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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나의 대가족(2)

글/ 중국 지린성 수련생 징수이(靜水)

“표범은 반점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반항적인 여자, 잔소리 심한 아내였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어떻게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는지를 말해보고자 한다.

(1부에 이어서 계속)

박해가 시작되다

1999년 4월 23일, 24일 이틀 동안에 톈진 경찰이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수십 명을 납치, 감금했을 때 나는 수련생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궁의 정당함을 호소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한 날은 4월 26일이었는데 톈진에서 수련생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중국공산당) 지도자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나는 수련생들과 함께 지린성 성도 창춘에 가서 청원했는데 지방 전역에서 온 많은 수련생을 만났다. 우리는 동원된 진압 경찰에게 잡혀 모두 버스에 태워졌으며,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수련생은 나이와 관계없이 발로 차고 때려서 버스에 태웠다.

버스는 여름 방학 중인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서 경찰이 한 사람씩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한 학교에 감금되어 있다가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곳을 빠져나와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중공 정부가 파룬궁을 박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대법수련을 만류했다. 남편 레이는 “나도 파룬궁 수련을 더는 허용할 수 없어요. 앞으론 그냥 집에 있어요!”라고 말했고, 시어머니와 어린 딸도 나를 걱정하며 만류했다. 결국 가족들은 남편에게 나를 잘 지키라는 말까지 했다.

남편은 경찰관 웨이와 친한 사이다. 1999년 7월 21일 경찰관 웨이가 남편에게 나를 경찰서로 데려오라는 전화를 했다. 우리가 경찰서에 도착하자, 웨이는 파룬궁 수련을 그만두겠다고 약속하는 성명서를 쓰라고 하면서 “집에서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남편에게 나를 설득해 서명받으라고 말한 후 방을 나갔다. 남편은 말을 듣지 않는 나를 발로 차면서 윽박질렀다. 남편이 나를 구타하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있던 웨이가 들어와 “우리 경찰도 때리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서명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 둘 다 집에 돌아가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 후 남편은 내가 집에서 혼자 연공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편이 집에 없을 때만 연공했다.

하루는 집에서 가부좌하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지만, 다리가 너무 아프고 저려서 얼른 풀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놀렸다. “불쌍한 여자! 어떻게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그 후로 남편은 나의 대법수련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물으면 “괜찮아요. 항상 집에 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내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을 때는 나를 위해 대법책을 치웠다. 한번은 경찰이 집을 수색하려고 하자 남편이 대법책과 사부님의 법상을 이웃에 맡겨 숨겼다.

당시 남편 레이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내가 대법수련을 하고 나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고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집안이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중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걱정이 되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을 마시게 되어 결국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몇몇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는 일을 논의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어머니를 만났다. 시어머니는, “네 남편이 흥분해서 식칼을 들고 너를 찾고 있었다. 내가 진정시켜 지금 우리 집(시댁)에서 자고 있다. 지금 집으로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잠시 다른 곳에서 머물라.”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남편이 시댁에서 잠을 잔 후 집으로 돌아와서 “괜찮아! 파룬궁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당신도 알고 있지.”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언젠가 박해가 그치게 되면 지금의 나의 수련 의지가 자랑스러울 거에요.”라고 말해주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날 이후 나를 때리지 않았고, 나의 연공도 막지 않았다.

두 차례 베이징행

나는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지방정부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대법수련을 심하게 박해하지 않으므로 중앙정부가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베이징에 갈 때마다 사부님의 시를 읊었다.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으니 마음에 真善忍(쩐싼런) 있네
세간의 대나한(大羅漢) 신도 귀신도 몹시 두려워하네”
‘홍음-위덕(威德)’

수련생들과 함께 처음 베이징에 갔을 때 그 지역 지리를 잘 알지 못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당시 파룬궁 수련생들의 베이징 청원을 막기 위해 전국 각 지역의 관계기관에서 베이징에 직원을 파견했다. 그때 우리 지역 관계자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와 말했다. “당신 참 순진하다. 전국 곳곳의 청원 민원실에 경찰이 배치되어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남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가서 표를 사주고, 내가 차에 타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돈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일이 없는 나는 작은 물품을 하나 살 때도 일일이 남편에게 돈을 타야 했다. 그러므로 1위안은 물론 단돈 50전이라도 아꼈다. 그렇게 모은 돈이 베이징행 기차표를 살 수 있을 만큼 되자, 한 수련생(나중에 박해로 사망)과 함께 갔다. 가는 길에 역시 사부님의 시를 외웠다.

가는 중에 누구도 우리를 막지 않았지만,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헤어지게 되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톈안먼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엔 이미 수련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있었고, 연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가게에서 종이와 눈썹연필을 사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써서 광장으로 들고 나가 높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은 순수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른다. 경찰관이 다가와 들고 있는 종이를 빼앗아 가며 거리 미화원에게 나를 감시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냥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다가 몇몇 수련생들이 “파룬따파하오”, “리 사부님과 수련생들은 결백하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합류했다.

