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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다시 태어난 날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올해 저는 일흔다섯 살이 됐습니다. 5·13 세계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날을 맞아 명혜망의 원고모집을 계기로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적어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선천적으로 안고 태어난 고통—피부병

1995년, 마흔다섯 살이었던 저는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수련하기 전까지 저는 온몸에 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허리와 등이 아팠고 부인병도 있었으며, 끔찍한 어지럼증에 시달렸습니다. 발작이 시작되면 세상이 빙빙 도는 듯했고 구토가 멈추지 않았으며,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저를 마흔다섯 해 동안 괴롭혀온 선천성 피부병이었습니다.

저의 이 피부병은 선천적인 것으로,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오른쪽 발등에 커다란 노란 물집이 있었는데, 조금만 건드려도 터졌고 터지면 노란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이어서 고름이 흐르고 피도 흘렀습니다.

제 아버지는 교사였는데, 저는 평생 아버지가 화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태어난 이후 어머니는 일이 바빠 저를 돌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늘 아버지가 약을 발라주셨습니다. 먼저 과산화수소로 소독한 다음, 물집이 딱지가 빨리 생기도록 붉은색 약이나 자주색 약을 발랐습니다. 하지만 딱지가 생겨도 조금만 건드리면 피가 나고 다시 노란 진물과 고름이 흐르면서 또다시 약을 발라야 했습니다. 어릴 때는 너무 어려서 많이 울고 떼를 썼고, 부모님은 그런 저를 안쓰럽게 여겨 자주 옷깃을 눈물로 적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생후 한 달이 되자마자 혈청 주사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피부병을 치료한다는 의사를 보기만 하면 집으로 모셔 와 저를 진료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떠돌이 의원까지도 절대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처방을 받고 약을 먹었지만, 제 병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한 노인 중의사가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혈액 속에 벌레가 있어 이 노란 물집이 생기는 것이며, 핏속에 벌레가 있기 때문에 이 병은 뿌리부터 고칠 수 없고 평생 낫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혈청 주사를 맞았더니 점차 오른쪽 발등의 물집이 사라졌습니다. 가족 모두가 기뻐했고 아버지는 특히나 기뻐하시며, 제가 마침내 이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너무 짧았습니다. 단지 1년 후, 그러니까 오른쪽 발등의 노란 물집이 가라앉은 지 딱 1년이 되었을 무렵, 저는 다시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고작 두 살배기 아이였습니다. 오른쪽 발등의 물집이 나은 자리에 흉터가 남았고 병은 두 발목에서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점차 위로 퍼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물집이 다리에, 가슴 앞쪽에, 등, 그리고 목까지 번지며 온몸이 연결되듯 퍼졌습니다. 이번에는 혈청 주사를 맞아도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안고 중의사에게 달려갔습니다. 두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인생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이 끝도 없는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의 가슴은 매일 같이 저로 인해 무척 아프셨습니다.

