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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대해 다시 말하다

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 명혜망에서 ‘상식’이라는 글을 읽었다. 요지는 많은 일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으니, 사악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즉 사악이 한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둘러싸고 논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상을 알려야 하지만, 쇠뿔을 파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악을 너무 크게 보게 되고, 길을 잃기 쉽다.

상식을 회복하고, 상식을 가지며, 전통 관념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래야만 남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바람 따라 흔들리지 않으며, 주견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좌파 언론이 여론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정념을 유지하고 올바른 이념을 고수했는데, 이는 신이 인간에게 전해준 올바른 상식을 따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성별은 몇 가지인가? 이른바 ‘워크(woke)’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많은 정의를 내놓을 것인데, 이러면 당신은 논리적 문제인지 도덕성 문제인지, 돈과 권력의 문제인지 교육의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들의 말장난에 깊이 빠져들어 가면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상식으로 돌아가면, ‘성경’의 상식이 알려주듯이, 하나님은 단지 남자와 여자만 창조했으므로 바로 명확한 답을 얻게 된다. 인류는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성별만 있다.

수련에도 사실 상식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대법 수련에서는 우선 신사신법(信師信法)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식이다. 가벼운 예를 들어보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선장을 믿지 않는다면 항상 조마조마하며 바다에 뛰어들 준비를 하거나 중간에 내리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 예가 그리 적절하지는 않지만, 사부님에 대한 믿음은 확실히 매우 중요하다. 어떤 수련생은 법만 믿고 사부님은 믿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역시 수련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다. 수련하다 보면 자신의 업력, 오성과 감당 능력의 제약을 받는 외,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관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부님을 믿지 않는 구실이 될 수 없다. 정말 대법을 믿는다면 법을 사부로 삼고, 항상 법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심성을 향상시킬 것이다.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나 관건적인 시기에는 더욱 그렇게 할 것이다. 여러 해 법을 배웠음에도 법을 사부로 삼을 줄 모른다면, 진정으로 법을 믿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또한 왜 믿는지, 왜 믿지 않는지, 자신이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인간 세상에서 ‘난 총리도 할 수 있다’는 그 자아를 믿는 것인가? 그 자아가 당신을 원만에 이르게 하고, 천국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가?

신사신법하는 수련인은 ‘전법륜(轉法輪)’과 ‘전법륜’의 이해를 돕는 경문만 있으면 갈수록 선해지며, 권세를 내세우는 이른바 ‘강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수련할수록 흉금이 더 넓어져 다투고 싸우지 않을 것이며, 오늘은 특무(스파이)를 잡고 내일은 천하를 호령하며 중공의 ‘계급투쟁’을 수련생들 속으로 들여오지 않을 것이다. 수련할수록 더 절제하고 온화하며 선해질 것이다. 진정으로 대법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고, 하늘의 공을 가로채지 않을 것이며, ‘전법륜’을 속인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여기면서, 몇 번 읽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아직 수련의 문턱에 서 있고,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세간에 내려온 대법제자로서 정법이 거의 끝나가는데, 아직 마음을 들여 수련한 적이 없다면 다급한 상황이 아니겠는가? 같은 학년 학생들은 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아직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고, 숙제도 해 본 적이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수련에는 유급이 없다.

최근 매체 항목에 적지 않은 파동이 있었다. 일부 수련생이 내부에서 세력을 끌어모으고, 매체의 권위를 이용해 지역 수련생 채팅방을 ‘점령’한 것이다. 어떤 이는 상식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교훈 삼아 수련 제고하기는커녕, 좋지 않은 사람과 물건에 현혹되어 이끌려갔다. 또 어떤 이는 안팎을 가리지 않고, 수련인의 심성 제고를 위한 갈등과 중생구도의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속인 사회에 공개했는데, 무슨 목적인가? 자신을 실증하고 과시하려는 것인가? 법률을 모르고, 수련생 회사의 특징을 모르며, 수련인과 속인의 구별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대규모로 전하기 위해 발송된 문자, 이메일, 편지는 마치 엎지른 물과 같은데, 다시 담을 수 있겠는가? 충분한 상식이 있었다면(예를 들면, 좋은 사람은 겸손하고 절제하며, 수련인은 이성적이다), 이처럼 수련생들을 휘젓고 난귀(爛鬼)와 중공에게 무기를 건네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자와 편지를 받은 수련생들도 수련의 기본 상식이 있었다면, 생각 없이 끌려가지 않을 것이며, 맞장구를 치면서 사태를 커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수련생이 400~500명 규모의 채팅방에 초대됐지만 바로 탈퇴했는데 왜 그랬을까? 대법제자의 수련 상식이 있고, 마음에 법이 있어서, 바르지 않는 것과 난법 행위를 쉽게 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속인 중의 일도 복잡한 요소 때문에 단순 흑백으로 나눌 수 없고, 옳고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상식과 기교를 함께 적용해서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면, ‘스노든 사건’(역주: 미국 정보당국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 사실을 폭로한 사건)의 주인공 에드워드 스노든은 자신이 영웅도 배신자도 아니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신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고집하여, 결국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만약 법률적으로만 보면, 그가 법률을 위반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답은 매우 명확하다. 위반했다. 그러나 만약 미국 국민에게 이로운가, 무엇이 영웅인가, 무엇이 충성인가, 정부에 충성해야 하는가,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민에게 충성해야 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제각각 다른 상식과 규범이 있다. 그래서 다 섞어놓고 말하다 보면 각자 자기주장이 맞다고 생각해서 끝없는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사부님께서 또 경문을 발표하시어, 수련의 이치를 알려주셨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이는 중요한 졸업 시험을 치르는 와중에 사부님께서 우리 대신 답을 써주신 게 아니다. 사부님께서 자비하셔서 공부는 못하지만 시험을 끝까지 볼 수 있는 수련생인데, 시험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에 이끌려 시험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막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수련하지 않는 자, 가짜로 수련하는 자, 성심껏 수련하지 않는 자’(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를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깊은 내포가 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대법은 누구도 어지럽힐 수 없으며, 어지럽히는 것은 반드시 내부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마음에 법이 있고, 법을 사부로 삼고 묵묵히 수련하고 제고하며 서약을 이행하는 사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하나의 부동(不動)이 만(萬)가지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다!”(미국중부법회 설법)

각자의 결말은 모두 스스로 정한다. 대심판 때 신의 면전에서 변명과 구실이 통하겠는가? 모두 소용없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라갈 것이다. 이번 생에 시간과 노력을 어디에 썼는지, 매 한 가지 일은 모두 진선인(眞·善·忍)에 비춰 판단 받을 것이며, 세상에 오기 전에 했던 신성한 서약을 이행했는지 여부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이것도 정법 제자에게는 하나의 상식이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2/5/4904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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