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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밍후이왕](유럽 밍후이 기자 보도) “아버지에게 또 일이 생겼어! 경찰이 지금 문밖에 있어!” 자오솨이(趙帥)는 하이난(海南)성 충하이(琼海)시에 사는 어머니로부터 이 음성 메시지를 받고 바로 영상통화를 시작했다.

2021년 4월 7일이었다. 자오와 그의 어머니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정용 보안 카메라를 통해 일부는 제복을 입고, 다른 일부는 사복 차림으로 문밖에 있는 경찰 6명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노크했다가 잠시 후 문을 발로 차며 위협했다. “마지막 경고다. 문을 열지 않으면 침입하겠다!” 경찰관들은 또한 건물 관리실이나 자물쇠 수리공에게 연락해 문 열 궁리를 했다. 이것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40분 넘게 계속됐다.

경찰의 무모한 행동과 어머니의 무력한 모습을 보고 자오는 중국에 있지 않은 데도 긴장했다. 이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파룬궁수련생인 자오에게는 이 모든 것은 너무 익숙하고 무서웠다.

가택수색과 잦은 이사

1999년 7월부터 파룬궁을 박해한 중국에서 자오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파룬궁수련생이 체포, 구금, 고문,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 사건 중 하나가 지난해 설날에도 일어났다. 그날 경찰이 문을 두드린 후, 자오의 어머니가 문을 열자 경찰관 10여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머니의 질문을 무시하고 침실 두 곳과 부엌을 포함한 모든 곳을 뒤졌다. 자오의 책가방까지 뒤집혀 있었다. 자오의 아버지는 이미 체포돼 지역 경찰서에 갇혀 있었다.

1년 뒤 자오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가 생명에 위험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치소에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수척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미약한 목소리를 듣고 아버지임을 알았다. “사람이 그렇게 수척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중국 동북부 남자들처럼 자오의 아버지는 키가 크고 힘이 셌다. 그는 180cm에 거의 100kg이나 나갔다. 하지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22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한 후 그의 체중은 겨우 40kg이었다. 그는 걷지도, 서 있지도 못했다.

그날 자오는 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깃털처럼 가벼웠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되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라고 자오는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담석증 진단도 받았다.

아버지가 갇혀 있는 동안 자오는 면회를 다녔고 아버지가 점점 더 말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의 그 수척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 몰랐지만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파룬궁 박해는 체포, 구금, 고문 이상이다. 자오의 아버지는 수년간 일했던 은행에서 실직했고, 어머니는 공무원 승진을 포기해야 했으며 조기 퇴직해야 했다. 심지어 자오도 학교 친구들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자오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 허강(鶴崗)시에 있는 집을 떠나 중국 남부 하이난성까지 이사했다. 그들은 경찰의 괴롭힘을 피해서 6개월에 한 번꼴로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들은 파룬궁과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

자오가 4살 때,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빚을 졌다. 그러나 그해(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설상가상으로 자오의 가족은 부모 월급의 약 10년 치에 해당하는 약 4만 위안(약 7백만 원) 빚을 떠안게 됐다. 이는 부부간의 끊임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말다툼은 아들 모르게 했지만 자오는 그래도 가끔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3년 자오의 아버지는 겨우 36세에 간암 증세를 보이는 B형 간염 진단을 받았다. 온갖 약을 다 써 봤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형제 2명이 40세 전에 간암으로 떠났으므로 그는 민간처방, 기공, 점술가 상담 등 계속 치료법을 찾아다녔다. 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족은 텔레비전 세트와 냉장고까지 팔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으로 자오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는 자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자주 병가를 냈고 아들을 때리는 일이 잦았다.

자오는 부모 간의 말다툼과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방과 후 집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루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통학버스 안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었는데, 버스에서 그는 다양한 거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버스 창문에 김이 서리면 자오는 손으로 그것을 닦았고 다시 김이 서리면 또 닦곤 했다.

파룬궁을 만나다

자오의 불행한 어린 시절은 1995년에 바뀌었다. “당시 저는 할머니 댁에 있었어요. 아버지가 출장을 다녀와서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파룬궁을 발견했다고 하셨어요”라고 자오는 회상했다. “아버지의 건강은 실제로 나날이 좋아졌고, 우리 가족 모두 점점 좋아졌어요.”

