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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나의 대가족 (3)

글/ 중국 지린성 수련생 징수이(靜水)

[밍후이왕] “표범은 반점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반항적인 여자, 잔소리가 심한 아내였는데 파룬따파가(法輪大法)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켰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부에 이어서 계속)

노동수용소 감금

딸아이는 2001년에 입학한 후에도 시어머니가 계속 돌봐주셨다. 딸은 대부분 또래처럼 과외수업 없이 학교를 잘 다녔고, 시누이 란은 결혼 후 근처에 살면서 거의 매일 친정집에 들러 집안일을 도왔으며, 2002년 이혼한 후 아들과 함께 아예 친정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았다. 우리가 이렇게 생활한 지도 20년이 흘렀다. 시누이는 가족을 돌보며 내 심성 제고를 도와주었고, 내가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2002년 설 직전 어느 날 나는 스프레이 페인트로 ‘파룬따파하오’를 쓴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납치당해 1년간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강제노동했다. 종이접기, 장난감 새 붙이기, 봉제 인형 만들기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했다. 파룬궁 수련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수련생은 낮에는 강제노역에 투입되고, 밤이면 집중적인 세뇌 교육을 받아야 했다. 1개월 후 나를 세뇌시키려던 사람은 결국 포기했다. 그들은 내가 너무 완고해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일부 교도관들이 신념이 확고한 수련생들을 존경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나와 대화할 때도 나쁘게 대하지 않았다. 수련생이 새로 노동수용소에 들어올 때마다 정부는 수천 위안을 더 지급해 주게 되고, 그에 따라 수용소 측은 매월 모든 수감자의 ‘사상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나는 그 보고서를 작정할 때마다 파룬궁이 얼마나 위대한지, 왜 탄압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썼다. 결국 나중에 나는 아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노동교양소 수감자들에게 천안문 광장에서 자행된 분신 자살 사기극, 즉 파룬궁을 비방하는 비디오를 보여준 뒤 모두에게 시청 소감을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파룬궁 제7강을 인용하면서 “파룬궁은 살생과 자살을 금지한다. 사기극에서 분신 자살자로 분장한 사람은 절대로 파룬궁 수련생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교도관으로부터 파룬궁 수련자를 감시하도록 지시받은 수감자 중에 박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배당받은 파룬궁 수련생을 은밀하게 보호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일부 감시자들은 중공에 세뇌되어 혹독하게 수련생을 학대했다. 한번은 어느 감시자가 나를 심하게 때리고 못으로 목을 긁어 상처를 냈다. 나는 노동수용소 소장은 정직한 사람을 도울 것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폭행 사실을 적시한 서신을 경비원을 통해 노동수용소장에게 제출했다.

나의 그런 생각은 적중했고 많은 사람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신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범죄자도 아니다. 박해는 물론이고 믿음 때문에 이곳에 갇힌 것도 옳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 수감자는 나에게 사과했고 그 후로 나를 학대하지 않았다. 수련생들은 계속해서 파룬궁의 가르침을 외우고 발정념하고 서로 격려하며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다.

노동수용소는 일주일에 가족 한 명만 면회를 허용하여 남편은 거의 매주 왔는데 가끔은 바르게 행동하는 딸과 함께 오기도 했다. 딸이 직접 그린 그림을 가져오기도 했다. 시누이 란과 다른 친척들도 왔는데 성격이 급하고 목소리가 큰 여자들이 남편에게 이혼하라는 말까지 했다. “다리가 세 개인 개구리는 찾기 어려워도, 두 발 달린 여자를 찾기는 쉽다.”라고 그들 중 한 명이 떠들며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오늘 이혼하면 내일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다. 돈 걱정은 하지 말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라고 크게 말했다.

남편은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젊고 수련생도 아니니 억지로 나와 함께 고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박해가 언제 멈출지는 모른다. 기다릴지 이혼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당신이 이혼을 제기하더라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남편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면회를 감시하던 경비원이 남편에게 이혼하라고 거들었다. 그러자 남편이 경비원에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 외에, 아내는 완벽하다.” 면회가 끝난 뒤 시누이 란과 친척들은 큰 소리로 떠들고 저주하며 남편을 데리고 돌아갔다.

