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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없이 넓은 사부님의 은혜

글/ 중국 광둥(廣東)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퇴직 전에 대형 국영기업 직원이었고 지금까지 이미 28년간 수련했다. 수련 초기에는 법을 얻은 기쁨이 있었고, 1999년 7월 20일 이후 20여 년간 파룬궁에 대한 전례 없는 박해를 경험했다. 악독하고 잔혹한 박해를 정상인은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불굴의 의지로 수련을 처음처럼 고수하며 평온하게 오늘에 이르렀다. 28년간 나는 대법의 신기함을 경험했고 도덕이 고상한 선한 사람으로 시작해 신의 길을 걷는 수련자로 승화됐다.

1. 사부님 전수반에 참가한 인연

파룬궁을 배우기 전, 나는 군 체육학원에서 격투술을 배웠고 전통 남파(南派) 무술을 3년간 훈련했다. 의리를 중시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부대 교관이란 명목으로 늘 흉기를 갖고 싸움에 참가해 좋지 않은 일을 많이 했다. 1994년 초, 몇몇 친구가 나에게 파룬궁 강의를 들으라고 권유했다. 한 친구가 연공하니 천목이 열려 파룬이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해 나는 매우 궁금했다. 이렇게 나는 광저우 제3기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전수반에 참가했다.

이튿날, 수업 전 강당 입구에서 사부님을 만났다. 사부님은 큰 키에 우람한 체구셨으며 자비롭고 평온하셨다. 나는 멍하니 사부님 곁에 서 있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고 생생세세 이 분을 만나러 찾아다닌 느낌이었다.

수업할 때 나는 정수리에서 큰 파룬이 선풍기처럼 휙휙 고속으로 회전하는 것을 느껴 손으로 만져봤으나 잡히지 않았다. 큰 파룬은 때로는 두 개로 바뀌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또 몸에서 두 팔 방향으로 돌았고 양 손바닥에서 회전했다. 아랫배에서 팔뚝만 한 파룬이 회전했는데 온몸이 가볍게 느껴졌고 너무나 신기했다! 수업이 끝날 때 나는 머리가 텅 비었고 세상도 텅 빈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하시던 신선 이야기를 즐겨 들으면서 늘 혼자 생각했었다. ‘생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엄마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가장 친한 사람들도 붙잡을 수 없는데 나는 또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럴 때마다 혼자 눈물을 흘렸고 어른들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늘 이런 알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나는 대법을 기다렸고 사부님을 기다렸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처음 법을 배울 때 수련생들은 모두 사부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나 나는 나도 모르게 줄곧 사부님이라는 존칭을 썼고 사부님을 따라 수련하리라 결심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내 몸은 건강했고 자전거를 타면 마치 어떤 힘이 밀어주는 것 같았으며 두 발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야근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때때로 모든 공간에 밝은 빛이 감돌았으며 잠깐만 자고 나면 날이 밝았다. 매일 활력이 넘쳤고 마음이 평온해져 예전처럼 용맹을 떨쳐 싸우지 않았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직장 동료들은 짧은 기간에 환골탈태하듯 변한 나를 보고 잇달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한번은 아내와 기차를 탔는데 두 번째 줄 여섯 자리에 두 명이 앉은 것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 예의 바르게 청년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자 그는 마지못해 자리를 내주면서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욕했다. 싸움꾼인 나는 화가 치밀었다. ‘기차에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그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문득 머리에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 우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으며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어찌 연공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1] 오늘 나는 이미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으니 반드시 참고 한 걸음 양보해야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았다. 차에서 내릴 때 홀가분했는데 한 걸음만 물러서면 정말 더없이 넓은 세상임을 느꼈다.

