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자신의 수련 길을 걸어가다

글/ 스위스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스위스 독일어권 법회에 4번째 참가하고 있습니다. 매번 심득 체험담을 쓸 때마다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막막해 늘 마지막 순간에야 완성하곤 했습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미루는 버릇 역시 게으름, 즉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의 한 표현임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하기 쉬운 일만 하려 하고, 조금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은 뒤로 미루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늘 익숙하고 편한 환경에서만 일을 하듯 행동했고, 제가 잘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은 여러 이유를 붙여 회피하곤 했습니다.

28년 수련의 길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생인 부모님의 돌봄과 도움에 의존하며 지냈습니다. 스스로 결정할 일도 적었고, 깊이 사고하거나 분석하려 하지 않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은 뒤로는 책임과 문제가 많아졌습니다. 수련과 가정의 균형을 잘 맞춰야 했고, 동시에 어린 제자(아이)를 바르게 이끌어야 하는 책임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마 사부님께서 자비로우시게도 ‘장계취계(將計就計)’(각지 설법11-20년 설법)해 나를 깨우쳐 주시려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스스로 수련의 길을 걷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사람의 집착을 버리고 세 가지 일을 잘하게 인도하신 게 아닐까.’

1. 자신의 수련 상태를 바꾸다

제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화학 박사로서 무신론과 과학적인 사고 방식에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가 수련하는 것을 지지하긴 했지만 대법 중의 초범적 현상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진상을 말할 때마다 자주 벽에 부딪혔고, 그의 관점이나 견해를 설득하거나 바꾸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결혼 후에는 그를 조금씩 이끌어 수련하게 하고 싶었지만 해외로 나와 둘이서만 살게 되니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매우 선량하고 전통적인 사람으로, 가정을 아끼고 저에게도 다정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안일을 돕고 주말이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연애 때부터 결혼까지 저는 ‘정(情)’으로 이 관계를 대했습니다. 정의 작용으로 저는 매우 괴로웠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할 때는 ‘나는 대법제자다’라는 인식으로 법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심성을 지키며, 안으로 찾았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다시 일반인이 돼 세속의 변이된 애정을 즐기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며, 인간 세상의 낭만과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자신이 불안했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실 바로 그 정이 남편이 대법에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제가 정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여러 수련생을 통해 거듭 일깨월주셨습니다. 저는 먼저 법공부에서 돌파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법을 배우는 양과 질을 보장하겠다는 염원을 하자마자 한 수련생이 찾아와 “매일 아침 함께 전법륜(轉法輪)을 통독해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세심한 안배에 깊이 감사하며 마음이 점차 안정됐습니다.

처음에는 교란이 컸습니다. 제가 일어나면 아이도 금방 깨어났습니다. 그때 아이가 아직 어려서 깨어나면 울거나 저더러 일어서서 안고 걸으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의 법공부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처음 며칠은 거의 아이를 안은 채로 한 강을 다 읽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아이도 익숙해졌고, 제가 “엄마는 매일 법공부가 중요해”라고 자주 이야기해 주자 아이도 많이 이해하며 협조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아침 법공부 난관을 조금씩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연공(煉功) 면에서도 꾸준하지 못했습니다. 단체 연공 환경을 떠나면 스스로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주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 다섯 시쯤 되면 저절로 깨어나거나 아이가 뒤척여 깨우곤 했고, 때로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연공 음악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혹은 꿈에서 누군가 저를 깨우거나 남편이 제 다리를 쳐서 놀라 깨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일심에 굴복해 꾸준히 하지 못했고 며칠 하다가 다시 게을러졌습니다. 하루만 소홀히 해도 다시 시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수련자의 기본인 법공부와 연공조차 왜 꾸준히 할 수 없는 것일까?’

사부님께서 《로스앤젤레스 법회 설법》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자: 끈기와 의지력은 선천적인 것으로 하늘이 정한 것입니다. 제자는 의지력이 강하지 못하여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하여 노력하면 며칠은 좋을 수 있으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주 고통스러운데 어디가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노력하여 법 공부하고 법을 외워도 여전히 제고하지 못하는데, 법 공부를 통해 의지력을 키우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법 공부가 여전히 부족한 것입니까? 만약 근본 원인이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도 구원될 수 있습니까?