한번은 노동교양소에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수련생에게 하얀 알약을 먹으라고 명령했다. 먹지 않으려고 버티는 수련생에게는 강제로 먹였을 것이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알약을 슬쩍 속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시하는 수감자가 내 손, 입, 혀 아래 등을 확인했지만 약을 찾지 못하자 내가 약을 삼킨 것으로 여겼다. 나는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서 감금 기간이 2개월 연장되었다.

강제 세뇌

연장된 기간이 끝나 출소하는 날 남편이 데리러 왔으나 610 사무실 요원이 직접 나를 세뇌반으로 끌고 갔다. 어쩔 수 없이 남편도 동행하게 되었다. 남편은 경찰차에서 시어머니, 시누이가 나를 기다리며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내가 다시 감금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세뇌반에 도착하자, 그들은 남편에게 내 식비로 월 1천 위안씩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나는 돈이 한 푼도 없다. 내 아내를 여기에 가두려면 숙식비용은 당연히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한 뒤 남편은 돌아갔다. 누구도 숙식비 말을 하지 못했다.

세뇌반은 3층 건물로 1층은 직원 사무실이고, 2층은 교도소,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수련생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나 역시 2층에 감금되었는데 방마다 책상, 의자, 침대, 세면대, 칫솔, 치약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천장의 조명은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음식은 매일 방으로 배달되었으며 식사는 문을 향한 의자에 앉아서 하게 되어 있어서 경비원들이 누가 식사를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지 쉽게 볼 수 있었다, 만약 단식투쟁을 할 때는 강제로 먹였다. 창문은 금속 막대로 고정되었고 일 년 내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각 출입문은 경비원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나는 방에 감금되자마자 온갖 나쁜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전향(강제로 파룬궁 수련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라고 한 관계자의 말이 떠올랐다. 쉽게 풀려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신이 피폐해졌다. 가족과 동료 수련생들을 만나고 싶은 등 머릿속이 온갖 허튼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진정하려고 노력하면서 먼저 사부님과 파룬따파를 떠올렸다. 그러나 벽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이곳에서 수련생들이 혹독하게 고문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욱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법(大法)의 가르침을 외우고, 발정념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여러 다양한 정부 기관과 기업에서 차출된 직원들이 높은 급여와 두둑한 보너스를 받기로 하고 이곳에 왔다. 그들은 보통 2인 1조로 팀을 이루어 수련생을 감시했는데 24시간 교대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직원 중에는 파룬궁 수련생의 세뇌를 담당하는 자가 있고, 수련생을 구타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불교 신자도 있었는데 모두 명예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인간의 양심을 버린 채 세뇌받음을 노동교양소보다 더 악랄한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소위 세뇌반 학습을 강요하는 말 이외 누구도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오면서 과일 등 간식을 가져왔는데 항상 직원을 위한 것과 나를 위한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왔다. 나는 비용을 걱정하며 남편에게 그만 오라고 하여도 남편은 듣지 않았다.

남편은 올 때마다 그곳 직원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는데, 직원들은 “이곳의 음식은 맛있다. 수용된 자들이 단식하면 간수들이 강제로 먹이기 때문에 단식해도 소용이 없다.”라는 등등의 말을 했다. 그곳에 일단 감금되면 가족이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있는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나의 세뇌를 담당한 직원은 청년 두 명이다. 그들이 나를 구타하면 구타는 불법이라며 대화로 하자고 말했다. 그들은 때리지 않겠다고 말한 후 매일 나를 세뇌 교육방으로 끌어다 놓고 문을 닫은 후 세뇌학습은 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가지고 놀았다. 나중에 한 불교 신자가 나를 전화시키는 일을 맡았는데 그는 매일 불교 경전을 읽어주었고, 나는 그때마다 발정념을 했다. 나중에 그는 나를 보기만 하면 두통이 시작되어 결국 아예 오지 않았다.