2. 시련 속에서 대법 수련을 견지하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질투로 국가의 모든 기구를 이용해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행복했던 수많은 가정이 해체됐고 연공인들은 세뇌반, 강제노동,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도 심하게 박해를 받은 사람 중 하나다. 박해가 시작되자 나는 파룬궁 수련을 고집해 직장에서 부서를 옮기게 됐다. 아주 편한 부서에서 지저분하고 힘든 자리로 밀려났다. 지부 서기는 내가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찾아와 잘못을 시인할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나는 줄곧 그곳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초기에 나는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여러 차례 수감됐다. 직장 책임자가 상급자의 비평을 받고 공안과 함께 베이징으로 날 찾아왔다. 나는 서기의 압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책임자가 나에게 서기를 만나라고 했는데 서기에게서 나는 사직을 강요당했다. 서기가 사직서에 파룬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사실과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 나는 직장을 매우 좋아했고 생활이 검소하고 나쁜 습관이 없다는 것을 동료들은 다 알고 있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고 지도자에게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나는 직장 상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기는 할 말이 없자 묵묵히 내 사직서를 받아 서랍에 넣고 다시는 사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2001년, 베이징에 청원을 가서 파룬궁이 좋다는 편지 한 통을 제출했다. 공안이 나를 잡으려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녔다. 어느 날 채소시장을 지나다 근처에 매복했던 사복 경찰 7~8명이 몰려와 날 붙잡고 도둑 잡으라고 외치자 시장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왔다. 나는 경비원에게 “제가 도둑 같아 보입니까? 저는 좋은 사람인데 이 나쁜 사람들에게 잡혔습니다.”라고 하자 경비원들이 역으로 그들을 붙잡았다. 이들은 그제서야 경찰증을 보이면서 내가 시장에서 군중을 모아 사회 치안을 어지럽힌다고 모욕하면서 구속했다. 나는 한 달간 불법구류를 당한 후 1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각종 박해에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전향’(수련 포기)하지 않자 또 한 달간 형을 늘렸다. 감옥을 나오는 날, 경찰은 파룬궁수련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나에게 수갑을 채웠고 나는 운동장에서 옷이 벗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들은 내 출옥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나는 비밀리에 세뇌반에 보내져 계속 수감당했다. 우리는 매일 노역을 강요받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우리 파룬궁수련생들이 파업하자 그들은 우리를 방에 잠그고 나오지 못 하게 하자 모두 단식을 했다. 20여 일간 단식하자 그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를 경찰병원에 보내 식염수를 맞게 했다. 나는 병실에서 여전히 대법이 좋다는 진상을 알렸다. 어느 날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변호사인가요, 아니면 고학력 지식인인가요?(사실 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음). 당신 말에 이치가 있어 6·10(파룬궁 탄압기구), 공안들도 모두 당신을 설득하지 못하는군요.” 나는 변호사도 지식인도 아니고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식을 마치고 병원을 떠날 때 복도에서 주치의를 만났다. 그는 세뇌반 경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내 손을 잡아줬다. 경찰이 매우 난감해했으나 주치의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바른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을 본 나는 기뻤다.

이번에 수련생들이 마음이 맞아서 반(反)박해로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매일 연공하고 법공부를 하게 되어 내 몸은 빠르게 회복됐다. 전국에서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에 이 세뇌반은 수련생들을 조건 없이 석방했다. 직장 사람들과 가족이 세뇌반으로 데리려 왔고 세뇌반은 무조건 우리를 석방했다. 나는 직장에 복귀해 정상 출근했고 그달 월급과 상여금, 분기 상여금까지 전액 돌려받았다. 시련 속에서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호해주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열정적이고 명랑하게 일했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또 요리 솜씨가 있어 명절이나 휴일이면 구내식당에서 요리를 했다. 요리는 사람의 품행과 관련이 있는데 나는 술집 주방장을 본받지 않고 기본적으로 기후 변화에 따라 순박한 지방 입맛으로 요리를 만들었기에 동료들이 즐겨 먹었다. 가끔 고위 간부가 명절에 점검하러 오면 상사는 그를 초대해 같이 식사하면서 이것은 ○○가 만든 요리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직장에서는 내가 파룬궁수련생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부가 요리를 잘한다며 기회가 되면 또 와서 먹겠다고 했다. 나는 또 차를 즐겨 마신다. 사람들은 흔히 난로를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세상일을 담론한다. 나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파룬궁 수련 이야기를 넣어 이야기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게 했다.

