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이전에 나는 법 암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끈기 있게 견지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법을 외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어서, 첫 번째로 외울 때는 제5강부터 시작했다. 그때 마침 그 강의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뒤의 몇 강의를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 시기에는 정진하지 않았고, 법을 외울 때도 마음이 고요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많은 법리가 눈앞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일을 만났을 때도 사부님의 법에 비추어 안으로 찾지 못했다.
1. 사부님의 점화로 다시 법을 외우기로 결심하다
주변 수련생들은 이미 몇 년째 법을 외워 왔고, 여러 번 나에게 법 암기를 권했다. 온라인에서도 수련생들이 법 암기의 좋은 점을 교류하는 것을 봤다. 그러나 나는 줄곧 법 암기도 실수(實修)의 일부분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올해 한 노수련생의 교류 문장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는 매일 다섯 가지 공법을 한 번에 할 수 있었고,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이 연공하기도 했으며 몸의 변화가 매우 컸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신수련생으로서 몸이 젊은 쪽으로 개변되지 않는 것은 내가 연공을 너무 적게 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사부님 말씀이 생각났다. “‘수(修)·련(煉)’ 두 글자에서 사람들이 그 련(煉)만을 중시하고 그 수(修)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전법륜)
‘다섯 가지 공법을 한 번에 하는 것은 나에게 아직 다소 어려울 수 있으니, 먼저 법 암기로 마음을 수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대법에 동화되자!’
2. 법 암기 후 몸 안의 좋지 않은 물질들을 수련해 없애다
조급한 마음을 수련해 없애다
법 암기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 구절 한 구절 외워야 하며, 이 구절을 외운 후에는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외우고, 앞 구절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련생이 교류해 준 암기 방법이다.
제1강의 첫 번째 단락을 외울 때는 매우 빠르게 외울 수 있었는데, 이 단락을 여러 번 외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단락이나 문장들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어야만 외울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몇 번 더 읽으면서, 이 구절의 법 중에서 어느 몇 곳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 외우지 못하는지를 살펴봤다.
매일 아침 법을 외우기 전에, 나는 사부님께 향을 올리며 가지해 주시기를 청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한 시간에 세 페이지만 외울 수 있었던 것이, 나중에는 다섯, 여섯 페이지를 외울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정해진 시간 안에 법 암기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을 때는, 오늘 왜 법을 적게 외웠는지 생각해봤다. 나는 법을 외울 때의 추구하는 마음, 조급한 마음, 형식만 따르려는 마음 등 이런 좋지 않은 인간적인 마음을 찾아냈다. 이런 마음들이 내가 고요한 마음으로 법을 외우지 못하게 했으며, 이는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법에 동화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 나는 깨달았다. 법은 내가 얻고자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나는 단지 법을 외우겠다는 소원을 품고, 견지해서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항상 얻으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법 암기 과정 역시 심성을 수련하는 과정이며 속도와 수량을 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법 암기는 통독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 구절의 법을 매우 빠르게 읽어 지나가서 한 시간에 많은 법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중에 책을 덮으면 한 구절의 법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진정으로 고요한 마음으로 법을 외울 때, 나는 외울수록 더 외우고 싶어지고, 책을 들면 내려놓기 싫은 상태가 되는 것을 발견했다. 때로는 이런 상태가 되기도 했다.
나태심을 수련해 없애다
어느 날 새벽 3시가 넘어 깨어났는데, 뒤척이다가 잠들지 못했다. 잠들 수 없었지만 나는 일어나서 법을 외우거나 연공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누워 있자!’ 둘째 날 하루 종일 꽤 정신이 좋았고 연달아 이틀이 그랬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나태심이라는 물질을 없애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은 한잠 자면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
셋째 날부터 나는 다시 내 시간을 안배하여 정진했다. 처음에는 알람을 30분 앞당겨 5시 20분에 일어났다. 이렇게 아침 시간에 먼저 30분 연공한 다음, 거의 1시간 동안 법을 외워서 7시 이전에 이런 것들을 모두 잘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나는 다시 생각했다. ‘좀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제5장 공법에서도 돌파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나는 조정해서 알람을 4시 50분으로 맞췄다. 지금 그 시기를 되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내가 정진하려는 이 마음을 보시고, 나태심이라는 물질을 수련을 통해 없애도록 가지해주신 것이었다.
