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윈 금상 연기자와 어머니의 이야기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9년 이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입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 경찰에게 불법 납치되어 총 7차례 구금당했으며, 2017년 딸과 함께 중국을 떠났습니다.
수련 전에 저는 몸이 허약하고 많은 병을 앓았는데, 중의학과 서양의학 모두 치료 효과가 없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건강해졌으며, ‘진선인(眞·善·忍)’ 우주 대법을 얻게 되어 온몸과 마음이 기쁨에 잠겼습니다. 그 무렵 중국 곳곳에서 노란색 파룬 배지를 착용한 파룬궁수련생들을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연공장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가악투(假·惡·鬪-거짓, 악, 투쟁)를 추종하는 중공 악당은 진선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장쩌민(江澤民)을 우두머리로 한 악의 집단은 대법 수련자 수가 공산당원 수보다 많은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1999년 7월 20일 공개적으로 파룬궁 탄압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중공은 대법과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을 조작하여 모함하고 비방했으며, 대법 수련생들에게는 ‘명예 훼손, 경제 박탈, 육체 소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제 가족도 이 참극에서 심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제가 연공한다는 이유로 중공 관계자들은 부모님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벌금을 부과했으며, 공직에서 해고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타격을 견디지 못하시고 차례로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셨는데, 돌아가실 때 겨우 60대였습니다. 탄압에 맞서기 위해 저와 수련생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대법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제가 계속 구금당했기 때문에 딸은 어려서부터 평범한 아이가 받을 수 있는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한 살 조금 넘었을 때 제가 세뇌반에 불법 구금된 것이 기억납니다. 아이 아버지는 낮에 일하러 일찍 나가 늦게 돌아왔고, 제가 납치된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당시 아버지께서 이미 중병에 걸리셔서 또 다른 충격을 받으실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딸을 인근 유치원이나 농촌에서 도시로 일하러 온 이웃에게 맡겼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온 후 유치원 선생님이 그동안 제게 어디에 갔었냐고 물으면서, 아이 옷에서 매일 냄새가 났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데리러 오는 사람에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말해도, 다음날에도 여전히 더러운 옷 그대로 갈아입히지 않은 채로 와서 냄새가 났다고 했습니다.
제가 세뇌반에 불법 구금되어 있는 동안 아이 아버지가 주말에 딸을 데리고 면회를 왔는데, 짧은 면회 시간만 허용됐습니다. 매번 딸이 저와 헤어질 때마다 계속 울었고, 그 울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져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제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가 납치될 때마다 딸의 어린 마음에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중국에서 보낸 그 험난한 세월 동안 저는 납치되고 구금되는 것 외에도 때로는 유랑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딸도 이웃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이 좀 커서는 때때로 혼자 집에서 스스로를 돌봐야 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던 딸은 겁이 많아지고 쉽게 놀라게 됐습니다. 제가 일곱 번째로 납치당할 때는 중학교에 다니던 딸이 여름방학을 시작한 첫날이었습니다. 7~8명의 경찰이 흉악하게 우리집 문을 부수고 들어와 제게 수갑을 채우며 인터넷 수배범이라고 하면서 즉시 체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법 가택수색을 한 후 저를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집에는 저와 딸만 있었는데, 딸이 무서워하며 크게 울었습니다. 경찰이 딸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냐고 물었습니다. 딸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지만 저항하며 울면서 “엄마는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딸을 달래며 “무서워하지 마, 엄마는 파룬따파를 수련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잘못이 없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당한 탄압 중 가장 위험했던 때였습니다. 저는 외지에 불법 구금됐고, 경찰들은 저를 납치한 것을 중대 사건으로 취급하며 형사 구금한 후 판결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저는 확고한 정념을 유지하며 탄압을 부정하고 사부님의 가호를 구했습니다. 수련생들이 제가 구금된 소식을 인터넷에 올려 해외로 전했고, 경찰들은 자신들의 전화가 전 세계 파룬궁수련생들의 항의로 가득 찼다며 두려워했습니다. 한 달 후 저는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딸이 저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그날 엄마가 잡혀갔을 때 저는 사부님 법상 앞으로 뛰어가서 사부님께 엄마가 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가호해 주시기를 간청했어요.” 