정오가 되면 수련생들을 모아 놓고 대법을 비방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수련생들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므로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 격려했다. 이 시간 역시 우리가 함께 발정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중에 더는 누구도 그런 비디오 시청 시간을 진행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법 공부와 진상활동을 할 수 없어서 날마다 불안했다. 한 달 후 사부님께 ‘세뇌반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고 청을 드렸다. ‘사부님, 저는 단식을 하고 이곳을 떠나 사람들을 구하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씀드린 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경비원에게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 당할 것을 생각해서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은밀하게 단식했다. 단식한 지 2일이 되자 효과가 있었다.

먹지 않은 음식을 작은 주머니에 넣어 화장실에 갈 때 변기에 버렸다. 한번은 세뇌반 간수장이 와서 노동교양소 수감생활에 관해 물었다. 그는 자신의 신상을 말하며 “관상동맥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서 늘 흉통과 요통이 있다.”라고 지나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났느냐고 묻자, 그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그렇게 됐다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그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식한 지 3일째 되던 날 당직 직원이 나보고 더 날씬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목이 아프고 검붉은 가래가 나왔다. 경비원들이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물이 담긴 대야에 뱉었다. 누군가가 아침을 가져왔을 때 나는 몸이 불편해서 식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그런 것을 보고 상급자에게 보고했고, 한 경비원이 확인하러 와서 내 눈이 움푹 파인 것을 보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말한 후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며 간호사를 불렀다.

그들은 남편 레이에게 전화로 연락해 당장 오라고 했으며, 대야의 피가 섞인 가래를 보고 과거 결핵에 걸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적 없다. 여기 와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경비원이 말했다. “우린 여기서 당신을 때리지 않았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혈압과 심장박동 수를 측정한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갑자기 간수장의 말이 생각나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남편이 급히 와서 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저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어!”라고 소리쳤다. 겁에 질린 경비원은 구타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곧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이 말에 남편은 “검사할 돈이 없다.”라고 했다. 그래도 경비원은 나를 병원에 보내겠다고 했고, 이미 몸이 아주 쇠약해진 나는 남편에게 “핍박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경찰병원으로 실려 가서 진찰받았다. 의사는 심각한 심장 관상동맥 질환과 결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가 입원하라고 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으며, 남편은 돈이 없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세뇌반 측에서 610 사무실에 연락해 요원 1명이 왔는데 마침 남편을 아는 사람이라 나중에 나를 집으로 보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모든 병 증상은 깨끗이 사라졌고,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더는 경찰을 믿지 말고, 파룬궁을 믿어야 한다.”라고 남편 레이에게 말했으며, 시어머니와 란에게도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파룬궁을 탄압했는지, 노동교양소에서 내가 어떻게 학대당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내 말은 들은 시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돼! 파룬궁 수련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나?” 그러자 시누이 란이 또 말했다 “그들이 또 언니를 괴롭히러 오면, 우리가 용납하지 않을 거야!”

가족의 지원

2003년 7월 지역 경찰서에서 경찰관 두 명이 집에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말을 더듬으며 나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펜을 찾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란을 집에 남겨둔 채 집을 나왔다.

좀 있다가 “당신… 새언니… 어.. 언제 돌아오나?” 첫 번째 경찰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난…모..몰라요…”라고 란이 대답했다.

“어…어째서…당신도… 말을..더듬나?”라고 물었다. “음…당신이…마..말을 더듬으니…나도 더듬지…요.”라고 란이 대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경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그렇게 가버렸다.

사실 경찰이 나타나 나를 괴롭힌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부부가 집 뒤편에 있는 방 2개짜리 집에 사는 줄 모르고 늘 시부모님과 란이 사는 앞집으로 곧바로 찾아온다. 한번은 경찰이 다시 나타나서 란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거부하며 란은 “수색 영장 없이 이곳에 오는 것은 위법”이라고 말했고, “오빠(레이)에게 5만 위안(한화 약 929만 원) 상당의 보석과 현금이 있는데, 당신들이 돌아간 후 그것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말하자, 경찰은 곧바로 돌아갔다.