이익심을 수련해 없애다
보통 나는 아침에 아침밥을 만들어도 먹을 시간이 없어서 바로 출근했다. 때로는 시간이 맞을 때는 길에서 만두를 사 먹기도 했고,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과일을 조금 먹고 점심에 밥을 먹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탁자가 하나 있는데, 동료들이 가끔씩 먹을 것을 조금 가져와서 한가할 때 먹곤 했다. 나도 가끔 제철 과일을 사거나 집에서 먹다 남은 것을 가져가기도 했다. 항상 남의 것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중에 한동안 동료들이 사온 간식이 꽤 많아서 다 먹지 못하자, 천천히 나도 모르게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좋네, 아침밥도 사 먹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있으니 내가 조금 먹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안 먹으면 아깝잖아? 게다가 때로는 나도 사오기도 하잖아?’
이렇게 해서 일이 한가할 때마다 나는 시간이 있으면 간식을 조금 먹게 됐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좋지 않은 마음, 작은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그것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예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날씨가 더울 때 동료가 더위를 식히라며 아이스크림을 가져온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큰일도 아니지’라고 생각했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 나중에 동료가 또 아이스크림을 가져왔을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이익심이 아닌가? 내가 남의 것을 먹으면, 나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덕을 줘야 하는가! 겉으로는 내가 남의 것을 먹어서 내가 이득을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자신의 소중한 덕을 가져다 교환하는 것이니, 나는 얼마나 바보인가!’
그 후로 나는 다시는 남의 것을 먹지 않았다. 무엇을 먹고 싶으면 스스로 샀고 남이 무엇을 주어도 받지 않았다. 예전에는 남의 것을 좋아해서, 동료가 어떤 괜찮은 의류나 용품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 내가 먼저 챙기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것들을 나도 쓰지 않아서 결국 버린 적도 많았다. 법 암기 과정에서 사부님께서는 내 이익심, 작은 이익을 탐내는 마음, 노력 없이 얻으려는 마음을 제거해주셨다.
물론 법 암기 과정에서 항상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안일한 마음이 일어나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졌고, 법을 외우는 속도도 그에 따라 떨어졌다. 한 차례 교류에서 나보다 늦게 법 암기를 시작한 수련생이 곧 제5강까지 외울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수련생은 매일 견지해서 외웠기 때문이었다. ‘이건 날 곧 따라잡으려는 게 아닌가? 내가 뒤처진 게 아닌가?’ 나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계속 견지하며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법을 외운 지 두 달이 넘은 그 시기에는 사부님의 가지 하에 며칠 동안 10여 페이지를 외울 수 있었고, 머리가 피곤해 더 이상 외울 수 없을 때는 잠시 쉰 후 다시 계속 외우며 용맹정진했다.
3. 대법에 비추어 안으로 찾는 법을 배우다
법을 외움으로써 생활 중에 갈등을 만났을 때 나는 사부님의 법에 비추어 일을 만나면 안으로 찾아서 이기심을 수련해 없앨 수 있게 됐다.
기억나는 것은 어느 일요일이었다. 친정에 조금 일이 있어서 저녁 무렵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낮에는 날씨가 더워서 저녁에 날씨가 시원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막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나에게 아주 큰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남을 위해 생각할 줄 모르고, 늦게 돌아오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밥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좋은 일이고, 그는 나의 심성을 높이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화를 낼 수 없고,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 일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나는 그의 입장에서 그를 위해 생각하지 못했고, 그는 나를 기다리며 밥을 먹어 배가 고팠고, 일하느라 매우 피곤했을 것이다. 내 마음은 매우 평온했고 그와 다투지 않고 매우 진정성 있게 그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돌아오는 게 늦었어요. 앞으로는 일찍 돌아오고, 혹시 늦게 돌아올 일이 있으면 미리 한 마디 할게요.”