3. 세 차례 기적을 겪다

28년을 수련하면서 약 한 알 먹지 않았지만 내 몸은 줄곧 튼튼해 실제 나이보다 젊게 보였다. 때로는 몸이 불편할 때도 있었는데 꾸준히 연공하고 법공부를 하면서 자신에게서 연공인 기준에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고치면 보통 불편함이 빨리 지나간다. 수련하면서 내 몸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들이 많은데 지면의 제한으로 세 가지 사례만 열거하려 한다.

1) 쏟아지던 코피가 멎다

2017년 한여름 어느 날 저녁, 8시가 넘자 갑자기 코피가 흘러 수건이나 휴지로 막으려 했으나 피가 목으로 넘어가 나는 어쩔 수 없이 크게 삼켰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연공을 하려 해도 피가 멈추지 않고 법공부를 하려 해도 입에 피가 가득 차 읽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 ‘전법륜’을 읽어달라고 했다. 아내 수련생이 계속 피를 닦아주자 가족들이 긴장해했다. 아이가 가끔 잘못 읽자 내가 말했다. “긴장하지 마, 우리에겐 사부님이 계시니 괜찮아. 사부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셔. 사부님의 ‘광저우 설법’을 들려줘.” 내 마음이 안정되자 가족들도 안정됐다. 서서히 피가 줄어들더니 12시쯤 되자 피가 멈췄다. 한밤중에 가족이 손전등으로 내 눈을 비추며 상태를 관찰하자 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이튿날 일어나서 지난밤에 피를 흘린 대야를 보니 깜짝 놀랐다. 삼킨 피는 또 얼마인지 모른다. 본래 사진 한 장을 찍어 직장이나 친구들에게 보내려고 했는데 남들이 불안해할까 봐 찍지 않았다. 나는 허스(合十)하고 사부님께서 몸을 정화해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낮에는 꾸준히 연공하고 법공부를 했으며 밤에는 직장에 돌아가 야근했다.

회의 때 내가 하루 동안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자 동료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병원에 갔을 거라며,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어도 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평소처럼 정상 근무를 하다니 정말 신기하다고 했다.

2) 제1장 공법을 연마하자 부러진 갈비뼈가 이어지다

2007년, 내가 시공 분야에서 근무할 때였다. 직장에는 임시 배치한 인부들이 일하게 됐고 내가 안전 감독을 책임졌다. 어느 날 밤, 철길을 가로지르는 통신망을 설치하려고 1.75톤짜리 화물차에 모래, 시멘트, 벽돌을 가득 실었다. 운전석은 두 줄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조수석 문을 열자 자리는 이미 인부들로 꽉 들어차있어 나는 기사에게 걸어서 공사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때 운전석 앞줄의 일꾼 하나가 자리를 내주면서 한 사람쯤은 더 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익숙한 이 장면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자 안에 사람이 꽉 찬 것을 보고 다음번을 기다리려고 했다. 한 사람이 갑자기 당신 하나쯤 괜찮으니 타라고 했지만 그는 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다가 갑자기 땅으로 추락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는 운 좋게 재난을 피했다.

내가 망설이자 안에 있는 사람이 빨리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차에 타 조수석 문가에 앉았고 차는 천천히 공사장으로 향했다. 차가 작은 비탈을 내려가면 바로 앞 교통 초소에서 우회전을 해야 했다. 문득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가로등도 거꾸로 보이더니 어두컴컴해졌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파쩡쳰쿤, 셰어췐몌(法正乾坤, 邪惡全滅)!’ 말이 막 끝나자 ‘쿵’ 소리와 함께 귀를 찢는듯한 마찰음이 들려오더니 화물차가 옆으로 넘어졌다.