사부: 만약 수련을 아주 잘한 대법제자라면 대법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럼 반드시 힘을 내어 할 것인바, 반드시 이 방면에서 태만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정진하지 않는 사람도 여전히 법 공부를 하고 있고 또 법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법에 있지 않으며 정념도 부족하기에 인식이 자연히 높지 않은데, 곧 진정으로 법의 진귀함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로스앤젤레스 법회 설법)

이 말씀을 통해 저는, 제가 아직 ‘법의 진귀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법을 얻었지만 세속이라는 큰 물결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미혹돼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공산당 문화와 무신론의 영향으로, 때때로 자신의 근본과 사명을 잊고 세인 속에서 늘 이성적이고 정념이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기에, 사람의 마음에 쉽게 끌려 내려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중에 사부님의 일깨움으로 저와 매일 밤 온라인으로 함께 연공할 수련생을 찾았습니다. 중간에 가끔 중단되기도 했지만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주 좋은 작용을 했습니다. 수련생들끼리 서로 촉진하며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됐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환경에도 변화가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2. 가정 고비 속에서 정(情)을 닦아 없애다

개인 수련 상태가 바뀌면서 저는 점차 수련과 가정생활에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극단으로 치닫는 자신을 깨닫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완전히 가정을 우선시하며 겉으로는 ‘일반인에 부합되게 수련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안일심에 이끌린 핑계에 불과했고 수련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이를 깨달은 후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됐습니다. 하루 일정을 지나치게 빡빡하게 채우고, 종종 늦은 밤까지 바빴으며, 집안일을 정리할 시간도, 남편과 대화할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남편은 종종 “직장도 안 다니는데 나보다 더 바쁘네”라며 빈정거렸습니다. 저는 그저 일을 계속했을 뿐, 남편에게 진상을 알리거나 일상적인 소통에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제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러 나가거나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는 시간이 길어지면 남편은 저를 원망하며 “나와 아이와 함께할 시간도 없네”라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한동안 항목이 바빠서 밤과 주말에도 남편이 아이와 놀고있을 때도 저는 컴퓨터 앞에서 일했습니다. 주말에 항목을 마치고 바로 대법 활동에 참여한 후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냉담하게 대했고, 말투도 무심하며 표정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마음속 불만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계속 안으로 찾으며 심성을 지키고 대법제자로서의 선(善)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겉으로는 남편과 똑같이 차갑게 대하지 않고 먼저 관심을 보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힘들었습니다. 남편이 수련생처럼 제 대법 일을 이해하거나 지지하지 못하는 점에 괴로워하며 외롭고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먼저 남편과 진심으로 대화를 시도했고, 남편이 최근 알레르기 비염과 과중한 업무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낮에는 두통과 극심한 피로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은 다시 한번 “매체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도와주며 아이를 돌봐 줄 수 있어?”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반응이 모두 제 마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의 요청에 동의하지는 않고 다만 시간을 잘 조율해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만약 정말 수련과 남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제 선택은 수련임이 분명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사람들 속에서 수련을 완성하도록 배치하셨다면 반드시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집착과 부족한 법공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늘 극단으로 치우쳐 세 가지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지 못했을까요?

저는 더러운 추구하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세 가지 일을 잘하려는 목적이 편안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남편의 이해와 지지를 얻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고, 이는 대법을 이용하는 순수하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강한 명예욕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남이 냉담하거나 화를 내면 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남편에 대한 정(情)과 의존심도 있었고, 대법제자의 정념정행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나쁜 마음을 내려놓고 수련을 통해 명리(名利)와 정(情)을 버리며, 사부님의 대법을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남편을 중생처럼 바라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생의 인연 또한 법을 위해 온 것이므로, 대법에 동화되지 못하면 장래에 남을 수 없으니 제가 그에게 끌려 내려가서는 안 되며, 제 주의식은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사람의 마음과 교란에 대해 발정념을 하고 구세력의 모든 배치를 부정했습니다.

과거 실수했던 점도 깨달았습니다. 수련을 진지하게 하지 않아 수련의 엄숙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광명한 도를 성취하고 싶어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얻는 육체적 즐거움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일사일념을 스스로 바로 세워 다양한 사람 마음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옳지만 문제는 출발점과 마음 씀씀이였습니다.

생활 속 작은 일에서도 게으름을 극복하려 노력했습니다. 집안일은 조금씩 수시로 하고 쌓이게 두지 않았습니다. 평소 깨끗하게 정리하며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에 청소했습니다.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의 입맛도 고려하며 대충하지 않았습니다. 법공부와 연공, 진상 항목을 하면서도 남편과 대화할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제 저는 더 평온해졌고 남편에게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편의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어려움에 봉착해도 예전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람은 업력이 있어 고난을 겪음을 이해하고, 남편은 저처럼 대법제자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법에서 깨달은 대로 그를 이끌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은 더 이상 그에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일상 속 작은 일에서도 대법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요구하며 세 가지 일을 하면서 되도록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출발점이 바로 서자 남편도 점차 마음을 열고 자발적으로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제가 법을 실증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고 협조합니다. 주말에 제가 아이와 함께 단체 연공이나 단체 법공부에 참여할 때는 집에서 식사를 준비합니다. 제가 온라인으로 법공부를 하면 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기도 합니다. 아이가 《홍음》 몇 수를 완전히 암송하면 진심으로 칭찬합니다.