또 한번은 두 명의 사복 경찰관이 차를 밖에 주차하고 노크도 하지 않고 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란이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아버지, 문을 닫으세요. 강도가 왔어요!” 이에 놀란 그들이 “아니, 우리는 경찰이오!”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쳐 나갔다. 그러자 란이 다시 소리쳤다. “그럼 왜 경찰 제복을 안 입었나?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안 무서워. 감히 여기 다시는 오지 마!” 사복 경찰들은 그대로 돌아갔다.

저녁 시간에 경찰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자리를 뜨자, 경찰 두 명이 가까이서 따라왔다. 내가 란에게 눈을 찡끗하자, 란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말을 걸었다. 경찰관들이 란의 행동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찾지 못한 그들은 란에게, 내가 돌아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란이 볼 일이 있어서 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관이 그때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며 따졌다. 그러자 란이 “당신이 뭔데?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나한테 돈 줬어?”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란이 그곳을 나올 때 누군가가 말했다. “저 여자는 다루기 쉽지 않아!” 란은 ‘당연하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오전 5시 전에 출근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찰 네 명이 겨울 어느 날 오전 6시에 수색 영장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나의 얼굴을 몰랐으므로 란을 나로 착각하고 단번에 란을 바닥에 쓰려 수갑을 채웠다. 수감에 채워진 란이 “누구를 찾고 있는데?” 하고 묻자, 한 상급자로 보이는 경찰이 나섰다. 란은 그에게 말했다. “나를 잡으려는 게 확실해? 사람을 잘못 체포하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아, 깜짝 놀랐잖아! 너무 무서워서 심장마비가 온 것 같아!(그녀는 심장병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노인들이 겁에 질려 병이라도 나면 병원비 줄 거야?” 그때 란의 언니가 뛰쳐나왔다. 란의 언니는 자궁암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파룬궁 진상을 알고 있었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자주 외워 수술 후 합병증 없이 결과가 좋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경찰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잠옷 바람으로 달려 나와 “누가 내 동생을 괴롭히는 거야!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다!”라고 경찰을 향해 일갈했다.

경찰관들은 상황이 잘못된 것을 알고 얼른 수갑을 풀고 란을 일으킨 다음 그들 자매에게 사과했다. 함께 살던 레이의 조카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은 그를 막으려고 했다. 조카는 경찰을 향해 “내 직장 일은 하루 건너뛸 수 있다. 그러면 당신들이 나에게 돈을 줄 거야?”라고 말하며 출근했다. 집을 나선 조카가 삼촌(레이의 둘째형)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말해주자, 그가 급히 차를 몰고 직장으로 나를 찾아와서 “납치되지 않으려면 멀리 떠나.”라고 내게 말했다.

한번은 여름날 저녁 8시경 남편이 친구 선과 장기를 두는 동안 나는 집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사복 경찰관 세 명이 헤드라이트를 끄고 은밀하게 순찰차를 몰고 와서 내 앞에서 멈춘 뒤 그들 중 한 명이 내 양손을 꽉 잡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는 신분증이 집에 있으니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를 본 남편이 경찰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자, 경찰이 나를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하게 풀려서 나는 얼른 손을 빼고 걸어갔다. 남편은 경찰이 나를 따라가지 못하게 경찰의 팔을 잡았다. 나는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 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가 집을 떠났다.

