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케이시
[명혜망] 저는 언론매체에서 기자 팀을 관리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 직책 때문에 2년 전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성장할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것을 기억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최근 업무 중에 겪은 수련 경험과 사고를 일부 나누고자 합니다.
업무와 관련된 관념
저는 줄곧 노력하면 보상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언론매체에서 일하기 전 직장에서도 제 주변에는 매우 우수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는 더욱 ‘부지런히 진지하게 하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고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속인 층면에서 이런 업무 태도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렇게 ‘일을 잘하는 것’을 중시하는 마음이 점차 매우 엄격한 자아 인식으로 변해갔습니다. 무엇을 하든 반드시 최고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관념은 이미 제 정체성에 깊이 융합되어 제 인생을 이끌어 왔습니다. 오랜 세월 저는 노력과 성실함이 확실히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거듭 발견했고, 이런 신념은 계속 강화됐습니다. 제 수십 년의 생활에서 이런 태도는 늘 보답이 있었기에 한 번도 이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 마치 기계가 가동되듯 저는 ‘일하는 케이시’가 됩니다. ‘일하는 케이시’는 효율과 효과에 집중하며 반드시 일을 잘해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일할 때 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수련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가지 관념과 자아 인식에 휘둘렸고, 머릿속에 마치 화면이 하나 있어 업무와 수련을 완전히 분리해 놓았습니다. 이는 마치 제 생활에서 서로 교차하지 않는 두 개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큰 문제입니다. 제가 언론매체에서 일하는 것은 사실 중생구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일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아주 잘했다고 해도, 이기적인 관념에 추동되었다면 중생구도에 얼마나 실제적인 기여를 했는지 정말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대법을 위해 일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몇 주 전, 누군가 백악관 대변인이 기자회견 전 동료들과 무대 뒤에서 함께 기도하는 영상을 공유했습니다. 이는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평범한 종교인도 신앙을 이렇게 업무 생활에 융합시킬 수 있다니, 그녀의 업무는 정말로 신앙의 인도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니, 저는 업무에서 늘 수련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는 면에서 아직 멀었습니다. 업무 성격상 매일 많은 메시지 교류가 있고, 많은 대면이나 전화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매번의 상호작용은 사실 수련의 기회이거나, 적어도 수련생의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기회인데, 세속적인 관념에 추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과 얼마나 많은 신이 있는가. 빽빽이 어떠한 빈틈도 없이 모두 당신을 주시하고 있고, 모든 지상 사람의 사상을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천체 전반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대법제자의 일사일념ㆍ정체(整體) 형세의 나아가는 방향, 정법의 성공과 실패는 우주를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데, 이렇게 큰 한 가지 사건이다.”(각지 설법13-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이 설법은 정말로 저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제 내심의 사상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신께서는 제 업무 성과에 특별히 개의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줄곧 외재적인 것에 주의력을 두고 마음 수련을 소홀히 했으니,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보답을 추구하는 마음
최근 몇 년간 뉴스 업데이트 속도로 인해 고강도 업무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장시간 업무,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 돌발상황 대응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른 신체적 피로는 솔직히 견딜 만했습니다. 저는 자신을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중국 농민에 비유하곤 했으니까요. 심리적 고통, 특히 더 많은 심성 충돌이 있을 때는 확실히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세월 동안 저는 줄곧 고강도 업무 부담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최근 언론매체 업무에 대한 제 투입이 사실 조건부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몇 주 전 소그룹 법공부에서 ‘전법륜’ 제7강 ‘질투심’을 읽을 때, 사부님께서 언급하신 한 가지 사례가 저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첫 단락에서 사부님께서 유가의 “함양(涵養)을 말하고 참음(忍)을 말한다”는 가치관을 설명하시면서 하나의 장점으로 예로 드셨습니다. “똑똑함(內秀)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줄곧 자신이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겸손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왜 “똑똑함(內秀)을 드러내지 않는다”를 긍정적 품성으로 드셨는지 깊이 생각하면서, 과시하거나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진정한 이유와 이것이 왜 미덕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이유는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희생으로 어떤 보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상도 없고 인정도 없습니다.
저는 표면적으로는 과시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업무의 고생과 노력으로 어떤 보답을 받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똑똑함(內秀)을 드러내지 않는다”의 실질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정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런 인정에 대한 갈망은 간단한 “잘했어” 또는 “노력해줘서 고마워”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바라는 것은 감정적 인정, 더 정확히 말하면 ‘공감’입니다. 저에게 추가 업무를 안배하는 상사들로부터의 공감 말입니다.