3. 어린 수련생과 함께하며 심성(心性) 높이기

올해 세 살이 된 제 아들은 매우 영리하며, 한 살 이전에는 거의 울거나 떼쓰는 일이 없었지만 저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습니다. 저는 대법제자의 집으로 환생한 아이들은 반드시 법을 위해 특별한 인연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이가 대법 속에서 수련하도록 잘 인도할 책임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 수련 상태가 충분하지 않아 수련과 아이 돌봄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법공부와 연공이 자주 중단됐으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수련생들이 찾아와 경험을 나누고 제게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너무 관대하다거나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을 통해 주신 일깨움을 충분히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명예심과 질투심 때문에 수련생의 조언을 냉정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표면적으로는 수용하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반감이나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내 어려움을 모른다, 아이마다 성격과 성장 방식이 다른데 나는 배우기 어렵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법공부가 강화되면서 저는 질투심, 지적받기 싫어하는 마음, 명예욕 등을 깨달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안일심과 게으름도 발견했습니다. 부족한 점을 지적받으면 아이를 핑계로 삼고 “아이 돌보느라 피곤하다” 혹은 “아이가 울어서 방해된다”는 등의 변명을 했습니다. 아이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법공부와 연공, 발정념을 하지 못한 것도, 아이가 어리고 잠자는 시간이 불규칙하다는 등등의 핑계였습니다. 아이는 저와 함께 수련하기 위해 온 존재이지 저를 방해하려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실제로 수련 상태를 바꾸기로 결심하자 아이는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전에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부지런하지 못했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들과 함께 《홍음》을 외우고, 아이 옆에서 법을 읽으며, 시간 날 때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틀어주거나, 명혜라디오에서 어린 수련생들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또 깐징월드의 전통문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밤에 연공 시간이 되면 아이를 먼저 재워야 한다는 고민 없이 “엄마가 연공해야 하는데 옆에서 혼자 잘 수 있겠니?”라고 말하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이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아이가 연공에 참여하고 싶어 할 때 사부님 공법교습 동영상과 함께 연공하며, 처음으로 약 20분간 동공을 따라 했습니다. 이는 저에게도 큰 격려가 됐고 매일 연공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집착심도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갑자기 소리치면 저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 과도하게 긴장하고 화를 내며 제지했는데, 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연약한 마음을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한 살 반에서 세 살까지는 아이의 자아가 발달하는 시기이므로, 단순히 “안 돼”라는 말로는 듣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는 안일심을 자극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제가 매일 말을 많이 하고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거나 반복되는 문제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저는 쉽게 낙심했습니다.

제 안으로 깊이 살피니, 의존심과 추구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만 대법 속에서 꾸준히 수련하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대법이 바로잡아 줄 것이고, 나는 그저 아이를 대법 수련으로 이끌기만 하면 다른 일은 사부님께서 다 안배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언뜻 옳아 보였지만, 그 뒤에는 교묘한 의존심과 추구함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저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아이가 세탁기 속에 든 옷처럼 자동으로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극단적 사고였으며 사부님도 여러 번 아이 교육에 대해 말씀하셨듯, 제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을 사부님께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제가 잘 걸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저는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고 아이의 미래를 진심으로 책임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로 인과응보와 심성(心性) 제고에 대한 제 이해를 아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곧 그 내용을 이해하고 다음 수련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놀라운 영성에 놀랐습니다.

한번은 함께 노는 친구가 우리집을 떠나기 싫어 울자 아들은 친구를 달래고 ‘홍음-마음 고생’을 암송했습니다. 친구는 눈을 크게 뜨고 아들이 다 외우는 것을 지켜봤고, 아들의 진지하면서도 순수한 모습에 친구의 어머니도 크게 감동했습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은 저의 심성을 계속 높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남의 방식을 무작정 따라 하기보다는 스스로 맞는 길을 탐색하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수련생들의 소중한 경험을 기준으로 안으로 찾아보며, 저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왜 아직 대법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점검했습니다. 겉만 배우고 심성을 높이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아이의 심성 시험도 관찰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음식을 먹고 싶어 할 때 마트에 없거나, 즐거움에 취해 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기대하던 법공부·연공을 하러 갔는데 다른 어린 수련생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약해 안쓰럽다고 느꼈고,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환희심과 탐식하는 마음을 없애게 하는 것이 차마 못할 짓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이것이 사람의 정으로 판단한 것이며 아이를 어린 수련생으로 보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조기에 수련 기반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며, 아이의 명백한 일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이가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법을 깨닫도록 지혜롭게 지도하고 마성(魔性)을 조장하거나 방임해서는 안 됐습니다. 법리를 공유하면서 저 자신도 수련의 의미와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사부님의 시와 법문의 겉뜻을 설명하면서 더 깊은 내적 의미를 깨닫게 됐습니다.

과거 수련의 엄숙함을 항상 기억하지 못해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정법 시간이 이어진 덕분에 저는 자신만의 수련 길을 걸을 기회를 얻었고, 사부님께서 수련을 더욱 성숙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린 수련생을 잘 지도하며, 함께 정진하고, 사람 마음을 더 많이 없애며, 모든 기회를 이용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와 보호,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나눔과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2025년 스위스 독일어권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0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0/29/501808.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0/29/501808.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