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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한 역사적인 밤, 가룟 사람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춤하고 이로써 세상을 바꾼 한 재판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체포된 것을 제자의 배반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유다의 배반은 절묘하게 이용된 하나의 고리, 이미 놓인 덫에 빠진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나는 이 질문을 오랫동안 탐구하고 사색해 왔다.

유화 ‘최후의 만찬’, 작가: 시몬 우샤코프(Simon/Pimen Fyodorovich Ushakov, 1626년~1686년, 러시아의 저명한 화가). 예수를 둘러싼 열두 제자 중 앞줄 왼쪽 세 번째, 머리 위에 광채가 없는 인물이 유다다. (출처: 위키백과)

불안에 휩싸인 예루살렘

예수가 살던 시대,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 치하의 불안한 땅이었다.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군사와 법률의 최종 권력을 대표했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치안 유지, 즉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종교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현지 유대 공회 제사장 귀족들의 손에 장악돼 있었는데, 그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신도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선지자’는 누구든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예수의 등장은 바로 이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 로마 당국에게 이런 인물은 동란을 일으킬 사회 불안정 요소가 될 수 있었고, 유대 공회에게는 종교적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제국 정권에서 종교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모두 불안과 경계심에 휩싸여 있었으며,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유다의 역할

유다는 예수께서 친히 선택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함께 걸으며 전도했다. 유다는 또한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매우 신뢰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날, 유다는 스스로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느냐?” 그들은 은화 서른 닢을 제시했고 유다는 동의했다. 은화 서른 닢은 당시 노예의 값으로, 후세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를 ‘헐값에 팔았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예수의 많은 기적을 직접 목격했고, 예수의 많은 중요한 가르침을 직접 들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는 자신의 주님을 팔아넘기기로 선택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돈을 탐했다고 말하지만, 은화 서른 닢이 반드시 좋은 값은 아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당시 보편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며, 메시아가 유대인을 로마 제국에서 구해내고 이스라엘을 복국시키기를 바랐는데, 예수에게는 그런 혁명적 이상이 없었기에 유다가 크게 실망해 분노로 배반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는 전도 초기부터 자신의 나라는 하늘에 있으며, 인간 세상에 혁명을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가 베드로, 야곱, 요한과 특히 친밀한 관계였는데, 예수가 때로는 그들 세 사람만 데리고 일을 하므로 유다에게 질투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려면 강한 증오라는 동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탐욕, 질투 같은 성격적 결함은 비록 견딜 수 없지만, 만약 단순히 실망하거나 불만을 품었을 뿐이라면 얼마든지 떠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가 전도하는 과정에서 열두 제자 외에도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인식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예를 들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와 같은 말씀—받아들이기 어려워 나중에는 더 이상 예수를 믿지 않게 됐다. 하지만 그들도 조용히 떠나기를 택했을 뿐, 돌아서서 배반하며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분명 유다도 더 이상 예수를 믿지 않게 됐고, 이것이 그가 배반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실망한 추종자들처럼 조용히 떠나지 않고, 오히려 팔아넘기기로 결정했다. 이 적대감과 증오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탄이 마음으로 들어오다

기독교 신학과 교리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것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영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누가복음’에는 “사탄이 가룟인이라 불리는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으니, 그는 본래 열둘 중의 하나였더라”라고 기록돼 있다.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저녁을 먹을 때, 마귀가 이미 가룟인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뜻을 넣었더라.” 더 나아가 “그가 그 떡을 먹고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더라”고도 지적했다.

이 경문들은 유다의 배반에 사탄의 분명하고 강력한 개입과 조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유다는 죄악의 근원은 아니지만, 죄악이 목적을 실현하는 주요 도구가 된 것이다. 그의 결함 있는 마음은 어둠의 세력에 이용당하는 돌파구가 됐다. 그의 배반은 단순히 인성의 약점으로 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용당한 자유의지

유대 공회나 로마 당국이 예수를 체포하려면 정말 유다가 길을 안내하고 지목해야만 했을까? 사실 꼭 그렇지는 않았다. 예수는 늘 공개적인 장소에서 전도해 대량의 군중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그의 모습과 행적은 비밀이 아니었다. 당국이 정말 예수를 잡으려고 마음먹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마침 유월절이어서 사람이 많아 영향이 좋지 않을까 염려했다 해도, 민감한 날이 지난 후에 체포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진짜 이유는 그들이 아직 예수를 체포하기로 결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찾아온 이 배신자 유다가 체포 행동을 추진하는 핵심이 됐다. 유다의 지목과 안내는 실제 조작에서 정확성과 은밀성을 크게 높였으며, 특히 야간 행동과 군중 소요를 방지하는 상황에서 그러했다.