해마다, 날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 병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면봉을 들고, 먼저 과산화수소를 묻혀 물집이 생긴 부위를 소독한 뒤, 붉은색 약과 자주색 약을 발라 물집이 조금이라도 빨리 딱지가 생기도록 해 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용한 면봉이 도대체 얼마만큼이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철이 들 무렵부터는 몸의 앞부분은 제가 스스로 닦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고, 등의 약은 할머니께서 발라주셨습니다. 병이 심하게 도질 때면, 그 고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프고 가려우며 속이 뒤숭숭해서 견디기 힘든데, 긁을 수도, 손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어 아무런 방법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불 속에 누워 조용히 울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반소매 옷을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항상 몸을 꽁꽁 싸매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제 피부병을 볼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온몸 구석구석에서 고름이 흐르지 않을 때조차, 살갗은 온통 피가 낭자했고 멀쩡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대로 씻을 여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조금 자라서 공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목욕하는 동안 온몸이 따갑고 가렵고 자극이 심했지만, 그땐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욕을 마친 뒤 사람들에게 들은 말은 “다시는 목욕탕에 오지 마세요”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매일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밤에 잠자리에 들 때였습니다. 온몸에 물집이 잡히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면 피부에 들러붙은 옷가지를 손으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내야 했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떼어낸 뒤, 버린 책 종이를 살갗과 옷 사이에 하나씩 껴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물집에서 진물이 흘러도 옷에 스며들지 않아 밤새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저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종류의 한약 환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환약은 모두 동물의 잔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냄새만 맡아도 비릿하고 고약했습니다. 매일 같이 반드시 먹어야 했고 먹고 나면 늘 메스꺼웠습니다. 환약을 삼킨 후에는 반드시 붉은 대추 하나를 먹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추가 제법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매일 같이 환약을 먹고 대추를 먹다 보니, 나중에는 대추마저 입안 가득 환약 맛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붉은 대추만 보면, 그때의 입안 가득했던 환약 맛이 떠오릅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저는 늘 친구들이 저를 무서워하거나 놀릴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매일 온몸을 꽁꽁 싸매고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솜저고리와 솜바지만 입었고 밤에 기숙사 불이 꺼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솜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책을 찢은 종이들을 몸 아래에 깔고 위에도 덮은 다음,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환약을 한동안 복용한 후, 제 몸에 나던 노란 수포는 예전처럼 온몸에 한 덩어리로 퍼졌던 것에서 여러 부위에 흩어져 나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부위는 딱지가 앉은 뒤 흉터가 아물기도 해서, 예전처럼 온몸을 뒤덮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환약을 먹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졌고, 기숙사에서 교실까지의 불과 2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조차 끝까지 걸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께 편지를 써야 했고, 그 후로 저는 1년 동안 휴학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다시는 약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몸에서 피가 나든 고름이 나든 약은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환약을 계속 먹다가는 몸이 완전히 망가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1978년, 저는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그해 저는 결혼을 했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시골 아가씨였고 또 스스로 피부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시가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들이 하나 생겼고 시부모님과 함께 1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제 남편은 자기 집에서 항상 구박받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그를 학대했고, 남편이 무엇을 하든지 전부 잘못된 일로 여겨 꾸짖었습니다. 남편이 사시가 된 것도, 그가 한 살 때 울고 보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다리를 붙잡고 그를 바닥에 내던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로 사시가 됐고 그것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큰 병원들을 다 돌아다녔지만 눈은 끝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세 여동생들 역시 그에게 잘해주지 않았고, 그는 집안에서 전혀 지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한 후,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댁에서도 저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께 효도하고자 노력했는데 시아버지가 출근하시기 전에는 세수할 물을 준비해드렸고, 퇴근하시면 발 씻을 물을 떠드렸습니다. 시부모님이 아프셔서 입원하셨을 때는 정성껏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병원에 가져가 직접 입에 떠먹여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저는 직장이 없었고, 남편의 월급은 33위안으로 세 식구가 생활하기에도 빠듯했습니다. 제 외사촌동생이 자주 야채나 달걀 같은 맛있는 것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저는 그 절반을 시어머니께 드리곤 했습니다. 시간이 나면 세 시누이의 아이들을 위해 털모자를 짜주고 신발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진심을 다해 그 가족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소용 없었습니다. 저는 자주 아무 이유 없이 둘째 시누이에게 욕을 먹었고, 시부모님은 그 소리를 듣고도 한 번도 나서서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딸로서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시누이는 저를 “엄마 아빠도 없는 사람”이라고 모욕했습니다. 제가 방금 한마디 되받아 말했더니, 둘째 시누이가 달려와 저를 때리기 시작했고 저는 몸을 빼낼 수조차 없었으며, 그 모습을 본 제 아들은 겁에 질려 크게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일이 커질까봐 두려워서 바로 주민위원회 사람을 불러 둘째 시누이를 끌고 가게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이웃들도 지켜봤고, 제 처지를 잘 알게 되어 모두 마음속으로 저를 너무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 저는 겨우 참고 있었지만 그 참음은 체념하고 굴욕을 삼키는 인내였고, 울분을 꾹 눌러 참는 인내였습니다. 저는 제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고 생각했고, 구박만 받던 남편과 결혼해서 덩달아 고생하게 됐으며, 한밤중에 몰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후 둘째 시누이가 출가했고, 저와 남편도 시댁에서 분가하여 따로 살게 되면서 저와 둘째 시누이는 다시는 아무런 왕래도 하지 않게 됐습니다.

