점수와 학교뿐이었습니다. 이때에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잖아. 나는 수련인인데 어떻게 정에 이토록 심하게 이끌릴 수 있지! 게다가 내가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분석해도 저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헛일 아닌가? 딸의 성적으로 전문대에 가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는 건 충분하고, 학교만 가면 되는데 제일 못 가봤자 어디로 가겠어? 이런 걱정이 무슨 소용이야?’
여기까지 생각하자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의 수련 상태가 아이 성적이 이상적이지 못한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다른 수련생 자녀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심지어 우리집 조카도 아이보다 100점이나 더 높게 나온 것을 보며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과 열등감이 생긴 건 아닐까? 예전에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내가 잘 수련하면 아이는 자연히 이상적인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마음이 작용했던 건 아닐까?’ 어쨌든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찾아야 하며, 이 모든 것은 집착이고 틈이 있는 생각입니다. 지난 며칠간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고 학교에 문의하고 지원 상황을 보느라 며칠을 빠져 지낸 것은 정말이지 마땅치 않았습니다. 더더욱 마땅치 않은 것은 몸도 지치고 눈도 피로한데 손으로는 습관적으로 인터넷 숏폼 영상을 보면서, 뇌를 쉬게 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한번 보면 한참을 보았고, 계속 넘겨보면서 멈추기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사악은 늘 이렇게 정당한 이유를 주어 당신을 오도하고, 당신의 기호에 맞춰 약간의 단맛(당신이 좋아하고 집착하며 인정하는 짧은 영상)을 보여줍니다. 정상이 참작되고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잠깐 보는 건 문제없다는 마음의 조종 하에, 층층이 포석을 깔고 조금씩 침투하여 당신을 유혹해 영상을 열게 하고, 당신 체내에 중독이라는 독초를 심습니다. 영상을 보는 횟수와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그것은 천천히 자라나 사람의 욕망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만두려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만둘 생각이 없으며’, 심지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눈을 떼지 않는 정도까지 발전하는데, 그때가 되면 비정상적인 것도 정상으로 대하게 됩니다. 사악의 음흉한 저의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목적은 당신을 망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기간 사악은 끊임없이 제 가족을 교란해 가족들의 심정을 심란하게 만들었고, 저에게도 함부로 말하고 색안경을 끼고 대했으며, 저를 가장 아끼던 큰누나조차 그들 편에 서서 저를 꾸짖고 타박했습니다. 그 기간 저는 기분이 매우 나빴고 걸핏하면 가족에게 화를 내고 싶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감정이 격해져 참지 못하고 매형을 때릴 뻔했습니다. 매형은 그날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저를 때리겠다고 도발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그가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큰누나를 함부로 때리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한번은 큰누나 목을 졸라 숨이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지만 대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제가 참고 그와 상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언 20년 가까이 참았는데 오히려 날 때리려 하다니. 난 줄곧 당신을 감싸줬는데 내가 어려울 때 당신은 한 번이라도 날 감싸준 적이 있느냐?’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수련 전의 그 호전적인 기질이 나와 주먹을 쥐고 그를 때리려 했습니다. 그는 겁을 먹고 피하면서 제가 다시 손을 내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도 사부님의 새 경문을 배운 적이 있고, 몇 차례 사악의 교란 때 제 물건을 옮겨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도 그렇게 크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공(功)을 닦는단 말입니까! 수련한다고 해놓고 마음속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사후에 큰누나가 와서 저를 위로하며 내려놓으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은 사부님께서 누나의 입을 빌려 저를 일깨워주신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큰누나는 수련하지 않아도 참고 양보하는데, 저는 수련인으로서 남이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아야 함에도 오히려 사람을 때리려 했으니 정말 속인보다 못했습니다. 그 기간은 정말 우울했고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구세력이 제 가족을 교란한 뒤 다시 갈등을 만들어 가족과 저를 이간질하고 저의 수련 환경을 파괴하며, 세 가지 일을 하는 데 영향을 주도록 놔둘 수 없었습니다. 