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2024년 5월과 6월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납치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들리는 바로는 성(省) 차원에서도 수십 명이 붙잡혔고, 우리 시의 모든 연공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를 받았다. 몇 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는 사람의 마음으로 대응하거나 구세력에게 빌미를 주지 않아 돌아온 경우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20여 년간 정식으로 경찰과 접촉한 적이 없었고, 평소 민감한 날짜에는 직장이나 지역사회, 파출소 경찰이 형식적으로 들르는 정도로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전에 두세 차례 감옥 박해를 겪은 이들은 매우 긴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이런 말세의 광란은 새벽 전 어둠이며, 지금까지 제대로 수련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나의 시험이다. 현재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책을 보고 같은 다섯 세트 공법을 연마하지만, 사실 각자의 내력은 서로 다르고, 이 세월 동안 사명 완수와 심성 수련에 투입한 노력과 마음을 쓴 정도도 크게 다르다. 이제 곧 끝나가는데, 더는 초중등 수준에 머물 수 없다. 진급하느냐 유급하느냐, 최후 대심판 때 결국 정해질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하는 사람이 겪는 고험(考驗)은 속인으로서는 감당해 낼 수 없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련 성취하여 원만(圓滿)한 사람은 너무나 적어 몇 사람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 관건적 시각에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기가 몹시 어렵다. 오히려 늘 구실을 찾아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위대한 수련자는 바로 중대한 고험 속에서 자아, 속인의 일체 사상에 이르기까지 내려놓을 수 있다. 나는 원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고험 속에서 걸어온 대법(大法) 수련자에게 축하한다. 당신들의 영원불멸한 생명과 미래에 있을 층차, 그것은 당신들 자신이 창립한 것이고, 위덕은 당신들 자신이 수련해 낸 것이다. 정진(精進)하라!, 이것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수승(殊勝)한 것이다.”(정진요지2-위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한 수련생이 말했다. 경찰이 매달 ‘가정방문’을 온다고 한다.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자신도 아직 구원받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남을 구한다는 겁니까? 먼저 자신부터 구하세요!” 냉정히 생각해보면, 경찰의 이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 혹시 사부님의 법신(法身)이 우리를 일깨워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자료를 배포하다 악의적 신고를 당해도 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우리가 단지 진상 자료만 나눠줄 뿐, 정작 본인은 진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마음으론 알지만 말할 용기가 없어서일까? 경찰이 한 그 말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마음이 매우 아플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구할 때 무엇으로 구하는가? 전장에서 싸우듯 총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20여 년의 박해는 모두 비방과 모함, 선전 여론을 통해 발동된 것이 아닌가? 우리 지금도 입을 열어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 진상을 알리려고 입속의 예리한 검 일제히 뿜어내네 썩은 귀신의 거짓말을 폭로하나니 다그쳐 구도하고 빨리 알리세”(홍음2-빨리 알려라).
우리를 심문하는 경찰, 검사, 판사를 마주했을 때, 진상 자료를 들고 그대로 읽을 수는 없다. 게다가 그들이 묻는 것도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다르게 질문한다. 자료를 그렇게 오랫동안 배포해왔는데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거나, 봤어도 마음 들여 기억하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것인가? 만약 감히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수련에 허점이 있고 계속 보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알고 있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에 따라 노력하고 있는데 왜 관건적인 순간에는 잊어버리는가? 우주 대법이 공격받고 비방당할 때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우주의 수호자 같아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이런 형세를 겪어보지 못했고 경찰을 직접 마주한 적도 없어 당황해서,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두려움 속에서 해서 다른 수련생을 해치고 자신의 수련 길에도 유감을 남겼다. 어떤 이는 넘어진 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련은 너무나 엄숙하다. 20여 년이 지났고 대법 서적도 50여 권이 되는데 아직도 수련 두 글자의 내포가 뚜렷하지 않고, 여전히 감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거나 대법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만 한다. 오늘날까지도 사악에 협조한다면 신을 믿는 최저선이 너무 낮다는 말이다!
관건적인 순간이 되면 한 손으로는 사람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부처를 붙잡으며, 대법제자의 사명과 칭호를 망각한다. 우리는 대법을 수호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존재다. 평소 직장 지도자나 지역사회 순찰 경찰을 마주해도 진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반인과 친해지려 한다. 그러고는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하지 않았다며 다행스러워하고, 마치 또 한 관문을 넘었다고 여긴다.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이 소중한 만남의 기회에 나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말했는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내가 설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부분에서 막혔는가?’ 명혜망 교류 글에서 다른 이들의 경험을 흡수해 장단점을 보완해야 한다.
