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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아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밍후이왕]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 강자아(姜子牙)가 보여준 단호함은 탄복할만하다. 그는 최고 위치에 있을 때도 근본을 잊지 않았고, 암살당해 숨을 거둘 때조차 혼백은 여전히 ​곤륜​[崑崙, 강자아가 속한 천교(闡敎)-역주]을 잊지 않았다. 과연 몇이나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꿈 같은 그런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버틸 수 있을까? 그 사람의 도심(道心)이 굳건한지 아닌지는 말로만 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생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수련에 달려 있으며 아주 관건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검증받을 수 있다.

강자아는 사부를 매우 존경하며 사부의 말을 매우 잘 들었다. 그러나 강자아 같은 제자도 사부를 믿는 부분에서 틈이 생겼고, 그 틈은 겉보기엔 작았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절대 작지 않았다.

강자아는 봉신방(封神榜)을 갖고 하산했다. 사부인 원시천존은 그에게 “갈 때 누가 널 부르더라도 고개를 돌리지 마라. 만약 고개를 돌리면 삼십육로에서 널 정벌할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알려줬다. 남이 자신을 부를 때 거들떠보지 않는 건 사실 너무나 쉽다. 더군다나 사부가 말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응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작은 일은 무슨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것도 없이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강자아는 사부의 말을 명백히 듣고서 하산했다. 곧 뒤에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부의 말씀인 “고개를 돌리지 말라”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다음 뒤에서 신공표(申公豹)가 그를 두어 마디 타박하자 그는 흐리멍덩해져 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후 대신선 남극선옹(南極仙翁)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봉신방까지 불태워질 뻔했다. 모든 일이 강자아에 의해 다 망쳐질 뻔했다.

​남극선옹은 조급해져 강자아에게 다가가 등을 손으로 한번 때렸다. “자넨 원래 멍청이였군!”

이전에 나는 이 한 단락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고 우리가 평소 인사하듯 남극선옹이 가볍게 한번 때렸다고만 여겼다. 커서 보니 남극선옹이 당시 진짜로 조급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백학동자를 불러 신공표의 머리를 물어가게 해서 신공표를 죽여서야 이 일을 비로소 잠잠해지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자아가 신공표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자, 남극선옹은 하는 수 없이 신공표를 한바탕 크게 꾸짖고 쫓아내기만 했다.

예전에는 그냥 재미로만 봤었는데 다시 보니 이번엔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첫째, 봉신방은 강자아가 그렇게 갖고 놀 그런 물건이 아니다. 정말로 불타면 신공표가 몇 번을 죽어도, 강자아가 몇 번을 죽어도 배상하지 못한다.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그것은 전국 대입 수험생의 성적표와도 같다. 일부 직원 두 명이 그걸 갖고 내기를 걸다가 훼손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책임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강자아는 삼십육로 정벌이 뭔지 당시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저 다급한 상황에서 그렇게 가볍게 한번 말한 것인데, 실제로 정벌을 당한 후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봉신연의’ 67장에서 강자아는 금대(金台)에서 장수들과 다섯 관(關)을 빼앗으려 했다. 무왕벌주(武王伐紂: 무왕이 주왕을 토벌함)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의 전쟁에서는 대부분 강자아 측인 서기(西歧)군이 얻어맞았고 강자아도 몇 번 죽을 뻔했으며, 가끔은 싸움을 한번 하면 장군과 사병이 만 명 넘게 죽어 나갔다. 서기군은 하마터면 소멸될 뻔했고 무왕도 하마터면 홍사진(紅沙陣)에서 죽을 뻔했다. 강자아의 힘만으로 이런 난관들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옥허궁(玉虛宮)의 대제자와 신선들은 급히 하나하나 나섰다. 적정자(赤精子)는 강자아의 혼백을 구하기 위해 자신마저 하마터면 낙혼진(落魂陣)에 빠질 뻔했다. 연등도인(燃燈道人)은 위험 속에서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매화 노루마저 두 쪽으로 베였다. 더욱이 황하진(黃河陣) 한 차례 전투에서 옥허궁의 열두 대제자는 대부분 진에 갇혀 신선의 몸을 잃었다. 비록 원시천존에 의해 진이 와해하고 구출됐지만, 전부 인간의 몸이 됐고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사실 이런 삼십육로 정벌이란 번거로운 일들을 반드시 당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강자아가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사부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난 것이다. 그의 단 한 번의 실수로 한 무더기의 일이 생겼다. 그리고 강자아가 고개 돌린 것이 어디 강자아 한 사람만의 시험이었던가! 강자아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남극선옹의 손바닥 매질을 발길질로 당해도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남극선옹은 문제의 엄숙성을 분명히 보았고, 아울러 또 그 당시 마땅히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신공표의 머리를 물어가서 돌려주지 않으면, 그가 죽음으로 죄업을 갚아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자아는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이 더해지고,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는지 똑똑히 알지 못했다. 그는 끝내 ‘일념의 인(仁)’으로 차마 신공표를 죽이지 못했다. 어쨌든 강자아는 사부가 배치한 봉신 항목의 책임자였다. 그래서 남극선옹은 강자아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고, 또한 선념(善念)이 나왔음을 보고서 강자아의 뜻에 따라 처리해줬다.