톈안먼 광장경찰서에서 각지에서 청원하러 온 수많은 수련생을 만났다. 우리는 파룬궁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납치되어 감금되었다. 우리는 함께 사부님의 시를 읊었다.

경찰이 한 사람씩 불러내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면서 이에 불응할 때는 심하게 구타했으므로 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적 사항을 말해주었다. 그날 밤 베이징에 있는 거주지 연락사무소로 넘겨졌고, 다음 날 거주지로 압송되어 구치소에서 7일간 감금되었다.

그 후 더는 돈을 모을 기회가 없었다. 가족이 1999년 설날 친정에 갔을 때도 남편은 표와 선물을 직접 사주며 돈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사촌이 딸아이에게 용돈으로 100위안을 주어 그 돈을 내가 보관했다.

세 번째 베이징 청원

2000년 2월 11일 설을 쇠고 며칠 후 나는 다시 베이징에 가기로 결심하고 남편과 딸이 자는 사이에 집을 떠났다. 돈을 아끼기 위해 팝콘 한 봉지와 오이 두 개를 사서 끼니를 때웠다. 여행은 순조로웠고 준비한 현수막을 톈안먼 광장에서 펼칠 계획이었다. 손에 든 것이 없어 쉽게 검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깃발을 펼친 직후 경찰에 납치되어 천안문 경찰서에 감금되었다.

경찰에 심문당하면서 젖은 고무 봉으로 구타당했다. 고무 봉으로 때리면 상처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 경찰관이 나를 탁자 위에 눕혀놓고 목에서 종아리까지 소리가 크게 나도록 때렸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사부님께서 나를 대신해 고통을 감당하셨음을 알았다.

그래도 나는 이름과 주소를 말하지 않았다. 점차 많은 수련생이 납치되어 들어왔다. 경찰은 인적 사항을 밝히지 않은 나와 또 다른 여성 수련생 두 명을 구치소로 끌고 갔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서 더 받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우리를 그대로 풀어줬다.

수련생 두 명은 허베이성과 산둥성 출신이었다. 경찰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기차역, 버스 정류장, 고속도로 건널목, 호텔 및 그 외 모든 공공장소에 경찰과 임시 고용한 사람들을 배치했다.

우리 세 명이 자정쯤 벽돌공장 앞을 지나갈 때 일꾼들이 아침을 위해 찐만두를 데우려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춥고 배고픈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우리가 파룬궁 수련생인 것을 알고 먼저 몸을 녹이고 음식을 먹자고 했다. 그들에게 파룬궁과 ‘진선인(真·善·忍)’ 원리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중 한 명이 “우리도 알고 있다. 경찰이 쫙 깔려서 찾고 있으니 조심하라.”라고 했다.

우리는 찐빵 대접을 받고 그곳을 나와 계속 걸어서 가다가 새벽녘에 산둥성 남자 수련생 루이를 만났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현지 관리들에게 집을 봉인 당했기 때문에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고, 현재 베이징에서 20㎞ 정도 떨어진 한 수련생 집에 머물고 있다면서 우리를 그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에서 롄이라는 여성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그 지역 협조인이었다. 우리는 함께 법 공부를 한 후 잘 시간이 되었을 때 롄이 내 등과 다리에 고무 곤봉으로 맞아 멍든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한 달 후 롄, 루이 등 15명 수련생이 “파룬따파하오”, “진선인(真·善·忍)” 현수막과 풍선을 준비했다. 접착식 포스터와 빨간 물감, 스텐실도 준비한 후 롄이가 이끄는 팀과 나와 루이가 이끄는 두 개 팀으로 구성했다.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서도 깨끗하고 눈에 잘 띄는 곳을 골라 “파룬따파하오”라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텐실은 잘 고안되었으며 결과도 좋아 보였다. 다른 수련자들은 길을 따라가며 전단을 배포하고 접착식 포스터를 붙였다.

도중에 순찰차를 발견하여 풍선을 든 여성을 제외한 우리는 모두 흩어져 숨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웠으므로 풍선도 잘 숨길 수 있었다. 그들 눈엔 걸어가는 할머니만 보였을 것이다. 순찰차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루이는 우리를 불러 모아 계속하기로 했다. 다른 팀도 순찰 중인 경찰과 마주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2~3명씩 나누어 톈안먼 광장으로 걸어갔다. 노년 수련생 두 명이 천천히 풍선을 풀었다. 많은 사람이 풍선에 쓰인 “파룬따파하오”를 봤다.

경찰이 풍선을 잡느라 바쁠 때, 우리 다섯 명은 현수막을 펼쳐 높이 들고 “파룬따파는 위대하다!”, “리 사부님과 수련생들은 결백하다!”라고 외쳤다. 다른 수련생 팀도 깃발을 올렸다.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며 경찰차를 부르고 있었다. 깃발은 매우 길었고 경찰들은 그것을 빼앗기 위해 몸으로 감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배너를 펼쳤다. 우리는 현수막을 지키며 계속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다. 나중에 결국 현수막을 경찰에 빼앗겼다. 경찰은 현장에서 우리를 납치해 주먹과 발길질로 구타하며 경찰차에 강제로 태웠다. 그런데 경찰은 누구도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현수막을 꺼내 펼쳐 들고 큰 소리로 “파룬따파는 위대하다!”라고 외쳤다. 나도 납치됐다.