그래서 유다는 사실 이용당한 것이다. 그의 인성적 약점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용당했고, 통치 당국에 이용당했으며, 더 나아가 사탄에게 이용당했다.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고, 그 자신이 배반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를 팔아넘긴 후, 유다는 비참한 예수의 수난 광경 앞에서 크게 깨닫고 뉘우쳤다. 그는 은화를 성전에 던져 버리고 울면서 “내가 무고한 사람의 피를 팔았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었고, 그 단계에 이르러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선택했고, 이렇게 하면 후회가 자신에게 가져다준 마음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유다에게 팔려나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중세 시인 단테는 ‘신곡-지옥편’에서 지옥을 아홉 개의 동심원으로 묘사하며, 죄의 심각성이 외층에서 내층으로 갈수록 무거워져, 가장 깊은 제9층은 배신자들을 위해 남겨뒀다. 그곳에서 사탄의 세 개 입이 영원히 쉬지 않고 세 명의 죄인을 물어뜯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다였다. 이런 배치는 단테가 ‘은인 배신’이라는 죄에 대해 극도로 증오함을 반영한다. 유다의 후회와 자살조차 단테 마음속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유다에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다른 제자 바울처럼 다시 돌이킬 기회가 있었다. 바울은 원래 기독교인을 잔혹하게 박해하던 자로, 직접 신도들을 잡아들이고 감금했으며 심지어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의 심오한 기적과 내적 충격을 경험한 후, 그는 깨달음과 회개를 선택하고 남은 인생을 신앙 전파에 투입했다. 그의 변화는 생명이 아무리 잘못된 길로 멀리 갔다 해도 여전히 돌아올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전환점은 깨닫고 주저함 없이 회개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유다가 자살을 선택해 잃은 것은 단순히 생명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였다. 유다는 팔아넘기는 자였지만 동시에 팔려나간 자이기도 했다. 그가 팔아넘긴 것은 예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그가 당초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그 초심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유다가 최종적으로 예수를 팔아넘기는 행동을 하기 전에, 예수는 줄곧 유다가 최종적으로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는 여전히 유다에게 다가가고 유다를 가르치며, 유다가 재물을 관리하게 하셨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는 여전히 “떡을 적셔서 유다에게 건네셨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이것이 최대한 유다에게 스스로 결말을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며, 유다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사람에게 주신 사랑과 구원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 것이다. 또는 비록 유다에게 원래 안배된 운명의 결말이 비극이었다 해도, 예수는 줄곧 유다에게 기회를 제공해 새로 결말을 선택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기록에 남은 일부 모순과 충돌을 유다는 모두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가중시켰다.

그렇다면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후, 예수는 유다와 자신을 박해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예수는 그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다. “그들을 용서해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옵니다.” 원망도 미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 차 계셨다. 물론 이 이해는 사람의 정과 같은 것은 아니고, 연민은 용인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극도의 업력(業力)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인류를 위해 자비와 관용, 무조건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함의를 몸소 연출하셨다.

이 이야기는 정말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유다가 유다가 되기까지는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그는 영광스럽게 늘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3년간의 시시비비를 겪은 후에야 자신도 뼈저리게 후회할 수밖에 없는 팔아넘기는 행위를 저질렀다. ‘성경’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이 한 명뿐이지만, 이 유다는 후세의 무수한 사람에게 신앙을 배반하는 전형적인 상징과 경고가 됐다.

맺음말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이 역사적 이야기를 정리한 후, 나는 중국공산당(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떠올렸다. 이 박해는 억 단위의 중국인들이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명예, 가정, 직장에서 중대한 손실을 입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수천, 수만, 심지어 수백만의 선량한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중공의 멸망으로 이어질 이 박해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수련인들은 경지의 깊고 얕음에 상관없이 자유롭고 느슨한 환경에서 서로를 일깨워주고, 상호 교류하며 함께 향상할 수 있었고, 주요 에너지를 개인 수련 향상에 두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더 많은 사람이 ‘진선인’의 복음을 알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 26년처럼 거대한 시간, 재력, 물력을 반(反)박해에 투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해는 결국 일어났고, 진선인 대법은 이미 우리에게 전해졌다. 수련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정법 수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더 많은 수련자가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 실천해, 사람의 사상, 사람의 습관, 사람의 관념에서 벗어나 더 큰 선념과 흉금, 강대한 정념을 수련해 나가기를 바란다. 더 이상 감정을 이성과 혼동하지 말고, 더 이상 명예와 이익, 욕망의 만족을 수련의 성취, 사명의 실현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겸허하게 낮추며, 자아의 욕망과 이기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주 중의 좋은 에너지, 신의 가지가 거침없이 우리에게 모이고 가지해 우리가 마땅히 성취할 바를 이뤄줄 것이다.

이상은 개인이 현 단계에서 갖는 몇 가지 사고와 인식으로, 삼가 대법제자들의 교류와 참고를 위해 올린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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