​그런데 강자아는 도를 닦은 지 겨우 40여 년이고 남극선옹은 몇천 년이다. 신공표는 비록 입문이 늦었지만 이미 천년을 수행했다. 만약 요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사실 강자아의 도력은 이런 선배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히 일을 파악하는 능력도 남보다 못하다. 그래서 신공표는 특별히 강자아를 깔봤고, 특별히 불평했으며, 특별히 불만이었고, 특별히 방해해 일을 망가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 결과 자신을 망쳤다. 정과를 얻은 신선들 중에는 이런 이가 한 명도 없었고 강자아에게 “자네는 왜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번거로움을 끼치는가”라며 원망하지 않았다. 모두 사문(師門)을 중시하고 봉신이라는 대사를 위주로 해서 전력으로 협력했다. 이렇게 해서 뒤에 닥친 관들을 넘었고 일들을 하나하나씩 성공시켰다.

사실 협력이란 말은 쉽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대로 해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사부는 강자아에게 봉신하게 했고 모두가 그 속에 이치가 있음을 알았다. 강자아가 고개를 돌려 발생한 문제를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했다. 비록 강자아가 잘못했지만 스스로 잘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모두 잘하고 싶지만 잘 해내지 못할 때가 있고, 또한 모두 일시적으로 명백하지 못할 때가 있다.

비록 모두 한 길을 걸어가면서 조금의 착오도 없길 바라지만, 그것은 소원일 뿐이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마땅히 일깨워주어야 할 부분은 모두 일깨워줘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 자신에게 남겨줘 천천히 인식하게 해야 한다. 남극선옹은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분명히 알면서도 강자아의 뜻에 따라 신공표를 살려줬다. 그는 아마도 앞으로 수천수만 각종 어려움이 닥칠 것이고, 동문이 합심해 함께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선은 선량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고, 또 대지혜가 있어 깊은 진기(眞機)도 꿰뚫어 볼 수 있기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다. 마땅히 있지 말아야 할 난이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마땅히 있어야 할 난이라면 삼십육로 정벌이 없더라도 이후에 다른 형식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는 강자아가 저지른 실수가 자신에게는 번거로움이 생기게 했지만, 사실상 남을 놓고 말하면 다른 한 극본으로 들어갔을 뿐이며 형식만 바꾸었을 뿐이다. 번거로움이 일찍이 오거나 늦게 오거나 모두 오는 것이고, 가로로 오든 세로로 오든 모두 오게 된다. 그리하여 신선들은 이런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변수의 배후에는 또 다른 깊은 뜻이 담긴 정수(定數)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강자아의 심리적 압력은 단번에 많이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강자아로 인해 일은 지체됐다. 만약 그의 실수가 없었다면 바로 67장 무왕벌주로 넘어갔을 것이다. 아마도 봉신 과정의 3분의 1은 줄어들었을 것으로 역시 진도를 지체한 것이다. 봉신연의를 본 적이 있는 이는 아마 ‘아닌데, 나중에 병사들이 맹진(孟津)에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고 예언한 무오(戊午)의 일이 그대로 발생하지 않았던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잊지 말라, 그것은 아주 많은 신선이 이리저리 바쁘게 강자아를 도와 번거로움을 해결하고 진도를 다그치고 시간을 빼앗은 결과다.

강자아에게 일이 생기기만 하면 늘 도와주는 이가 있었는데, 강자아 스스로가 배치한 것이 아니다. 동문 신선들은 모두 묵묵히 일의 진도를 주목하다가, 어느 부분에서 어려움이 생기고 지체돼 도움을 줘야 할 때가 되면 일 분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와서 도와줬다. 갖은 심혈을 기울여 해결하고는 조용히 가버렸고, 일체 성적은 전부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겼으며, 주역의 광환은 계속 강자아의 머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강자아가 봉신을 일정에 맞춰서 완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묵묵히 도와주고 명예와 보수를 바라지 않았던 좋은 동문의 협력 덕분이었다! 각도를 바꿔서 말하면 하늘이 정한 최후의 시간 내에 정말 돌파하지 못한다면, 수련인이 걷는 시간은 유한한 것이다.

​강자아는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이 작은 일에서 사부의 말에 따라 행하지 못해 삼십육로 정벌이라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됐다! 다행히 강자아는 마음이 정말 단호해 몇 번을 죽었어도 변치 않는 마음과 의지로 곤란과 어려움을 돌파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 않은가! 그러나 수련함에서 계속 이런 장벽에 부딪히면서 걸어간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래서 만약 명백히 볼 수 있다면 마땅히 결심을 내리고 사부의 말을 그대로 따라야 맞는 것이다. 사부가 하는 것은 전부 제자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이며 제자를 책임지고 있다. 만약 제자로서 어떠한 크고 작은 일에서 모두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사부가 말한 표준에 따라 제대로 해낸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또 이치가 있다. ‘고개 돌리지 않음’은 매우 작아 보이는데, 그것이 작기에 오히려 사부를 단호히 믿고 또 특별히 심성을 엄격히 지키는 제자만이 해낼 수 있다. 그렇게 단호한 강자아마저도 해내지 못했으니,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실제로 해내기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실 그것은 경지로서, 벽에 부딪힐 필요 없이 이미 도달해야 하는 바른 믿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강자아는 이 작은 일에서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후 삼십육로 정벌의 시련을 겪으면서야 점차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만약 작은 일에서 제 위치로 수련했다면, 그럼 환경 역시 따라서 변해 이후 이어진 극본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수련인이 부딪치는 벽은 아마도 강자아가 겪은 일과 같을 수 있다. 작은 한 가지 일, 혹은 한 번의 느슨함, 사부의 신신당부를 잠시 잊고 한번 고개를 돌리면 강자아와 같은 그런 과정을 겪을 수 있다.

 

원문발표: 2023년 7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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