우리가 톈안먼 광장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경찰서는 수련생을 더는 수용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를 다른 장소로 실어 가기 위해 큰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 수련생들이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사부님의 시를 읊었다. 무장한 경찰은 계속 우리를 때리고 발로 찼다. 우리는 미윈(密雲)현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경찰은 밤새도록 우리를 심문했다. 나는 신문을 받으며 이름과 주소를 대라는 추궁을 받았지만, 손과 신발로 뺨을 맞으면서도 인적 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경찰에게 계속 구타당했지만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고통을 대신 겪으신 것이다.

“이름을 대라. 그러면 풀어주겠다. 산둥성 더저우(德州)시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말할 수 없다. 내가 말하면 우리 지역의 경찰 등 관계 공무원이 문책당하고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으므로 말하지 않겠다.” 끝까지 버텼다. 그때 누가 취조실 밖에서 “구치소로 보내!”라고 소리쳤다.

우리 16명은 구치소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축축하고 추워서 한 수련생이 자비로 담요를 사서 깔았고, 또 다른 수련생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오이 1개를 꺼내 모두 돌려가며 한 입씩 먹었는데 한 번 다 돌았는데도 오이가 반 정도가 남았다.

나는 담요를 사서 깐 수련생 그리고 롄과 함께 단식으로 항의했다. 그러자 3일 후 경찰이 우리를 고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가서 풀어주며 “다시는 오지 마!”라고 말한 후 돌아갔다.

협력

다음 날 저녁 고향에 도착해 집에 가기 전 핑을 찾아갔다. 경찰에게 돈을 전부 빼앗겼으므로 몇 마일을 걸어갔으므로 자정이 돼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수련생이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다음 날 다른 도시에서 진상자료를 가지러 온 한 수련생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핑과 나를 다른 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그곳 수련생들과 모임을 하게 했다. 나는 베이징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고, 핑도 자신의 인식을 말했다. 우리는 2주 동안 각 마을을 방문하여 많은 수련생과 교류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류하며 격려했다.

핑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밤이었는데 그녀가 내 계획을 물었다. 나는 “집을 떠난 지 이미 2개월이 넘었으므로 일단 집으로 가서 집의 상황부터 알아봐야겠다. 남편 레이는 밤에 휴대전화를 끄는 경우가 많은데 전화를 걸어보고 받으면 집에 가겠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걸자, 남편이 받았다. 내가 집으로 가겠다고 하자 매우 기뻐했다.

“당신이 곧 집에 올 줄 알았어. 요전 날 아침 마당에서 까치가 노래를 불렀거든. 그래서 이틀 내내 전화기를 끄지 않고 켜놨어. 택시를 타고 바로 집에 오면 내가 요금을 낼게.” 나는 핑과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벌써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 두었던 내 옷을 꺼내 보여주면서 “다시 베이징에 갈 땐 남편 체면을 생각해서 잘 입고 가.”라고 웃으며 말했다.

딸은 시어머니가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시댁에 갔을 때 무사히 집에 왔다고 시어머니도 기뻐했다. “이제 나는 발 뻗고 자도 되겠다. 이젠 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하면서 시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료 배포

지역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두려워 딸을 시댁에 맡기고, 우리는 친정집에서 살기로 했다. 남편은 비디오게임 방을 열어 내가 운영하도록 한 후 기계 수리와 업데이트를 해주려고 가끔 매장에 왔다.

어느 날 남편이 전법륜(轉法輪)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고, 그와 함께 사부님의 9일 강의도 한 번 들었다. 남편은 가르침이 좋고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지 않았다.

나는 현지 수련생과 연락해서 자료를 얻은 후 낮에는 비디오 게임방을 운영하고 저녁에는 자료를 배포하러 나가게 되었는데 가끔 거의 새벽에 돌아왔다. 그러자 남편이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나가서 내가 붙인 포스터가 너무 낮은 것을 보고 “그렇게 낮게 부착하면 떼어내기가 쉽다.”라고 하면서 더 높이 올려붙여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자료를 배포하고 있는 것을 경찰이 봤다. 그래서 우리는 시댁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쨌든 비디오 게임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로 학생들이 많이 왔고, 그것이 학생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료를 배포하고 벽에 포스터를 붙이러 나갔다. 한번은 수련생이 아닌 사촌과 함께 갔다. 우리는 먼저 자료를 배포한 다음 학교에 포스터를 붙였고, 그다음 마을 사무실에 갔는데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사촌이 망을 보고, 내가 포스터를 붙였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완벽하게 붙이려고 집중했다. 다 붙이고 나자 사촌이 말했다. “조금 전 한 남자가 포스터를 부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갔는데 너무 무서웠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를 보호해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사촌에게 말했다. “우리는 가장 옳은 일을 하고 있어. 걱정할 것 없어!”

(계속)

 

원문발표: 2022년 5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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