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한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지 20여 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용돈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대학 교수가 된 뒤, 남편이 군인 장교가 돼 집안의 경제적 형편이 넉넉해진 뒤에도 저는 여전히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했고, 아껴서 모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에는 몸이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도덕관념과 사상 경지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됐고,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았으며, 인생의 귀착점을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저는 사부님(師父)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남을 위하고, 이타적인 선한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잘 대해주며,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부님과 수련생들에게,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체험한 몇 가지 ‘선의와 사랑의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부
저는 1998년 정월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여름, 창장(長江) 유역에 큰 홍수가 나자 학교에서는 교직원들에게 피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성금을 내자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재해 지역의 백성들이 매우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선의와 사랑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의 또 다른 수련생 한 명과 함께 각각 1,000위안씩 기부했습니다. 학교 게시판에 공개된 기부자 명단에서 우리 둘은 나란히 1등이었고, 교장은 300위안을 내 2등이었습니다. 당시 규정상 교직원은 30~50위안 정도만 내면 됐습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지 고작 반년이었지만 자비로운 마음이 이미 자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선의와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죠. 이 일은 학교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모두 놀라서 이야기했습니다. “학교에 1,000위안을 낸 두 사람이 있다는데, 둘 다 파룬궁 하는 선생님들이래! 교장은 300위안 냈대!” 우리 두 대법제자는 그 일로 학교 안에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강력하게 증명했습니다.
어느 날 수업 중 쉬는 시간에 한 학생이 제 앞으로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학교 학생들 모두 그 얘기를 들었어요. 파룬궁 하는 두 선생님이 각각 1,000위안을 냈다고요. 우리 반 전체가 선생님께 존경심을 느꼈어요. 저희 집 1년 수입이 1,000위안도 안 돼요.” 저는 그 말을 계기로 학생들에게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는 진리를 전했습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한 후, 저는 일자리를 잃고 고향을 떠나 외지로 나가 일해야 했습니다. 제가 떠난 뒤, 제 외조카가 제가 일하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여름방학, 그가 저희 집에 와서 말했습니다. “이모, 우리 학교 정치과 선생님이 수업 중에 그러셨어요. ‘우리 학교에 파룬궁 하는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재해 지역에 1,000위안 기부했어. 학교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낸 사람이야. 사람도 참 좋고, 수업도 잘하셨는데, 파룬궁을 한다고 학교에서 내쫓았어.’ 라고요.” 악당이 가장 미친 듯이 박해하던 시기에, 그 정치과 선생님이 대학 강의실에서 대법제자가 겪은 부당함에 대해 그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의 그 바른 마음은 귀하고도 소중했습니다. 저는 그가 반드시 좋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 믿습니다.
사실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해 심성을 제고하지 않았다면, 1,000위안을 기부하는 일은 절대 못했을 겁니다. 그때 1,000위안은 제 가정 형편에서 큰돈이었거든요. 아마 30위안이나 50위안 정도만 냈을 것입니다.
산후 도우미
제 딸과 사위는 둘 다 외동입니다.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 저는 말했습니다. “엄마가 도와주긴 하지만, 전적으로 아이를 돌볼 순 없단다.” 딸은 제 뜻을 이해했습니다. 딸과 사위는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것을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산후조리원에서 출산하기로 했고, 저는 그 결정에 매우 찬성했습니다. 그래야 제가 사부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일을 차분히 잘할 수 있으니까요.
딸은 어릴 때부터 저를 따라 대법을 배웠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엔 수련을 하지 않았지만, 대법의 뿌리는 이미 그녀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을 진실하고 선하게 대했습니다. 첫아이로 아들을 낳았을 때 딸은 34세였고, 그녀를 돌봐준 산후 도우미는 36세였습니다. 두 사람은 금세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고, 산후 도우미는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정성껏 돌봤습니다. 아기가 한 달이 되어 딸이 퇴원할 때,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지기 힘들 정도로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딸은 그 산후 도우미를 집으로 데려와 3개월 더 고용하기로 했습니다. 이후에는 가사 서비스의 육아 도우미로 교체할 생각이었죠.
산후조리원 소속 산후 도우미를 고용하면 한 달에 2만 위안을 조리원에 지급해야 했는데, 이 안에는 도우미의 급여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가격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뒤 딸은 더 저렴한 도우미를 구하려 했지만, 만족스러운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조리원 산후 도우미의 전문성과 서비스에 만족해 1년 내내 고용하기로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습니다. “너무 비싸, 그건 지나치지.” “부자들도 그렇게 안 해.” 하지만 딸과 사위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딸이 출산하고, 산후조리원 산후 도우미를 1년 고용하기까지 들어간 비용은 25만에서 30만 위안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비용은 딸 부부가 부담했습니다.
만약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평소 아끼는 제 성격상 그 돈이 아까워서 마음이 쓰였을 겁니다. “조리원이 돈을 너무 벌고, 우리는 손해다” 하고 불평했겠죠. 어쩌면 제가 몸이 힘들더라도 직접 아이를 돌보며 그 돈을 아끼려 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며 ‘선을 행해 사람을 구한다’는 근본을 배웠습니다. 착하게 살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문득 산후 도우미의 삶을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허난성의 농촌 출신으로, 산둥성의 한 조리원에서 오랜 세월 일하고 있었습니다. 집에는 노부모가 있고, 두 아이는 학교에 다니며, 얼마 전 새집을 샀습니다. 남편과는 장기적으로 떨어져 지내며, 하루 24시간 손님 아기를 돌보느라 자신의 아이들은 얼굴 보기도 어렵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까요. 또한 산후조리원 자체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대부분 5성급 호텔의 한 층을 임대해 운영하는데, 임대료가 비싸고, 직원 급여와 각종 지출을 제때 지급해야 하죠. 우리 같은 고소득층조차 그런 곳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저소득층은 더욱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곳 직원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들의 어려움이 이해됐습니다.
딸의 아이를 도와 돌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집은 보모를 자주 바꾸고 서로 불만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해심과 관용이 없었죠. 그에 비해 우리 집의 산후 도우미는 참 복이 많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녀를 억압하거나 구속하지 않았고, 마치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가족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늘 화목했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1년 뒤 그녀는 다시 산후조리원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친구가 됐습니다. 저는 그녀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녀에게 파룬따파의 진상을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녀는 삼퇴(三退)를 하며 평안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마음속 깊이 그녀의 미래가 밝고 아름답기를 기원했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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