또한 아버지는 자오를 돌보기 시작했다. 과거에 아버지는 질병의 고통과 근심 때문에 바둑이나 카드 게임 같은 취미에 빠져 종종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아버지는 자오의 학업을 도왔고 가족을 위해 요리도 했다. 매일 정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점심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이제 버스 타는 시간이 아니라 그의 집, 진짜 집에 있는 시간이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자오에게도 파룬궁을 배우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과거에 아버지는 다양한 기공을 수련했지만 혼자만 했을 뿐 아내나 아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오와 어머니 모두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자오의 어머니는 축농증을 앓았는데 이로 인해 호흡이 곤란했다. 가끔 비강 스프레이를 뿌려야 했고 때때로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중국 동북부의 추운 겨울에 그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녀는 수련하고 나서 축농증이 나았다. 남편처럼 그녀도 인내심이 강하고 친절해졌다. 그들은 더는 아들의 성적이 나쁘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개선 방법에 대해 실질적으로 조언했다. 그들은 또한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파룬궁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당시 자오는 11살이었고 그는 전법륜과 다른 파룬궁 서적 읽기를 좋아했다. 다른 수련생들과의 교류 또한 그에게 진선인(真·善·忍) 원칙에 따라 살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자극이 됐다. 더는 이런저런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근처 공장의 타일을 망가뜨리거나 작은 동물이나 곤충을 해치는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황금 시절

자오는 또한 부모님과 함께 주말 단체 법공부와 단체 연공을 좋아했다. 매주 일요일, 그들은 30분 걸어가 도시의 공공광장에서 다른 수련생 수백 명과 함께 연공하곤 했다. 앞줄에 서 계신 할아버지들은 항상 황금색 옷차림이었고 멋져 보였다. 연공이 끝나면 수련생들은 함께 남아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를 봤다.

자오는 파룬궁이 다른 여러 수련법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기공 수련법은 동작에 초점을 두는 반면, 파룬궁의 가르침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인격 향상을 강조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파룬궁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어요.” 모두 더 건강하고 행복해졌고 그들의 생활의 어려움도 해결됐다. 어머니는 승진했고 부모님 모두 월급이 올랐다. 빚을 갚고 단체 법공부를 위해 별도의 큰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충분히 남았다.

중학교 때부터 자오의 아버지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종종 그를 깨워 단체 연공을 시켰다. 중국 동북 지역 기온은 종종 영하 20도에서 30도까지 내려갔다. 그래도 사람들은 매일 따뜻함을 느꼈고 행복했다.

자오에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는 ‘황금 시절’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태양처럼 밝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어요. 생활이 힘들 때 항상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납니다.”

어둠 속의 기적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한 후 자오의 부모는 체포를 피해 여러 차례 집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는 두 차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고 형기는 5년이었다. 그러나 자오는 가족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파룬궁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종종 그가 매우 운이 좋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압박과 차별 때문에, 자오는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점수를 잃을지라도 파룬궁의 명예를 훼손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자 허강시 최고 고등학교에서 미술 실력이 뛰어났던 그를 특기생으로 뽑았다.

대학에 갈 때가 되자 놀랍게도 자오는 베이징 수도 사범대학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항상 베이징에서 공부하기를 원해왔던 그에게 이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최근 수도사범대학이 그래픽디자인 학과를 개설했고 그 과에 그가 입학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자오는 군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그의 일이 주로 중국공산당과 군대를 찬양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일을 그만뒀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임시 주택을 지어서 임대했고 작은 호텔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0년, 그들은 아파트 입구에서 우담바라 꽃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다.

자오는 금융업계 일도 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배웠고 고객들의 요구를 잘 이해했다. 사업 확장을 위해 기술 파트너를 찾는 고객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좋은 성과로 성급(省級)상을 받았고 중국을 떠나기 전에는 한 회사의 재무이사로 재직했다.

중국 탈출

그러나 그의 성공적인 경력과 행복한 가정은 22년 계속된 박해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했다.

2018년, 경찰의 이상한 전화 한 통으로 자오는 온 가족이 여전히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은 그들이 언제든지 집을 떠나 불확실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오는 그의 부모님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고 또한 딸이 공산당의 교리를 공부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더 나은 환경을 원했다. 부모의 기대와 마찬가지로 자오는 자신의 딸이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을 지키며 살기 바랐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중국을 떠나 자유의 나라에 가기로 했다.

'图:赵帅和妻子于二零一七庆祝年女儿一周岁,拍摄于海南家中'
자오솨이와 그의 아내, 딸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님은 아직 하이난성에 있다. 현재 그의 아버지가 다시 한번 체포됐고 그는 경찰로부터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이 없는 사회

대학 시절과 비슷하게 자오는 다시 한번 부모님과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파룬궁과 박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에게 파룬궁을 소개한 분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그 수련이 얼마나 놀랍고 기적적인지 보았습니다. 파룬궁은 정직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언행 역시 저에게 아버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여러 경험으로 그는 또한 중공의 악랄한 본성을 볼 수 있었다. 자오는 그 억압이 파룬궁수련생들에게 고통을 줬을 뿐만 아니라 중공 간부들에게도 피해를 줬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무고한 수련생들과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을 억압해 중국을 위험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중공이 계속 존재하는 한, 더 많은 중국인이 그의 가족과 같은 비극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이야기는 파룬궁에 대한 믿음 때문에 중국에서 체포, 차별 또는 괴롭힘을 당한 수천만 수련생들 중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더 많은 사람이 중공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자오와 그의 아내는 중공의 잔혹성을 폭로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해 왔다. 그는 또한 그가 그 ‘황금 시절’을 겪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이 중공을 거부하고 희망을 찾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6월 22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6/22/427210.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6/25/1938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