차 문쪽에 앉았던 나는 두 일꾼에게 깔렸다. 기사는 다치지 않았고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으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는 일꾼들에게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 소리를 듣고 기사는 모두 위로 올라가게 했다.

우리가 차에서 기어 나와 사고 현장을 보니 시멘트와 벽돌, 모래 등 물건을 잘 싣지 못해 차체 뒤가 무겁고 앞이 가벼워 일어난 사고였다. 만약 차가 교통 초소를 지나 시내로 돌진했다면 교통량이 많은 곳에서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나는 “방금 파룬따파 사부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어요!”라고 소리쳤다. 놀란 가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일꾼들이 “그렇네요!(일꾼들은 파룬궁 진상을 들었음)”라고 대답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경찰차와 소방차가 왔다. 구급차도 왔다. 지나던 차량이 이렇게 아찔한 사고를 보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다섯 명의 인부들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서 검사했다. 이때 화물차 엔진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휘발유가 온 바닥에 흘러있었다. 즉시 시동을 꺼야 했지만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나는 연공인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전석으로 기어들어 가 먼저 엔진을 끈 후에 열쇠를 빼내고 운전석 물건들을 치웠다. 구조차가 사람들과 화물차를 끌고 간 뒤에 나는 걸어서 현장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른쪽 반신이 퍼렇게 멍들고 부어서 숨을 크게 쉴 수 없었고 오른쪽 갈비뼈 하나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움직일 때마다 아팠다. 나는 일찍이 격투술을 배웠기에 오른쪽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가족들이 당겨줘야 했다.

이틀 뒤 직장에 출근해 공사장을 좀 돌았는데 아파서 걸을 수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동료들이 나보고 멍청하게 출근했다고 했다. 그날 차가 전복될 때 내 뒤에 타고 있던 인부는 허리가 부러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후에 인부들은 퇴원한 후에 회사에서 월급을 전액 받고 반년간 휴양했으며, 직장에서는 8천 위안의 영양비도 보조해줬었다. 주임이 나에게 병원에 가서 CT를 찍고 일이 있으면 산업재해로 보고하라고 했다. 사실 산업재해를 신청하면 본인에겐 유리하고 회사는 어떤 핑계로도 미룰 수 없다. 직원은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직장은 안전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는 CT를 찍을 필요 없이 집에 가서 파룬궁을 연마하면 된다고 했다. 주임은 의아해하며 정말 연공해서 나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흔쾌하게 대답했다. 집에서 쉬는 동안 가슴과 부러진 오른쪽 갈비뼈가 연공할 때는 아프지 않다가 평소에는 아팠다. 갈비뼈가 여전히 툭 튀어나와 손으로 만져졌다.

어느 날 아침, 제1장 공법 ‘포잔첸서우파(佛展千手法)’의 ‘진허우편선(金猴分身)’을 하면서 양손을 쭉 뻗자 갈비뼈 부위에서 ‘뚝’하는 소리가 들렸다. 5장 공법을 다 연마한 후 보니 튀어나왔던 갈비뼈가 평평해졌고 이미 연결되어 아프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휴식을 취소하고 정상으로 직장에 출근했다. 동료는 내가 다시 출근하는 것을 보고(직장에서는 휴가를 줬음) 어떻게 다 나았냐고 물었다.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파룬궁을 연마해 나았다고 말했다. 주임과 동료들은 파룬궁이 정말 신기하다고 칭찬했다.

