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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자아를 닦아 버리다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란위(藍雨)

[밍후이왕]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는 20여 년간, 대법은 나를 수련 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환골탈태시켰다. 내가 매번 바뀔 때마다 대법은 신기함을 보여주었기에 비로소 사람에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1. 육친 눈에 비친 나를 바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였고 난폭함을 일삼다 보니 마을에서 함께 놀던 어린 자매도, 우리 집 자매도 모두 내 말을 들어야 했다. 나는 어린 친구들 중 우두머리가 됐고 그들은 모두 날 두려워했다. 이 성질을 알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은 비록 이미 다 어른이 됐으나 여전히 내게 한발 물러서 양보했고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 할머니는 날 타이르셨다. “너는 성질을 고쳐야 해, 집에서야 친척과 친구들이 네 행동을 참으며 양보해주지만 커서 사회에 나가면 누가 너에게 응석 부리게 하겠느냐? 그때면 손해를 보게 돼!”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내 성질은 평생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 난 이대로 살 거야!’

어느 날 큰고모 집에 갔는데 고모가 책 한 권을 소개해줘 받아보니 ‘전법륜(轉法輪)’이라는 책이었다. 책을 펼쳐 ‘논어’를 보자 내가 여태껏 괜찮다고 여겼던 이 성질이 나쁜 것임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미 고질병이 되어 고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추구해 온 명예와 이익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논어’를 보고 난 뒤 고모에게 “책에서 말씀하신 게 다 이치에 맞지만 저는 할 수 없어요. 대학에 붙은 후 다시 볼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인생에서 늘 책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할 때 의도적으로 책의 이치로 가늠해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

몇 년 후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방학 때 집에 돌아오자 마침 우리 집에서 고모를 만났는데 또 그 책에 대한 화제를 꺼내셨다. 고모는 “대학에 합격하면 이 책을 보겠다고 했지? 이제 별일이 없으니 보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해 했던 약속으로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나는 온종일 단숨에 책 한 권을 전부 읽었다. ‘전법륜’은 내 모든 인식을 단숨에 바꾸어 놓고 내 세계관마저 바꿔 놓았다.

그 바꿀 수 없는 성질, 포기할 수 없는 명예와 이익은 이 끝없는 법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전혀 고수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큰 산처럼 뿌리가 깊어 전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관념들이 대법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진정한 기쁨과 흥분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 대법을 영원히 배우겠다고 다짐했다. 이 생각은 매우 분명하고 확고했다.

한번은 친척, 친구들이 다 큰고모 집에 모였다. 큰고모부는 날 보며 “대법의 다른 건 안 봐도 이 아가씨가 오늘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믿고 배우겠습니다.”

큰고모부는 “원래 손도 댈 수 없는 이 아가씨를 이렇게 바꿔 놓을 수 있다니 이 대법은 정말 최고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던 나는 다시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들고 대법을 배운 자부심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는데 다들 손뼉을 치며 웃었다. 당시 방 안에는 거의 다 수련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후에야 내가 단지 ‘논어’를 한 번 보았을 뿐인데 몇 년간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단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사부님께서 이미 날 책임지고 계셨기 때문임을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속세에 더 깊이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며 줄곧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치로 지켜주셨다. 대법의 크나큰 위덕(威德)이 뿜어내는 진리의 빛은 줄곧 날 끌어당기고, 씻어주며, 내가 진정으로 법을 터득해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이끌어줬다.

2. 나를 바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랑 사이가 안 좋아 미워하고 원망도 많이 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서로 세 마디도 하지 않고 말다툼을 벌였고 평상시에도 항상 냉담하게 대했다. 나는 어머니만 보면 온몸이 불편해졌다. 대법을 수련하고 늘 이 방면에서 향상하려고 노력했으나 이 고비를 잘 넘기지 못했다. 20년 넘게 수련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겉으로는 변했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아 나 역시 괴로웠다.

작년에 어머니의 병업 가상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내 태도가 확 바뀌었다. 작년에 사악한 중공의 ‘제로화’ 소란으로 나는 직장에서 정직당했다. 어머니가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줄곧 속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알게 된 후 갑자기 뇌경색 가상이 몸에 나타나셨다. 화장실 가는 것도 가족이 부축해야 했고 다른 사람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가 수련에 대한 정념도 강하지 않아 줄곧 몸에 나타난 가상을 인정하셨다.