다시 태어난 날들

1995년, 마흔다섯 살이었던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저에게도 사부님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법을 수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부님께서 제 몸을 정화해 주셨습니다. 양쪽 발목부터 시작해서 점점 피부병이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수련을 시작한 이후로는 온몸에 나던 수포들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피가 나긴 했지만 단지 조금 가려운 느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목욕할 때마다 아프고 가려워서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틀에 한 번씩 목욕을 했고, 목욕할 때 온몸이 너무나도 편안해졌습니다. 씻을수록 더 개운하고, 씻을수록 마음이 더 평온해졌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노란 수포는 딱지가 지고 나면 흉터만 남았고 더 이상 진물이나 고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딱지가 진 부위에는 하얀 물집이 생겼고 그 하얀 물집에는 점차 하얀 뾰족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바늘로 그 하얀 뾰족한 부분을 살짝 터뜨렸고 그 안에는 조그만 좁쌀보다도 더 작은 단단한 둥근 물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둥근 것을 꺼낸 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자리는 연한 흰색 흉터로 남았습니다. 지금은 제 온몸에 연한 흰색 흉터만 조금 남아 있을 뿐, 피부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지 약 두 달쯤 됐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고, 두 발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난 저는 ‘이건 사부님께서 내 몸을 정화해 주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원래는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이제는 가볍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어지럼증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약도 먹지 않았고 주사도 맞지 않았으며, 돈 한 푼도 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고통도 없이 어지럼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매일 정신이 아주 맑고 활기찹니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절망 속에서 끌어내서 건강을 얻게 해주셨고 지옥에서 천당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제자인 저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해도 사부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원한을 풀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까지, 저는 둘째 시누이 집과 전혀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더 이상 그녀와 다투지는 않았지만 깊은 원한은 제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자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시누이가 남편에게 못되게 군다고 해서, 왜 나까지 미워해야 하지?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러는 거지?’ 이런 의문은 제가 수련의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풀리게 됐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설법을 반복해서 학습하며 한 가지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어느 생에서인지 제가 그들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번 생에는 이 집에 와서 그 빚을 갚으러 온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저는 사부님께서 이미 저에게 이 만고에 다시 없을 고덕대법(高德大法)을 얻도록 안배해 주셨으며, 그 십 년은 제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난관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법을 계속 배우고 심성이 향상됨에 따라, 제 안에 있었던 원한도 점차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둘째 시누이의 딸이 결혼할 때, 저는 기꺼이 결혼식에 참석했고 축의금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 가족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들은 모두 삼퇴(중국공산당의 당·단·대 조직에서 탈퇴)했습니다. 그 후로 둘째 시누이의 저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고 저에게 매우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양심과 선한 마음을 되찾은 모습을 보니, 저도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저는 더욱더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대법은 저에게 원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둘째 시누이 가족이 진상을 알고 구원받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대법을 수련한다면 정정당당해야 한다

몇 해 전 초여름의 어느 날, 저는 시장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한 청년이 사과를 팔고 있었고 사과가 꽤 좋아 보여서 몇 개를 샀습니다. 지급한 돈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ㅈ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적힌 진상 지폐였습니다. 제가 돈을 건네자, 청년은 지폐를 살펴보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 돈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저는 사과를 들고 얼른 발을 옮겨 자리를 떴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는 두근두근 겁이 나 심장이 요동쳤고 집에 돌아와서도 다리가 계속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아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정말 대법제자인가? 사부님께서는 나를 지옥에서 건져 깨끗이 씻어주시고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대법을 전해주셨건만, 나는 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법을 많이 배우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부님의 법을 반복해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면 그놈은 붙잡을 것이요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 수련하는 사람은 법을 간직하고 있다네 정념을 발하면 썩은 귀신 터져버릴지니 신이 세상에서 법을 실증하고 있음이로다”(홍음2-두려울 것 뭐냐)

얼마 뒤, 저는 다시 그 시장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시장에 막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파룬궁(法輪功)!”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또 그때 그 사과를 팔던 청년이었고 이번엔 저를 향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워낙 커서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갑자기 ‘정정당당(正正堂堂)’이라는 네 글자가 번쩍 떠올랐습니다.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히 걸어가 조용하고 온화한 태도로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는 제가 정말로 다가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저… 저는 당신 부른 게 아니에요.” 제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또 사과 팔고 계시네요? 이따가 다시 돌아올 때 사과 사 갈게요.” 그렇게 말한 뒤, 저는 먼저 다른 장을 보러 갔습니다.

