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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모순을 일으키는 집착심을 닦다

글/ 호주 대법제자

[밍후이왕] 10여 일 전, 나는 ‘개광(開光)’ 한 절의 법을 외웠는데 그 안에서 지상불(地上佛), 지상도(地上道) 문제를 언급하실 때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가 고생을 겪어서 수련해 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수련해 낸 것인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는 집착심이 아주 많았으며, 늙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앞날에 희망이 없어지자 이 마음이 자연히 버려졌고 닳아 없어진 것인데, 이런 소도(小道)는 역시 이 방법이다.”[1] 이 단락의 법을 외울 때 ‘닳아 없어졌다[磨掉]’는 두 글자가 특히 눈에 들어왔고, 머릿속에 별도로 각인되어 있었다.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수련해 온 것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닳아 없어진 것일까?’ 대답은 닳아 없어진 것이었다. 수련한 것이 소도를 걸은 것이었나? 수련의 엄숙함을 깊이 느꼈다. 매일 거기에 앉아 법공부와 연공을 하고, 대법 실증하는 일을 좀 했다고 해서 수련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셨다.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그 마음을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1] 사실 어떤 때 도대체 자신이 착실히 수련했는지, 자세히 따져보지 않으면 정말 가상에 미혹되기 쉽다.

표면적으로 나는 가정의 모순 중에서 고생을 겪기도 하고 참기도 했지만, 출발점이 잘못됐다. 전자는 마음을 닦아 집착을 제거하고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고, 후자인 참음은 모순과 충돌을 줄이는 것이다. 속인의 생활 속에서 내 불평도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닳아 없어진 것이지 근본적으로 착실하고 착실하게 수련해 없앤 것이 아니었다. 만약 깊이 파내지 않고 자신이 수련을 괜찮게 한다고 여긴다면 사실 소도를 걷는 것이다.

내가 그런 착실히 수련하는 문제를 말하려고 생각하고 이 원고를 쓰면서 첫날 밤 법공부하며 사부님의 2006년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을 배웠는데, 나는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수련생은 만약 한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해 남이 지적하면 그는 즉시 말한다. 당신은 모르는데 당시에는 이런 정황이었고 어찌어찌했습니다.”[2] 읽자마자 즉시 이 구절은 직접 날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인식이 들었다. 가족도 모두 이 문제가 날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좀 부끄러웠다. ‘나는 늘 이런 식이었는데 이전에는 왜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가정의 모순은 매번 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면서 문제가 더 커졌는데 내 오성(悟性)이 얼마나 낮았던가!

남편(수련생)과 모순이 발생할 때마다 남편은 내가 변명한다고 했는데 나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워 날 업신여기는데 이치가 맞는 곳이 하나도 없어.’ ‘도대체 누가 옳은지 그른지 하나하나 따져볼까? 분명히 그렇지 않은데 당신은 전후 사정을 들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한바탕해보려고만 하네.’ 사이가 좋을 때도 사실 법(法)을 떠나 생각한다. ‘나와 당신의 견해가 같지 않지만,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으니 내 잘못이라고 하지 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어쨌든 둘 다 상처를 입는다.

이 집착심은 생생세세의 요소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50여 년 이래 지금까지 닦지 못했기 때문으로, 매번 닳아 없어지는 중에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으면서 그것을 아주 잘 보호해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반대로 남편에 대해 말한다면 여러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왔던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여 년을 어떻게 지나왔던가? 나는 속으로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나는 다시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펼쳐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 정말 못났구나. 모순이 생길 때마다 남편은 아주 엄숙하게 내 문제를 지적했고 나에게 늘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의 큰 의미를 대부분 들려주었지만, 당시 나는 남편이 야박하고 심한 말로 내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해 말하는 내용을 듣지 않았고, 사부님께서 남편 입을 빌려 나에게 방할(棒喝)하신다는 것은 더욱 생각조차 못 했구나.’