당시 어머니를 싫어하는 마음이 갑자기 다시 나왔다. 어머니가 연약하고, 고생을 견디지 못하며, 수련을 잘하지 못하고 정념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어머니에게 목청을 높여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다. 화가 치밀어 어머니에게 다가가 화를 내려고 할 때 갑자기 냉정해졌다. 수련생이 도움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 순간에, 수련생이 스스로 걸어 올 수 없으면 모두 도와야 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태도는 수련생을 돕는 것인가? 이것은 수련생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예전의 태도라면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분에 줄곧 구세력의 요소가 있지 않은가? 정말 계속 그 길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단숨에 망가뜨리려는 건가? 안 돼, 난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 사부님께서 안배한 길을 갈 거야. 근데 어떻게 가야지? 어머니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

내가 진정으로 향상하고 싶어 하자 사부님께서는 바로 점화해 알려주셨다. 요 몇 년간 겉으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관심이 없었다. 사실 이것도 정(情)의 표현으로 다만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부정적이고 비교적 은밀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것이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함도 정이요, 증오함 역시 정이요”[1]. 이를 깨닫고 먼저 사람의 정에 서서는 안 되고 정이 역할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법에서만이 수련생을 도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련이 계속됨에 따라 자아의 기점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진정으로 수련생을 위해 그의 처지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려고 했다. 예전에 어머니를 도울 때 항상 내 생각과 인식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했다. 어머니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깨달음이 부족하고 정진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몇 마디 반박하면 화가 치밀어 “더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한마디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짜증을 내며 우셨다. 이것이 심각한 자아 아닌가? 내게 부합돼야만 수련생을 돕는가? 이것이 돕는 것인가? 단지 수련생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내 불만을 토로한 것뿐이었다.

이런 인식이 있게 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사부님의 제자인가? 수련자라고 할 수 있는가? 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속인의 기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는데 어찌 수련생을 돕겠는가? 보아하니 도움이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또 안으로 찾았다. 수련생에 대한 진정한 도움은 수련생 처지에서 도대체 법리상 무엇이 분명하지 않고, 심성의 경지가 어디인지 파악한 다음 수련생의 실제 상황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거듭 교류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련생에게 강요하면 자기 입장에서 연설하는 것이지 수련생을 돕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수련생이 어리벙벙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나중에는 수련생이 오성이 너무 부족해 어떻게 말해도 모른다고 한다.

서서히 양측 모두 자신감을 잃게 된다. 가벼우면 병업 가상 속에서 빙빙 돌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하면 육신을 잃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으나 문제점을 보고 진정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수련생을 돕는 경우가 드물다.

솔직히 병업 고비를 넘는 수련생을 돕기란 정말 힘들고 잘 파악하지 못하면 그 자아가 작용해 수련생에게 부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수련생을 돕는다고 하지만 실은 착실히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늘 수련생을 돕겠다는 생각을 두고 자신의 수련 제고는 외면하는 것은 일종의 밖으로 보며, 병업 가상을 진짜 병으로 보는 것이다. 수련생만 지켜보며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를 도와 병업 가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사부님의 자비로운 일깨움과 대법의 특별한 작용 아래, 자기 수련을 더욱 중시하게 되고 자기 수련의 중요성도 점점 더 깨닫게 됐다. 사실 수련에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모두 수련에서 제고해야 하는데, 법에서 제고하고 자신이 만난 모든 것을 법으로 인식하느냐는 것이 관건이다. 서서히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툼과 냉대가 사라지고 인내심과 화기애애함이 대신했다.

어머니와의 수련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마음고생을 얼마나 해야 이 고질적인 마음을 고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지 자아를 내려놓고 어머니가 정말 향상하시기를 진심으로 돕겠다고 생각했다. 이 단순한 일념이 오랫동안 얼어붙은 증오를 녹이는 선한 힘이 되어 수련의 길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로 도우며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록 어머니는 아직 병업 가상이 조금 남아 있으나 이미 수련생들과 함께 진상을 알리러 나가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되셨다.

‘나’란 고집불통이 바른길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이 정진할수록 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차츰 사람 마음이 담담하고 적어짐에 따라 정념도 강해졌다. 비록 사람 마음의 집착이 아직 완전히 씻겨지지 않아 가끔 날 괴롭힐 때도 있지만, 이미 예전처럼 지배당하고 조종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나면 진정한 내가 바로 없앨 수 있게 됐다. 인간세상 속의 그런 작은 일들이 나에게 영향 주도록 이끌 수 없다. 경솔함과 신랄함도 자비와 평온함으로 대체됐다. 그 진한 사람의 정도 이성에 의해 씻겨졌다. 사람, 그리고 허황한 인간 세상도 내 시야에서 점점 분명해졌다. 중생을 구하는 것과 조사정법(助師正法) 외에 그 무엇이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까?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사소한 일부터 매 한 걸음 한 사람이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되짚어 보면 사람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너무나 간단한데, 내가 착실하고 공손히 대법에 동화하면 반드시 환골탈태해 진정한 대법의 한 입자가 될 것이다.

개인의 체득이니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바로잡아 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2년 7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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