결코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주동적으로 가족에게 잘못을 인정했고, 더는 정에 의해 교란당하거나 마비되지 않았으며, 이 일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3. 서약 중의 서약, 마지막 이 길을 나는 정말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저는 사부님께 남몰래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이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수련생들과 함께 확고하게 걸어가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주변 수련생들은 병업(病業)에 시달리거나 육신을 잃었고, 집에 숨거나 타지로 피했습니다. 현지 수련인이 원래 적은 상황에서 현재의 국면은 더욱 어려워졌고 맥이 끊길 지경이 되어 마음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까지 수련해 왔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국면이 나타날 수 있지? 전체적으로 이게 무슨 일인가? 다들 왜 이러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서약을 하고 온 존재들이며 몸에 책임이 있습니다. 20여 년의 수련을 거치며 어떤 수련생은 성숙하고 건실하게 걸어갔고, 어떤 수련생은 박해로 육신을 잃고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났으며, 어떤 이는 가족 정에 빠지고 속인 생활에 심취했습니다. 어떤 이는 게으름과 안일함이 생겨 휴대폰을 가지고 놀며 동영상을 보고, 1인 미디어에 집착해 매일 중공의 내부 투쟁 뉴스만 분석했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변의 자료점, 법공부 팀이 하나둘 줄어들고 일을 할 수 있는 수련생은 아주 적어졌는데 박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차례 의외의 사고로 진상 알리기 팀 수련생이 사악의 감시를 받아 가택수색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수련생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파동이 일었고, 수련생들과 진상 팀 인원 충원에 관해 교류하러 가면 고개를 저으거나 말을 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국면에서 빨리 적임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우리는 사부님께 적합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람 구하는 일은 큰일이라 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수련생이 나섰고 진상 팀에 합류하겠다고 해서 우리 모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당시 주변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었는데, 우리가 억지로 그런 사람을 추천하면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그녀의 성격이 너무 느려서 협력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인선이 없어 애태우던 차에 그녀가 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사부님의 안배를 따라야 했습니다. 사람 구하는 이토록 큰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으며, 우리는 사부님의 안배가 가장 좋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는 생활, 수련과 어려움 면에서 가능한 한 도움을 주었고, 수련생이 생각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원융하여 그녀에게 최대한의 조력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그녀들이 반드시 잘 맞춰가고 협력하여 사람 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새로운 구성원이 합류했지만 만사는 시작이 어려운 법입니다. 그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밤길을 무서워했으며 시력도 좋지 않았고, 말도 느리고 반응도 느렸습니다. 겨우 자전거를 배웠지만 사람을 태우고 갈 엄두를 못 내는 등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성급하게 성공을 바라고 늘 그녀가 단번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와 외출하면서 겸사겸사 그녀에게 자전거 연습을 시키려고 했는데, 그녀는 뒤에서 타고 저는 앞에서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동작이 굼떠서 제가 한참을 간 뒤 돌아보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도를 늦춰 기다렸다가 다시 이끌고 가면서 “빨리요, 좀 더 빨리요!”라고 외쳤습니다. 처음에는 곧잘 따라오더니 이내 또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생각했습니다. ‘손을 놓자. 그녀 스스로 하게 하자. 내가 이렇게 하면 그녀에게 부담이 될 거야. 자전거 타는 동작도 엉성한 데다 나이도 많고 본래 자전거 타기를 무서워해서 사고가 나 사람을 칠까 봐 두려워하고 시력도 안 좋은데, 이렇게 무작정 속도를 요구하는 건 비현실적이고 안전하지도 않아. 왜 그녀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가? 그녀 스스로 조금씩 적응해서 천천히 자신의 리듬을 찾아 제고해 올라오도록 해야 해.’
그녀는 줄곧 아주 열심히 해서 조금씩 돌파했고, 자전거를 못 타던 데서 탈 수 있게 됐고, 사람을 태울 엄두를 못 내던 데서 사람을 태우고 골목골목을 누비게 됐으며 마침내 해냈습니다. 특히 그녀의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기 있게 향상하려는 마음은 정말로 소중했습니다.