딸은 또 두 번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사부님께서 ‘네 엄마는 곧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소위 ‘처분보류’가 되었는데, 경찰은 언제든지 저를 재수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이미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고, 제가 자주 딸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의 환경과 사회 분위기가 모두 악화되었습니다. 딸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반항적이 되기 시작했고 학업 성적도 급락했습니다. 저는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딸과 함께 중국을 탈출했습니다. 나중에 딸은 다행히 페이톈(飛天) 학교에 입학해 무용을 배우게 됐습니다. 딸이 미국에 왔을 때는 이미 14세로, 무용을 배우기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였고 무용 기초도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의 우수한 교육과 수련 환경 덕분에 딸의 발전은 매우 빨랐습니다. 페이톈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딸은 수련 상태에 진입했고, 학습에 성실히 노력하며 이전의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바로잡기 시작하고 심성을 향상시켰습니다. 나중에 딸이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제가 중국에 남아 있었다면 완전히 망가졌을 거예요.”
딸은 점점 더 철이 들어서 방학 때 제 곁으로 돌아오면 앞장서서 집안일을 도와주고, 자주 “엄마, 고마워요”라고 말합니다. 딸은 매우 자율적이어서 학습과 수련을 스스로 철저히 관리하며 게으르지 않습니다. 전공 과목도 빠르게 향상되어 많은 우수한 페이톈 학생들처럼 점점 더 뛰어나지고 있습니다. 심성 수련 면에서도 안으로 찾아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고 나쁜 성격을 극복합니다. 집안의 수련하지 않는 어른들이 딸에게 대학 졸업 후 다른 일을 하라고 하자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학교에서 저를 길러주었으니 열심히 춤춰야 해요. 대학 졸업 후에는 무용과 대학원에 진학할 거고, 션윈 공연단을 따라다니며 대법 진상을 알리고 싶어요.” 딸이 제게 말하기를, 꿈에서도 수련 관련 시험이 있는데 일반인 세계의 스타가 되고 싶은지 아니면 션윈 연기자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고 했습니다. 딸은 션윈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고 했습니다. 딸은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성장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딸이 무용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수련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수련의 요소 때문에 딸의 신체도 신기하게 회복됐습니다. 학부모로서 저는 딸과 함께 안으로 찾아 제가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살펴보고 노력해서 바로잡으며, 딸과 함께 수련의 정념을 강화했습니다.
인류 도덕이 미끄러져 내리는 말세에 딸이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고, 페이톈이라는 훌륭한 학교에서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 교육을 받으며, 션윈을 따라 대법의 진상을 알리고 중공이 대법제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진상을 폭로해 사부님의 정법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무한한 위안과 비할 데 없는 영광을 느낍니다! 제 딸은 가장 올바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주 걱정되는 수련생이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대법제자)은 2001년 저희와 함께 외국 언론에 대법 진상을 알리고 중공의 잔혹한 탄압을 폭로했는데, 얼마 후 경찰에게 납치돼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겨우 38세였고, 수련생인 그녀는 10여 세의 아이를 데리고 그런 험악한 환경에서 생존해야 했는데, 지금은 무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만 그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할 뿐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제가 해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우연히 NTD TV의 보도를 들었습니다. 2001년에 미국 기자 필립 판(Philip Pan)이 중공에 의해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탄압받는 파룬궁수련생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생명으로 법을 실증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가 저희를 취재할 때 저는 그가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취재에 응한 수련생들은 저를 제외하고 모두 실명을 사용했는데, 그 기자는 저희의 안전을 위해 저희를 보호했으며 대법 수련생의 성명과 주소를 해외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는 밝고 정직하며 선량한 청년이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그 선량한 기자를 다시 만나서 저와 딸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고, 선량한 사람에게는 결국 좋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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