저는 줄곧 상사들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인정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미 매우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 추가 임무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라는 식으로요. 일반적인 “이 임무를 해주세요”라는 소통방식이 아니라 말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저는 여기서 일하면서 제가 갈망하는 감정적 인정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 깨달음은 매우 깊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게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진정으로 의식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감정적 인정의 결핍은 이곳에서 일하는 이런 세월 동안 저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점을 깨달은 후 ‘전법륜’ 제7강의 나머지 부분을 공부할 때 거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마치 내심 깊은 곳의 무언가를 깨우고 드러내어, 마침내 그것을 제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은 해 동안 짊어지고 있던 것이 마침내 파헤쳐져 제거되고 있습니다.
공감
관리자가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좋은 관리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팀을 이끄는 경험에서 보면, 가장 어려운 것은 단순히 기자들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능을 향상시켜 최고의 기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고 느낍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솔직히 이 방면에서는 아직도 약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좋은 관리자가 되고 주변 사람들을 향상시킬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제가 다른 사람을 ‘도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보게 해준 작은 체득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늘 매우 강렬한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제 ‘좋은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합니다. 관리자로서 저는 권위가 있어 부하들에게 이렇게 해도 진정한 반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업무 후 친구와 담소했습니다. 저는 그 중 한 친구에게 매우 ‘케이시식’ 의견을 말했는데, 그들의 옷차림이 충분히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함께 쇼핑하러 가서 의복 선택을 개선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친구와의 긴 대화 중 한 마디 논평에 불과했습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저는 친구에게 한 입장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쇼핑하러 가서 옷차림을 개선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제 방식에 대해 응답해 주셨습니다. 꿈의 내용이 좀 흐릿해서 세부사항은 기억나지 않지만, ‘문득 크게 깨닫은’ 순간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납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이해했습니다. 꿈에서 사부님께서는 제 방식과 상반된 방식을 묘사하셨는데, 대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이용해 어떤 목표를 달성할 때, 그들의 가장 좋은 면을 사용하고 이 면이 더 좋아지도록 도와주어 목표를 실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깨어난 후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방식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단지 제 의지와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라는 방식으로 제 이기적인 관념을 실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꿈에서 사부님께서 보여주신 방식은 저를 감동하게 했는데, 상대방의 각도에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의 가장 좋은 면을 볼 수 있으며, 진정한 공감과 자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게 부족한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자비와 공감의 층차에 도달해야만 진정으로 제 주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회피하고 싶던 것을 억지로 마주하다
저는 운 좋게도 팀에 많은 기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개인 성장에 매우 도움이 되는데, 그들 대부분이 제 자신의 집착을 반영하거나 해결해야 할 충돌이나 시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고통스러운 시험은 한 평범한 기자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상사의 어떤 결정이 이 기자에게 영향을 미쳤고, 저를 반성하게 하여 몇 달 동안 고의로 무시해온 이 사람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기자가 제 팀에 합류한 이래 저는 그의 태도와 행위에 대해 강렬한 불편함과 반감을 느꼈습니다. 그가 매우 오만하다고 느꼈고, 어떤 상황에서는 호전적인 행위를 보여 관리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관리 직책을 공동 매니저에게 미루고, 그와는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상호작용만 유지했습니다. 그의 매니저로서 저는 사실 최종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져야 했지만, 정말로 그와 어떤 관계도 갖기 싫었습니다.
몇 달이 지났고, 불행히도 일이 임계점까지 발전해 이 기자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저는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에게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정말로 저를 이 기자와 관련된 모든 집착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친구와 제 문제를 토론한 후, 저는 이 몇 달 동안 그를 회피한 것이 그가 제게 위축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항상 논쟁이나 다툼에서 이기는 ‘강압적인’ 남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위축감과 공포의 근원을 깊이 파헤친 후, 이것이 사실 공산주의의 페미니즘 관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 페미니즘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그때는 아직 공산주의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에 기반한 관념들을 자각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런 관념들은 질투심 및 쟁투심과 상호작용하여 남성에 대한 많은 견해와 상호작용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페미니즘 관념이 ‘강압적인 남성’을 마주할 때 쟁투심을 매우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런 관념이 위협감과 공포를 느끼게 하여 강압적인 남성과의 실제 대항에서 패배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서 저는 본질적으로 강압적인 남성이 아니므로 영원히 이 ‘전투’에서 진정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이한 쟁투심과 위협감은 저를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매우 불편하게 했고, 결과는 회피였으며 기본적으로 매니저로서의 책임을 포기했습니다. 사실 제 내심 깊은 곳에서는 그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이런 불편함과 고통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마침내 제가 왜 그를 이렇게 대했는지 알아낸 후 저는 크게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깨달음은 또 다른 시험을 가져왔습니다. 제 소홀함이 최종적으로 그가 불쾌한 경험을 겪게 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했습니다. 