사부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수련하는 이는 사람인데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당신이 착오를 승인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뭇사람 웃음) 당신 이것은 누락이 아닌가? 당신은 수련 중에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닌가?”[2] 이것을 읽으며 이 몇 년간 행위가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아, 예전에 나는 대체로 내가 잘못하지 않았고 잘못이 있더라도 매우 사소해 남편과 비교해 봐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했으며, 남편은 속이 좁아 나에게 트집 잡는 것으로 여겼구나.’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아이들도 다 아는 이치를 왜 당신만 모르는 거야?” 나는 당시 이 말을 듣고 무척 화가 났다! 남편의 이 말이 매우 신랄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내가 세 살 어린애만도 못하다는 거잖아?’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고 결국 남편은 지쳐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이 이치는 우리 집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남편은 어이없어했다. 남편은 나에게 그렇게 여러 번 말했는데 내가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이런 사소한 일을 이렇게 밖에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 내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니, 이 집착이 폭로될까 두려워 매번 죽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남겨둔 채 오히려 남편을 지쳐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가정에 마난(磨難)을 겹겹이 쌓아 매우 취약한 단계에 이르게 했다. 어렵게 돌파하려는 남편을 보고, 수련의 길에 들어서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나는 오히려 미래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이 못난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고 내가 문제가 이렇게 큰 데도 법공부를 더 하고 법에서 조속히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바라시면서, 주변에 수련생을 배치해 법을 함께 외우고 교류하게 해주셨다. 법 암기에서 낙오될 때마다 수련생은 나를 격려하고 독촉했다. 나는 점점 법을 외우며 승화하고 자신을 착실히 수련하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이런 정진하는 마음을 보시고 한 차례씩 내 정념을 깨우쳐 주시고, 이 단락 법을 배울 때 이렇게 큰 깨달음을 주셨다. 반복해 몇 번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한 번도 없었던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고, 진정하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상유심생(相由心生)’[3]의 한 층 이치를 체험했다.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니 한결 편안해 짐을 느꼈고 동시에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렸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부가 말했듯이, 당신이 인생 중에서 부딪힌 어떤 일도, 당신이 이 수련의 단체에 걸어 들어오기만 하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고, 모두 당신의 제고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밖으로 밀고 있는가. 밖으로 밀 뿐만 아니라, 또 아주 교활하게 변한다.”[4]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 법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다음에 다시 심성을 제고할 기회가 있을 때 더는 밖으로 밀어내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부님께 배치해 주신 제고할 기회로 더는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동시에 남편에게 준 상처도 생각해봤다. 지금 남편은 지난번 우리 사이의 갈등 때문에 아직도 조금은 침체돼 있다. 그래서 그다음 날 남편과 소통하고 사과하려 했다. 생각해보니 남편에게 많은 위로를 해줘야 했다. 이것은 남편이 20여 년간 바라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문제를 인식하고 말해도 남편의 정서는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관용이 부족하고 타인의 개변을 요구하지 못한다는 등등의 말을 하기 시작하며 나에 대한 원망심이 아직도 있다고 했다. 평소에도 조금씩 내가 스스로 무엇을 실증하려 한다고 말하면서 타인에 대해 불복하는 건 남편 자신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법공부를 더 많이 해 같이 돌파하자고 했지만, 그 후 내가 한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교류 결과가 생각처럼 만족스럽지 못하자 도대체 어떤 마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는지 스스로 생각해봤다.

1. 다른 사람에게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제야 인식했음에도, 남편도 마땅히 나와 똑같이 즉시 현재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남편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남편이 행동에 옮기도록 기대해야 했다.

3.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 남편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거나 현재의 어려움을 경청하지 못했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 보지 않고 자신만 이해해 달라고 남편에게 강요했다.

4. 과시심이다. 샅샅이 깊이 파낸 결과 과시심을 찾아냈다. 내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를 인식하게 됐고 수련에서 큰 제고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집착심으로 여러 해 동안 얼마나 손실이 컸던가? 매우 두려운 것으로 결국 과시심이었다.

5.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다. 평소 나와 남편은 함께 사업을 했는데 일반적으로 내가 잘못할 때가 많았지만 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틀림없이 남편에게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갈등이 왜 그렇게 격화되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남편도 잘못할 때가 있었지만 나는 보통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관용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자세히 찾아보니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우리 사이에는 크고 작음을 판단하는 차이가 아주 컸다. 나는 사람 마음으로 가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둘째, 남편에 대한 요구에서 ‘나는 남편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줄 수 있는데 남편은 왜 나의 잘못에 관용을 베풀지 못하지?’라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니 당연히 결과가 어떠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기만 하고, 이전의 모순이 아직 해결되기 전에 새로운 모순이 또 나타났다. 내 오류 비율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어떤 때는 일어나기 어려운 사건이 나타나기도 했고, 결국 내가 한 일에 큰 잘못만 없으면 잘한 것으로 여기는 정도로까지 변했는데 이렇게 나에 대한 요구 조건도 낮아졌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조바심이 났고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또 잘못을 저지르게 됐을까’라고 생각했다. 사람 마음이 강해 자신의 마음마저 삐뚤어지고 자신이 잘못하지 않을 때는 상대방이 인정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이것이 남편이 말한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었다.

6. 쟁투심이다. 내가 종종 잘못하고 더욱이 문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남편이 내 잘못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항상 모순을 더 격화시켰으며, 모순이 격화될수록 남편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마음속으로 남편이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남편이 나에게 상처 주면 나는 남편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당(邪黨)의 이론이 아닌가?

이상의 문제를 인식한 후 생활과 업무의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가능한 한 자신을 바로 잡고 정정당당한 수련인이 됐다. 가정 환경도 점점 호전됐고 남편과 아이들 상태도 전보다 매우 좋아졌다.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법공부하고, 가부좌하며, 온 가족이 평온한 분위기에 빠져 있는데 진정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1]였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사부님의 자비롭고 고심(苦心)한 제도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10-따지웬(大紀元)회의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1년 10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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