어떤 이는 의혹을 품는다. ‘진상을 그렇게 오랫동안 말했는데 왜 경찰은 여전히 사람을 붙잡는가?’ 이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일반인의 매년 진학 시험으로 비유하면, 100점 맞는 사람도 있고 낙제하는 사람도 있다. 이 시험 문제들이 출제자가 이해하지 못해서 낸 것인가? 몇 점을 받았는지는 각자의 시험지에 적혀 있다. 누군가 잘 봤다고 해서 온 반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모두 명백한 일면이 있다. 같은 경찰도 서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태도가 다르다. 왜인가? 우리 자신이 진상을 명백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련은 모두가 함께 몰려갈 수 없고, 각 개인이 모두 확실히 법의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시련에 직면했을 때 어떤 이는 생사를 내려놓고 정념으로 관문을 돌파하지만, 어떤 이는 세뇌반도 넘지 못한다. 경찰이 명백하지 않아서 그런가? 진정 명백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신이다.
누군가의 신고를 받았을 때 진상 자료를 위해 변호하지 못하고, 공안·검찰·법원을 마주해 진상을 말하지 못한다. 나는 왜 자료를 배포하는가? 왜 사람에게 삼퇴를 권유하는가?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박해를 줄이기 위해 변호한다. 개별 변호사가 피고인을 변호할 때도 “그는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아 파룬궁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인식하지 못했으니, 판사님께서 형량을 줄여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수련생도 이 말을 빌려 진상을 말하지 않는다.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순리에 따르지만, 다른 공간의 구세력은 우리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자료를 배포하러 나가는 것은 무엇을 실증하려는 것인가? 첫 번째 박해 후에 자신이 박해받은 원인을 찾았는가? 두 번째 박해 때, 처음에 왜 박해받았는지 찾아봤는가? 허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한 걸음 물러서서 찾지 못하고 찾을 줄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수련할 줄 모르고 여전히 사람의 마음으로 수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빨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진심으로 임해야 한다!
한 노년 여성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별다른 말을 할 줄도 몰랐지만 사악한 박해에 직면해서는 단지 두 마디만 견지했다. “파룬궁은 사악하지 않다. 진선인(眞·善·忍)은 사악하지 않다.” 그녀는 한 글자도 서명하지 않았다. 경찰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다시는 두 번째, 세 번째 넘어짐이 없었다.
그 ‘최고법원, 최고검찰원’이 사이비종교 여부의 ‘인정 의견’을 지방과 시급 공안에 하달했다. 즉, 공안 경찰이 수사관이자 동시에 재판장이라는 뜻이다. 검찰원, 법원은 모두 형식적인 장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첫 번째 관문, 경찰을 마주하는 시험장에서 잘 봐야 하고, 그러면 검찰원이나 법원까지 가지 않게 된다. 이것은 내가 20여 년간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일부 법리가 뚜렷하지 않은 수련생은 아직도 요행심을 품고 있다. ‘법원까지 가면 변호사가 무죄 변론을 잘해서 610과 경찰을 말문이 막히게 만들 텐데 뭘 걱정해?’ 변호사가 법정에서 하는 변론이 판사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데, 왜 어떤 수련생들은 여전히 그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 걸까? 어떤 이는 더 무겁게 판결받기도 한다. 사실 최후 판결은 다시 공안 국보(國保, 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손으로 돌아간다. 국보대대는 사실 공안의 610이다.
왜 이럴까? 우리가 첫 번째 시험에서 백지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검찰기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법원에서 변호사를 청해 대신 시험을 보게 하지만, 시험지에 떨어지는 것은 다른 이의 이름이다. 판사는 때로 “우리도 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미 독립적인 권력이 없고 그들의 위는 바로 국보, 610이다. 공안·검찰·법원·사법[公檢法司]는 형제 같아서, 서로 얼굴에 먹칠을 하겠는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감싸주며 한통속이다
본질은, 우리가 이런 박해 뒤에 있는 다른 공간의 시험관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사부님과 바른 호법신이 있고, 한편으론 ‘구세력’이 있다. 대법에 부합하면 사부님께서 우리를 관여하시고,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홍음2-사도은(師徒恩)]가 된다. 우리가 정념이 없어 잘하지 못하고 구세력에게 빌미를 잡히면, 사부님도 감싸주실 수 없다. 우리는 수련인이지 일반인의 시험처럼 점수를 뒷거래하거나 뇌물로 돈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의 길을 걷는 수련인에게 이 점수는 사람이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농담으로 말하면, 만약 사람이 점수를 매길 수 있었다면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우리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진작 공안·검찰·법원 관리들이 자기 친척들을 다 합격시켰을 것이다.
다행히 수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잘할 기회가 있으니 낙담하지 말자. 우리가 낙담해서 넘어진 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세력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고, 당신이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약간의 얕은 견해로 법에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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