장을 다 보고 난 뒤, 저는 다시 그 청년에게 가서 사과를 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말씀하신 대로 정말 오셨네요!”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서 채소를 팔고 있던 또 다른 청년이 말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분들은 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대법 사부님께서 저희에게 가르쳐주신 건 바로 ‘진선인(眞·善·忍)’이에요. 제가 산다고 말했으면, 꼭 와서 사는 겁니다. 저희 수련생은 진선인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떠나려 할 때, 두 청년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걸었습니다. 문득 얼마 전 있었던 일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떠올랐고, ‘이것은 사부님께서 제 심성을 높이도록 안배해주신 거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저의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상을 알리는 내용을 적은 지폐를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2년 전, 한 번은 아이를 수업에 데려다주려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진상을 알리며 삼퇴를 권했습니다. 그 기사는 삼퇴에 동의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삼퇴하면 평안을 보장받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돈에서 봤어요.”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격려하시며 세 가지 일을 계속 잘하라고 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중생은 모두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내게 온전한 가정을 주시다

몇 년 전, 저는 손녀가 쓴 일기를 보고 나서야 아들과 며느리가 한 차례 중상을 입는 교통사고를 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차량은 현장에서 바로 폐차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그들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아들과 며느리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차 한 대로, 며느리의 언니 가족은 또 다른 차로 함께 연길(延吉)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관광지를 찾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날 밤 그들은 숙소를 찾지 못해 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돌아오던 중, 제 아들이 피로한 채 운전을 하다가 도중에 차가 전복되어 차는 현장에서 완전히 폐차됐습니다. 당시 차 안에는 제 아들과 며느리만 있었고, 손녀는 며느리의 언니 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손녀는 부모님의 차가 전복된 것을 보고 차 안에서 큰 소리로 사부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모든 걸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외쳤습니다. “대법 사부님, 우리 아빠 엄마를 살려주세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며느리의 언니, 그 남편, 그리고 행인들이 도와서 제 아들과 며느리를 부축해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며느리는 외상도 내상도 전혀 없었고, 아들도 머리와 손에 약간의 찰과상만 있었으며 내장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었습니다. 모두 대법 사부님께서 그들 가족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손녀는 어릴 때부터 제가 키웠고, 저와 함께 ‘홍음’을 외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법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대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집에 올 때마다 사부님께 드릴 과일을 사 와 공손히 올립니다. 우리 온 가족은 세상의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해도 사부님의 크고도 넓은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 며느리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법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녀는 줄곧 순조롭게 일을 해왔습니다. 기술직에 종사하는 그녀는 처음에는 기술원으로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지니어가 됐고 그녀가 지도한 제자들도 성과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현재는 이미 교수로 재직 중이며, 급여도 상당히 좋습니다. 그녀가 출장 갈 때마다 저는 항상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라고 외우라고 당부합니다. 그녀는 매번 순조롭게 다녀오고 안전하게 돌아옵니다. 그녀는 아주 진심 어린 태도로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 정말 계속 외우고 있어요.” 그녀의 업무는 매우 순조롭고 맡은 과제도 훌륭히 완수해 상사도 매우 만족해합니다.

2003년 전후,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파출소에서 제 아들에게 전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들이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저는 아들이 제 안전을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파룬따파는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겉으로는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집의 법공부팀은 1999년 초부터 시작되어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으며, 아들은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공부 날이 그의 휴일과 겹치면, 그는 아무 말 없이 밖에 나가 산책하거나 시간을 보내고 우리가 공부를 마치면 다시 돌아옵니다. 단 한 번도 방해하거나 영향을 준 적이 없습니다. 수련생이 집에 찾아올 때마다 그는 늘 밝은 얼굴로 기꺼이 맞이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위대하신 사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명혜망 2025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5년 5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5/26/495252.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5/26/495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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