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샌프란시스코 법회] 가정환경 속에서 심성을 제고하다

글/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수련한 지 17년이 됐고 법회 교류문도 적지 않게 써왔지만 대부분 제 특기를 어떻게 활용해 사부님의 정법을 도왔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가족 속에서 수련하며 느낀 작은 체득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잘 맞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문제를 부정적으로 보시고 불평을 자주 하셨습니다. 게다가 말솜씨가 좋지 않아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격려하는 일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제가 막 법을 얻었을 때 어머니는 중국에서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며 기적처럼 그 큰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미국에 친척 방문차 오셨을 때 아버지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어머니도 파룬궁을 배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법에 대한 인식은 늘 감성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약을 먹을지 말지 하는 문제에서도 형식만 따르시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큰일을 만난 듯 제게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겪어보지 않았는데 내 고통을 어떻게 알겠니?”라는 어머니의 한마디는 늘 저를 할 말 없게 만들었습니다.

제 권유로 부모님은 정식으로 중국 본토의 집에서 저희 집 근처로 이사하셨습니다. 그 직후 어머니는 정부 의료보험 신청을 재촉하시고 저와 함께 아버지를 데리고 각종 병원을 다니게 하시며 아버지의 남은 치아까지 모두 뽑게 하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더 이상 진상 전화를 걸지 않으셨습니다. “말할 때 자꾸 새어나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겠냐.”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약간의 원망까지 품게 됐습니다. 어머니의 깨달음이 부족해 아버지를 속인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부모님 댁에 들렀을 때 가능한 한 아버지하고만 대화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파킨슨병을 앓고 계셔서 소파에 앉아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돌아보지도 못하셨고, 걸어와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려우셨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속상하고 무력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생활 면에서는 두 어르신을 잘 보살펴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원래 성격이 크게 달라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않는 존재였으니까요.

한 수련생이 우리 부모님을 뵈러 왔을 때입니다. 수련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제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하자 저는 참지 못하고 습관대로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수련생이 저를 엄하게 제지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 수련생은 어머니께 훈계하듯 말해서는 안 된다고 저를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제 모습에서 수련인의 선(善)을 볼 수 없고 속인 중에서의 효도도 없다고 지적해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 자신을 돌이켜보니 저는 확실히 어머니에 대해 편견이 가득했습니다. 어머니의 오성(悟性)이 조금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한 번도 대법을 반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성이 부족한 것도 상대적인 것입니다. 잘 수련한 수련생들에 비한다면 제 오성도 매우 부족한 것 아닙니까? 사존(師尊)께서는 속인 중에서 법을 전하실 때 온갖 사람이 섞여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선하셨고 그가 중사(中士)나 하사(下士)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한 것은 조금도 자비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중국에서의 생활은 여기보다 단조롭지도 않고 더 풍요로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이사에 동의하셨겠습니까? 그것도 저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가득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횟수를 점점 늘리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집안일로 바쁘실 때는 어머니의 일상을 돌보는 일을 도왔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약을 먹지 않으셔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시던 중 갑자기 다리가 굳어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저는 마치 걸음마 배우는 아이를 다루듯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한 뒤 침대에 모시고 쉬게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처음으로 특별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집을 나서려던 순간 어머니가 갑자기 영어로 “I love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지금껏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날 때도 어머니는 그저 빨리 입국하라고 재촉만 하셨을 뿐 아쉬움이나 걱정을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저는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한 뒤 저도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의 모든 앙금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 하루 종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상주 가정부를 모셔 부모님을 돌보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과 친화력이 좋아 누구와도 잘 지내셨지만 어머니는 정반대로 누구와도 잘 지내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하시며 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최대한 위로하고 즐겁게 해드리며 가정부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가정부는 한 명씩 바뀌었습니다. 매번 바뀌는 이유는 거의 항상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떠나는 가정부들은 늘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매번 저는 스트레스를 참으며 다음 담당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지만 예전처럼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가 부모님의 일상생활을 직접 돌봐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실수로 제가 청소하던 손에 대변을 묻히셨는데 본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묵묵히 손을 씻으며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듯 담담하게 처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서 집에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셨습니다. 그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대법 음악을 틀어드렸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진선인(眞·善·忍)’의 법리가 어떻게 제 냉정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정화시켰고 저에게 자신을 승화할 기회를 주어 후회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중·영문으로 작성했습니다. 이를 어머니를 돌본 간호팀, 이웃들, 중국 친척과 주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몸과 정신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아버지를 찾아뵙고 마음을 열어드리며 과거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생활과 일 속의 소소한 이야기도 함께 나눴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딸이 동부에서 우리집으로 일주일간 방문했을 때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함께 다른 주로 여행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원격근무를 하면서도 딸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출발하기 전 저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눴는데 그날 아버지의 상태가 유난히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상태가 너무 나빠서 돌아왔을 때 다시 뵐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안 가는 게 좋을까요?” 평소 항상 공손하시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단호하게 한 마디로 대답하셨습니다. “응.” 제 마음이 순간 조여들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딸은 또래 친구들처럼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딸은 진지한 얼굴로 제게 “손목을 칼로 긋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딸이 다치거나 피가 나지 않은 것을 보고 단순히 관심을 끌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남부 캘리포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였는데 그 여행 자체도 딸의 우울함을 달래고 주의를 돌리기 위해 특별히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내가 이렇게 많이 해줬는데 이제는 좀 지나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만 몇 마디 달래줬을 뿐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딸은 그 몇 마디 말에 깊이 상처받았습니다. 그 이후 딸은 점점 저와 거리를 두고 냉담해졌으며 빨리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딸의 변화는 저를 실망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때 저는 이것이 성장통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반항심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딸은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거식증을 앓게 됐습니다.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고 딸이 학교 육상팀 소속인 것을 핑계 삼아 경기를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은 어쩔 수 없이 저를 찾아왔고 저의 이해와 지지 덕분에 결국 딸은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저와 소원해진 이유를 말해줬고 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딸은 다소 놀랐습니다. 평소 고집이 센 제가 겸손하게 사과하다니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 딸은 집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유럽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우울증을 겪게 돼 가장 힘들어할 때 저는 전화 너머에서 딸의 곁을 지키며 함께 있어 줬습니다. 제가 유럽에서 세 번의 비행을 거쳐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딸 앞에 나타났을 때 딸은 저를 꽉 껴안고 무려 1분 동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와 딸은 가장 친밀한 친구가 됐습니다.