또 한번은 동료를 통해 무의식 중에 미리 알게 됐는데, 올해 나에게 분배된 일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상사에게 가서 하소연해볼까?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좀 더 가벼운 일로 배치해 달라고 해보자.’ 상사 사무실 계단 입구에서 나는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냥 떠났다.
잠시 후 동료가 안 좋은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가 상사 사무실 그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내가 상사를 찾아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업무 배치도 아직 발표되지 않았는데, 벌써 상사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으니 상사도 기분이 안 좋을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상사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나는 동료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게 되어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동료는 선의로 알려준 건데, 내가 만약 정말 이 일 때문에 상사를 찾아갔다면 그녀에게 문제가 될 수 있고,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이며, 업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덕을 줘야 했을까! 게다가 상사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모두가 힘든 일을 꺼린다면 업무를 어떻게 배치할 수 있겠는가?
수련인으로서 나는 속인처럼 행동할 수 없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어떻게 편안할지만 생각할 수는 없다. 내가 마땅히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남에게 빚을 지는 것과 같다. 나는 수련하니까 속인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들을 만나는 것은 모두 우연이 아니고, 모두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며, 이것을 이용해 내 안일한 마음,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수련해 없애서 나를 제고하게 하시는 것이다. 돌아와서 나는 가족에게 말했다. “오늘 심성관을 꽤 잘 넘겼어요. 사부님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제자 곁에 계시며 제자를 보호하고 계신다.
올해 출퇴근 시간이 조정되어 출근 시간은 예전보다 빨라지고 퇴근은 더욱 늦어졌다. 매일 10여 분을 일찍 나가야 하고 지각이 규정 횟수를 초과하면 월급이 깎였다. 나는 ‘깎으라면 깎으라지, 지각한다고 휴가를 못 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월급을 깎는 것은 그나마 낫겠지!’라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이 직원들이 당신들의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배운 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상사가 무슨 일을 맡기든지 가린 적이 없고, 이익 앞에서도 다투지 않습니다”(전법륜)라는 법리를 강의하셨다. 법을 외움으로써 ‘성실하게 일한다’는 이 몇 글자가 자주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최근에 나는 이 단락의 법에 대해 새로운 체득이 있다. 예전의 나는 틀렸다. 나는 늘 자신이 어떻게 해야 손해를 안 볼까만 생각했는데, 직장마다 모두 규칙이 있어 누구나 지켜야 한다. 더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일찍 와서 늦게 가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단지 시간 맞춰 출퇴근하라고 요구했을 뿐인데, 이게 무슨 잘못인가? 만약 모두가 지각하고 조퇴한다면, 직장 효율성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겠는가? ‘성실하게’를 하루 이틀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항상 이 몇 글자대로 해내려면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예전에 깨닫지 못하고, 늘 집에 있는 시간만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 아침에 집에서 이것저것 하며 꾸물거리길 좋아했다. 항상 간신히 시간 맞춰 출근했고, 때로는 늦게 일어나 몇 분 지각하기도 했지만, 월급이 깎인 적이 없어 마치 큰 이득을 본 것처럼 느꼈다. 이것이 수련인의 표준에 부합하는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것이 사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득이 될까만 생각했으니 얼마나 좋지 않은 마음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평하며 흘러갈 수 없다. 대법으로 가늠하여 사심을 수련해 없애야 한다.
예전에도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법공부를 정진하지 않아 어떻게 찾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몰랐다. 법을 외운 후 갈등에 부딪혔을 때 나는 사부님께서 강의하신 어떤 단락의 법에 비추어 자신을 수련할 수 있게 됐다. 사부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제자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이며, 사부님께서 항상 제자 곁에서 제자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질투심, 쟁투심, 원망심, 이익심, 정(情), 색욕심 이런 방면에서 내 수련이 부족하므로, 앞으로 이런 방면을 주의 깊게 수련하여 자비심을 수련해내고, 위사위아(爲私爲我)를 수련해 없애고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수련해내어 이 대법에 동화되고,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원만히 이루겠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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