3) 심각한 중풍 증상이 한 달 만에 낫다

2019년 가을, 나는 연속 두 차례 꿈에 뱀을 보았다. 첫 번째는 내가 가슴에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담황색 조끼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구멍으로 뱀 대가리가 나온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뱀 한 마리가 담장 밑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의심스러웠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고 수련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으나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풍’ 증상이 나타났다. 이런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나자 나는 거실에 앉아 ‘나는 진수하는 연공자이고 사부님께서 계시기에 두렵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용히 수련자의 요구대로 안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봤다. 나에게 아직 쟁투심이 있었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20여 년 수련했는데 아직도 이런 상태인가?’ 정말 사부님을 대할 면목이 없었기에 나는 사부님께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부좌했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어놓고 날 식탁으로 데려갔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 졸음이 쏟아졌고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며 손에서 밥그릇이 미끄러졌고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즉시 날 부축해 침실로 가려고 했는데 왼쪽 다리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난 침대에 눕혀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아내와 아이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이 ‘9자진언(九字真言)’을 함께 읽었다. 그들은 큰소리로 온 마음을 다해 읽었는데 위아래 층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아내는 얼른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들려주면서 먼 곳에 있는 몇몇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또 현지 수련생들에게도 연락했다. 이번에 아내는 냉정했는데 바쁘지만 질서 있게 행동했고 사부님께 제자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모든 것은 사부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수련생들이 단체로 발정념을 해 내 몸을 공격하는 다른 공간의 좋지 않은 것들을 제거했다. 그 중 핑(娉) 씨 수련생이 천목으로 큰 뱀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곁에 있던 란(蘭) 씨 수련생이 검을 쓰라고 알려줬다. 핑 씨 수련생은 손에 큰 검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른 수련생들과 협력해 끝내 그 뱀을 죽였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한(漢) 씨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왔다. 그는 곧장 침대 가로 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자면 안 돼요.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하라고 하셨어요. 많은 중생이 당신이 가서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분명히 잘 들었고 점차 혼미상태에서 깨어났는데 마치 금방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아내가 날 부축해 거실에 앉혔으나 잠시 후 또 잠들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몸의 좌반신을 움직일 수 없어 아내가 데려다주려 했다. 내 왼쪽 몸이 계속 아래로 처져 아내가 버텨내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이 이러면 어떻게 해요? 나는 버티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일어나요!” ‘그래! 나는 아내를 힘들게 할 수 없어.’ 나는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왼발에 감각이 생기면서 힘이 생겼다. 그리하여 나는 오른손으로 문틀을 꼭 잡고 문제를 해결했다.

이튿날 한 수련생이 찾아와 나와 함께 연공하려 했다. 나는 바로 설 수 없어 벽에 기대 연공할 수밖에 없었다. 매번 왼손을 조금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팔이 천근처럼 무거워 매우 피곤했다. 말을 해도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고 ‘전법륜’을 들 수도 없어 누워서 설법을 들었다. 저녁때가 되어 한 씨 수련생이 나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이 허상을 인정할 수 없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나는 혼자 걸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계속 연공을 하려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자 아내가 날 옷장 옆에 세우고 앞에서 몸으로 막아 나는 제 3장 공법을 할 수 있었다. 직장 상사가 날 찾아와 물었다. “당신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요?” “괜찮습니다. 병가도 안 쓸 겁니다.” 나는 대신 연차를 썼다. 여러 해 수련하면서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연공해 지나왔다. 나는 대법에 신심이 있었고 내가 지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을 먹지 않으며 파룬궁을 수련하면 된다고요?” 상사는 나를 의심했다. “당신 왼손을 아직 들지 못하잖아요?”

상사의 이 말을 듣고 나는 벌떡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걸으면서 말했다. “보세요! 저는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서 뻗칠 수 있습니다.” 굳은 일념으로 나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자신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 기적을 목격했다.

나는 위험한 고비는 넘겨 걸을 수 있게는 됐지만 아직 몸 상태가 다 회복되지 않았다. 머리 반응도 원활하지 않았고 왼손으로 물건을 잡지 못하며 침도 흘리고 입도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나는 법공부와 연공을 강화했다.