그들 경찰은 경찰차로 돌아가서 제복을 입고 경찰서장에게 공무 집행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하여 경찰서장이 20명이 넘는 경찰을 대동하고 우리 집을 둘러쌌다. 소란스러움으로 마을 사람들도 모두 구경을 나왔다. 란은 시부모님을 집 밖으로 모시고 나와서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경찰이 지금 여기에서 며느리를 잡으려고 하면 경찰차 앞에 누워 며느리를 잡아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결혼할 당시 체력이 왕성해 자주 싸웠다. 시어머니는 그럴 적마다 싸움 상황을 잘 처리했으므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란은 내가 이미 집을 나가 사라진 것을 알고 안심했다. 경찰관 두 명이 공무집행방해라며 남편을 경찰차에 태우려고 하자, 시어머니가 경찰차로 걸어가서 말했다. “나는 너무 늙어서 혼자 몸도 간수 할 수 없으니 아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들과 함께 경찰차(밴)에 타려고 했다. 백발노인의 그런 모습을 본 경찰은 남편을 놓아주었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집을 떠나야 했다.

축복과 감사

세월이 흐르면서 나와 가족 모두는 파룬궁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겠다.

2006년 10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택시와 부딪쳐서 자전거는 부서졌고, 나는 부딪치는 순간 튕겨 날아올라 택시 보닛 위에 떨어졌으며 그 충격에 택시 앞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고, 운전자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나는 다시 길가로 튕겨 나가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택시가 과속하는 바람에 길에는 길고 짙은 스키드마크가 역력했다. 구경꾼들은 모두 내가 살아나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다.

택시 운전사가 나를 병원으로 보냈다. 의식을 찾은 후 나는 택시 기사에게 괜찮을 것이며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 후 파룬궁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중공 조직에서 탈퇴하겠다는 동의를 했고, 다음날 그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이틀 뒤 몸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무시한 채 계속 평소처럼 법 공부와 연공을 했다. 2주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믿고 나를 중공으로부터 보호해 주려고 노력한 시누이 란은 운명이 바뀌었다. 란은 어렸을 때 한 점쟁이가 그녀의 결혼, 자녀, 그 외 삶에 대해 예언을 해준 적이 있는데, 47세에 죽을 것이라는 예측을 제외한 모든 예언이 적중했다. 지금 52세인 란은 어렸을 때보다 더 건강해졌고, 그녀의 전 남편이 그녀와 아들에게 아파트를 사주기도 했다.

나는 시부모님을 잘 모셨다. 몸이 불편해 누워 지낼 때는 밥을 떠먹이고 씻겼다. 시부모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큰 고통이나 어려움은 없었다. 시아버지는 85세에, 시어머니는 82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계속 외웠는데 무수한 붉은 파룬이 회전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남편 레이의 맏형이 2002년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은 형수가 재혼해서 나갔다. 그들의 아들도 좋은 사람이며 때때로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전봇대에 거는 것을 도왔다. 그의 집이 낡고 물이 새서 우리의 큰 집을 그의 집과 바꿔주자 매우 고마워했다. 그는 종종 사람들에게 말한다. “숙모(나를 칭함)가 파룬궁 수련생인 것이 자랑스럽다. 그녀는 모두를 잘 대해준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최고다.”라고 말하고, 또 남편 레이에게 숙모를 소중히 여기라고 말한다.

란은 나중에 이사 간 다음에도 늘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을 찾아온다. 우리는 그들 모녀와 언제나 매우 친하다. 그래서 며칠 동안 만나지 못하면 전화를 건다. 남편도 많이 달라졌다. 가족을 잘 돌보며 설거지도 한다. 내가 집에서 단체 법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오는 수련생들에게도 매우 친절하게 대한다. 과거에 비하면 거의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금 공장에서 그리 힘들지 않은 자리에서 일하며 급여도 좋은 편이다. 사람들은 그가 매우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건강도 좋다. 안색이 불그레하고 머리도 검은데, 그는 모두 파룬궁 덕분이라고 한다. 내가 진상 활동을 할 때 그는 종종 나를 돕는다.

딸은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 혼란한 사회에서도 늘 진실하고 성실하다. 딸과 남편은 모두 차에 대법 호신부를 걸어둔다. 나는 가족의 행복이 파룬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파룬궁 홍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원고를 썼다. 세상의 더 많은 사람이 나와 내 가족처럼 파룬궁의 혜택을 받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2년 5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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