이제 저는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효도 사이에서 수련인으로서 내려야 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아버지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남편은 여러 번 제 결심이 확실한지 물었습니다. 어차피 상황이 위급하면 제가 혼자서라도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기쁘게도 두 아이 모두 제 선택을 이해했습니다. 다음 날 출발 전 딸은 저를 깊게 안아주며 “엄마, 몸 잘 챙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딸의 이해와 배려 덕분에 조금 얽혀 있던 제 마음은 완전히 놓일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시어머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으시지만 성격이 강해 사람들이 ‘여왕’이라고 농담하곤 합니다.

제가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 전체를 위해 션윈 공연 티켓을 샀습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먼저 공연을 보러 가셨습니다. 그들은 공연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남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남편은 공연을 보러 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제 마음속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이후 시어머니도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걱정돼 대법을 권했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관심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 원망은 더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법공부를 하며 시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속 선한 마음이 나타났고 시어머니에 대한 태도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겉으로만 관심을 보였지만 점점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중에는 기꺼이 가정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항상 가족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명절마다 가족을 모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여기셨고 친척과 친구들까지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예전처럼 모든 일을 챙길 수 없게 되셨습니다. 저는 이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발적으로 시어머니의 전통을 이어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실 저는 본래 조용한 성격이라 과거에는 명절마다 여행을 떠나 많은 모임을 피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전통적인 풍성한 식탁을 준비했습니다. 친척과 친구들 모두 만족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갑자기 저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고마워.” 잠시 멈춘 후 이어 “내게 해준 모든 일, 고마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어머니의 결혼 60주년 기념식에서 저는 자발적으로 무대에 올라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딸이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시어머니는 매주 3시간씩 운전해 혼자 저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아이를 봐주셨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무대 아래 앉아 계신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어머님, 언젠가 제가 할머니가 될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어머님처럼 우아하고 재치 있으며 사랑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시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제 시누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친구도 많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과장을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중학교 시절 시누이는 늘 오빠의 빛에 가려져 살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빠가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해 집에 돈 한 푼 쓰지 않았던 반면 시누이는 정반대였습니다.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존했고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그녀는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 중이라 집에 못 간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전화를 우리에게 넘겨주셨는데 그녀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날씨가 정말 좋네!” 그 거짓말과 우리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가벼운 태도에 저와 남편은 극도로 불쾌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시부모님께 진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시누이는 페이스북에서 저를 차단했습니다.

저는 억울하고 화가 났습니다. 내가 먼저 선을 긋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그녀가 나를 페이스북에서 발로 걷어찬 셈이니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인입니다. 어떻게 제가 그녀와 옳고 그름을 다투며 스스로의 기준을 낮출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제 태도에는 남편의 영향뿐 아니라 깊이 숨겨져 있던 질투심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결혼 이후 시어머니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가족 모두가 수백 마일 떨어진 별장에 모이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꼭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제가 모두를 위해 중국식 만찬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겉으로는 제 문화 전통을 존중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문제는 제가 시누이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식재료를 챙겨 아홉 시간을 운전해 가고 스키장에서 돌아와 모두가 쉴 때 저는 부엌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반면 시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늘 우리의 눈앞에서 직접 그녀에게 수표가 든 봉투를 건네셨고 매년 해외여행 경비까지 지원해 주셨습니다. 외식할 때도 항상 우리 부부가 계산했습니다. 제가 왜 그녀를 질투했을까요? 시누이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많다 해도 그녀와 부모님의 인연관계가 어찌 제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녀의 존재야말로 제게 갈등 속에서 수련하고 제고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거짓말을 폭로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시어머니를 상처 주는 일일 뿐입니다. 수련인은 ‘인(忍)’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인내는 어디 있었습니까?

저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시누이의 장점을 보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들러 오빠(제 남편)와 상의할 일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집에 없어서 제가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대화 중 그녀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다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저는 그저 조용히 곁에서 듣고 그녀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급히 판단하지 않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믿어줘요. 오빠는 한 번도 형님을 이용하려 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잠시 멍하더니 곧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뒤에도 시누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언제 샌프란시스코 오면 꼭 날 찾아와.” 예전의 저는 이것을 단순한 인사치레, 시어머니 앞에서의 보여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실제로 곧 그녀를 만나러 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제 진심과 포용은 그녀와 그녀의 친구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션윈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녀들은 반드시 보러 가겠다고 진지하게 약속했습니다.

맺음말

우리집에서 회사로 출근하려면 험한 산길을 지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날씨 때문인지 마음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급커브를 지날 때 갑자기 긴장이 몰려와 손바닥에 땀이 나고 눈은 앞만 바라보며 혹시라도 가드레일에 부딪히거나 산골짜기로 떨어질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핸들이 마치 나와 맞서는 듯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산길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차는 자연스럽게 커브를 따라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마음도 따라 놓이게 됩니다.

수련 또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잡념 없이 법으로 마음을 채운다면 담담하고 침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안배해 주신 길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험난해 보여도 결국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제 경험을 나눴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202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8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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