노년 수련생이 날 찾아오자 나는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 그를 역까지 바래다줬다. 고향 친척이 날 보러 와서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연공해 내가 이렇게 빨리 회복됐기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어서 시련이 왔다. 아내와 같이 옷을 사러 갔는데 몸이 너무 말라 맞는 옷이 없었다. 내가 쇼핑몰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완전히 변해 마치 70여 세의 깡마른 노인 같았는데 이것이 나란 말인가? 마음이 괴로워 다시는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 아내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아내는 옷을 사자고 버텼다.

처음엔 집에서 집안일을 할 때 오른손만 썼다. 왼손은 반응이 늦어 솥에 부딪혀 여러 차례 화상을 입기도 했다. 점차 나 스스로 시장에 가서 장을 볼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알았고 내가 연공해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차 휴가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직장 상사가 전화해 언제 다시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다. 조금 쉬운 부서로 전근시킬 테니 출근해 일하지 말고 몸을 잘 관리하면 된다고 했다. 형은 무슨 직장이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출근을 시키냐면서 반대했다. 나는 지도자가 받는 압력을 알고 있는데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기에 직장에서 나는 중점대상이었다. 나는 형을 위로하고 상사에게 이틀 후에 직장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상사가 차를 보내려 하자 나는 거절했다. 상사는 걱정돼 상황을 자세히 묻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아내도 걱정돼 같이 택시를 타고 직장까지 동행했다. 택시에서 내려 어느 정도 걸어야 직장에 도착할 수 있는데 나는 직장까지 걸어갔다.

첫날 출근하자 많은 동료가 날 보러 왔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고 약 한 알 먹지 않고 매일 꾸준히 연공해 나았냐고 물었다. 예전엔 회의적이던 동료들도 매일 찾아와 파룬궁이 정말 그렇게 신기하냐며 보려고 했다. 그들은 매일 달라지는 내 모습을 보았다. 왼쪽 손발이 말을 잘 듣지 않다가 점점 민첩해졌고 입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침도 흘리지 않았다.

새 부서는 기계 수리부였는데 나는 기술을 알지 못했기에 최대한 협조해 도왔다. 볼트 조이는 것부터 시작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일찍 퇴근하면 가족을 생각해 집안일을 많이 하다 보니 미각도 점점 좋아져 예전보다 요리를 더 잘하게 됐다. 2020년 설 연휴 기간에 우한폐렴으로 도시를 봉쇄하자 나는 휴가도 없이 자리를 지키며 주로 식당에서 밥을 했다. 여럿이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규정해 공용 수저를 쓰고 마스크를 써야 했다. 도시 전체가 공포에 떨고 있는 중에 동료들은 모두 나에게 접근하기를 원했는데 연공하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소 파룬궁 진상을 듣기 싫어하던 한 동료는 밤에 잘 자지 못해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성심성의로 ‘9자진언’을 외우면 잠을 잘 잘 수 있고 역병이 당신을 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9자진언을 외우니 잘 수 있었다면서 진심으로 삼퇴했다. 전염병 사태 중에 9자진언을 읽으며 삼퇴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맺는말

28년 수련을 돌이켜보고 사부님께 무한히 감사를 드린다! 1995년 11월, 우리 수련생 몇 명이 하얼빈에 가려고 베이징역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 갑자기 앞에 나타나셨다. 나는 얼른 손에 쥔 짐을 땅에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사부님!”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묵묵히 사부님 곁에 서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북방의 날씨가 추운데 옷은 충분히 갖고 왔느냐고 자상하게 물어보셨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대합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계셨다. 대합실로 들어간 후 우리는 몇 번이나 몰래 나와 사부님을 보았는데, 사부님께서는 줄곧 자애롭게 거기에 서 계셨다.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고 오래도록 마음이 설렜다.

사부님과 함께 있었던 장면들을 회상할 때마다 너무 즐거웠고 정말 행복했다.

사부님 안심하십시오, 제자는 계속해 잘 수련할 것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2년 4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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