그녀는 또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 명단을 써서 전달하는 임무도 맡았는데, 매번 저에게 명단을 줄 때마다 제가 하나하나 그녀와 대조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복(福)’자의 오른쪽 부분에 그녀는 자꾸 점을 찍었는데, 저는 “그럼 그 사람에게 복을 안 주는 게 되잖아요. 그쪽에는 점이 없어요. 기억했죠?”라고 하면 그녀는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 점을 찍어왔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어떤 글자는 쓸 줄 몰라 예를 들어 ‘둥(董)’자를 늘 ‘중(重)’이나 ‘둥(懂)’으로 썼습니다.
나중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련생의 학력 수준이 높지 않으니 이 일을 잘하려면 기초부터 공을 들여야겠다.’ 그래서 소리 나는 병음표를 사서 ‘a, o, e’부터 가르치며 성모와 운모가 무엇인지, 어떻게 조합하고 발음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녀에게 신화자전을 사주어 자전으로 한자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또 《백가성(百家姓)》을 한 권 준비해 주어 그녀가 이야기를 읽으며 성씨를 외우게 했습니다.
수련생은 이 소식을 듣고 또 그녀에게 깍두기 공책 몇 권을 주어 글씨 쓰는 연습을 하게 했습니다. 그녀도 매우 노력해서 때로는 한밤중에 어떤 글자가 생각나면 얼른 이불 속에서 나와 자전을 찾아보며 그 글자를 똑똑히 보고 외우면서 조금씩 쌓아갔습니다. 팀의 협력은 현재 아주 좋아졌고, 종종 삼퇴 명단을 여러 장 받아옵니다. 그녀가 쓴 글씨도 예전보다 반듯해졌고 복(福)자에도 점을 찍지 않습니다. 그녀의 기꺼운 진보와 변화를 보며 우리는 모두 그녀를 위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한번은 수련생과 차 안에서 교류할 때 제가 말했습니다. “요즘 어떤 느낌이 드는데 마치 제가 수련 초기의 그 상태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시 용광로에 들어간다(回爐)’고 비유했습니다. 저의 예전의 좋지 않은 습관과 관념이 몽땅 튀어나와 정말 한동안 저를 곤혹스럽게 했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다시 용광로에 들어가야 했을까요?
저는 당시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수련을 잘했다고 생각하든 못했다고 생각하든, 사실은 모두 자신이 있는 층차와 각도에서 인식한 것이며 아주 큰 결함과 국한성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장 정확하게 보시는 분은 사부님이시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집착이 있고 수련이 착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모두 되돌아와서 다시 보고 다시 찾아야 한다. 앞서 말한 근본 집착 문제나 어떤 수련생이 지체하며 넘기지 못하는 병업 고비 문제 등과 같다. 마치 나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똑똑히 볼 기회를 주어 자신에게 또 어떤 부족함이 있는지 재인식하게 해주시는 것과 같다.’
특히 예전에 보았던 다른 사람의 집착에 대해 덮어놓고 질책하고 함부로 논의하며 함부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주로 자신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으며 남을 보고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잊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보았던 상대방의 집착이 갑자기 복사한 것처럼 제 몸에 붙여졌을 때, 남만 수련시키고 자신은 찾지 않던 그 가련한 모습이 정말 우스웠고 그 순간의 심정은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때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속인 중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당신에게 모두 내려놓게 해야 한다. 어떠한 집착심이든 당신에게 있기만 하면, 각종 환경 중에서 그것을 닳아 없어지게 해야 한다. 당신에게 곤두박질치게 하고 그중에서 도(道)를 깨닫게 하는데, 바로 이렇게 수련해 온 것이다.”(전법륜)
다시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이든 자신의 심성이 떨어진 표현이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련인으로서 어떤 사람마음을 잘 수련하지 말아야겠습니까? 어떤 사람마음을 제거하지 않아야겠습니까? 자신의 집착이기만 하면 망설이거나 상의하거나 회피하거나 물러설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닦고 바로 내려놓아야만 마지막 이 길을 반드시 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개인 체험에서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23/50281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1/23/502819.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