제가 너무 형편없다고 느꼈고, 그를 실망시켰습니다. 만약 제가 응당한 책임을 졌다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에게 깊은 교훈이었습니다. 장기간의 회피는 결국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제 회피에 대해 더욱 경계하며, 그것들이 통상 한 가지 집착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상대방에게 조성한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깊이 죄책감을 느꼈고, 일주일 내내 우울했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고,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깊이 죄책감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업무 후 이 일에 대해 매우 슬퍼하여 혼자 새로운 설법을 공부했습니다. 이전에 멈춘 곳부터 시작했습니다. 읽은 첫 번째 단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번에 설법할 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수련생들은 일부 범하지 말아야 할 잘못을 범했다. 사실 오직 견정하게 법 공부를 잘하고, 당신이 잘못을 고칠 수 있고, 당신이 다시 새롭게 잘할 수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대법제자이다. 당신이 다시 잘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너무 중하게 보지 말라. 만약 당신이 사상 중에서 그것을 너무 중하게 본다면, 또 다른 일종의 후회, 근심 등 압력이 형성될 때, 당신은 다시 이런 집착에 빠지게 되어 또 걸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대법제자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인식했으면 당신은 즉시 고치고, 넘어지면 당신은 일어나 계속 대법제자가 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각지 설법2-2003년 캐나다 밴쿠버법회 설법)
이 단락을 읽고 죄책감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림으로써 다시 한번 감정이 북받쳤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비할 바 없는 감사를 느꼈습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한번 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바로 여기 계시며, 제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아시고 저를 도와주고 계신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 설법을 읽은 후 이 집착이 제거된 것을 느꼈습니다.
깊이 묻힌 집착이 파헤쳐지다
최근 한 동료와 발생한 일로 제 내심 깊은 곳에 깊이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 동료가 다른 팀 구성원의 일로 특별히 불쾌해하여 저에게 하소연하러 왔습니다. 이 일은 최종적으로 제가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의 불평을 들을 때, 차의 전조등에 비친 사슴처럼 완전히 얼어붙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감정적인 부정적 에너지를 마주하는 것이 특별히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격하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이 두 가지 충동을 모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동료가 제기한 문제를 빠르게 해결했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그 상호작용에 대해 특별히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마치 마음에 응어리가 있는 것 같았고, 그런 감정 파동에 마음이 불안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몰라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런 느낌이 업무 중 하루 종일 지속됐습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그가 자신의 분노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늦게 한 수련생과 메시지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제가 이 일에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인 것이 두려움, 특히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저는 두려움과 충돌 회피 요소가 확실히 있다고 답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면서 어린 시절 비슷한 상황들을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불같았고, 많은 어린 시절 기억이 부모님의 격렬한 다툼과 관련되어 있으며, 때로는 심지어 몸싸움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다혈질 성격과 감정 기복에서 부정적인 교훈을 배웠습니다. 공격과 감정 폭발에 맞닥뜨리면 반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대부분의 경우 반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반격 본능이 매우 강렬했지만, 최근 이런 호전성과 경쟁이란 집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이런 반사적 반응이 거의 없어졌거나 많이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쟁투심을 제거한 후 더 깊은 층의 것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남아 있는 근본 집착이 두려움과 부정적이고 무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무력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 점을 깨달았는데, 그때 감정이 무너져 내렸고 매우 깊은 무력감을 느끼며 극도의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 느낌이 반나절 밤 동안 지속됐습니다. 지금은 이미 그런 감정에서 멀어졌지만, 그날 밤 정말로 갑자기 몰려온 슬픔과 비통함에 충격을 받았고, 마치 트라우마를 당한 것 같았습니다.
무력감의 근원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이 인류가 상처와 고통을 피하려는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관념이 거꾸로 저를 일과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게 만들어 상처와 고통을 피하려 했습니다. 제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감정 기복에 직면할 때처럼, 이런 통제 불능감이 제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여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니,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깊고 숨겨진 집착을 발굴해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다시 한번 밖을 향해 보는 것으로는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 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의 첫 몇 구절을 암송할 때의 작은 체득을 나누고 싶습니다.
“대법제자의 칭호는 가장 신성한 것이다. 그는 최고 우주대법의 수련자이며, 그는 사부를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을 생명의 근본으로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수련하고 대법을 수호하는 것이 제 일위이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지금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암송할 때 첫 번째 문장의 깊이를 깊이 느꼈고, 대법제자가 되는 무상의 영광을 느꼈으며, 이 비할 바 없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은 것에 대한 깊은 감사가 따라왔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법과 함께할 때, 할 수 없는 것이 없고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오직 하나,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현재 층차의 일부 체득입니다. 적절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13/49704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7/13/4970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