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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해 21년 워싱턴DC 수련생 중국 대사관 앞에서 촛불로 밤을 밝히다(사진)

[밍후이왕](밍후이 기자 미국 워싱턴DC 보도) 2020년 7월 17일, 미국 수도 워싱턴DC 지역의 일부 파룬궁(法輪功) 수련생이 주미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대사관 앞에 모여 파룬궁 박해 중지를 요구했다. 어둠이 내릴 무렵, 그들은 촛불을 밝히고 21년 동안 중공의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을 추모했다.

'图1~4:二零二零年七月十七日,美国首都华盛顿地区的部份法轮功学员在中共驻美大使馆前举办集会和烛光守夜,要求停止迫害法轮功。'
2020년 7월 17일, 미국 워싱턴DC 지역의 일부 파룬궁 수련인은 주미 중공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거행했고 촛불로 밤을 밝히며 파룬궁 박해 중지를 요구했다.

민간 경로의 대략적인 통계에 의하면 1999년 7월 20일 이래로 이미 4500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당해 사망했고 수천만 명의 파룬궁 수련인이 중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혔으며, 불법 노동교양, 잔혹한 고문, 정신적인 시달림과 경제적인 갈취, 심지어 생체장기를 적출당했다. 무수한 가정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정이 파괴되었으며 가족이 사망했다. 중공이 범죄 사실을 전력으로 은폐하여 많은 안건이 여전히 은폐되어 있으므로 이 숫자는 실제 박해사례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집회에서 그들이 몸소 겪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다롄(大連)에서 온 세 자매인 왕춘룽(王春榮), 왕춘잉(王春英)과 왕춘옌(王春彥)은 모두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사업은 중단됐고 몸은 감옥에 갇혔으며 총 16년 반 동안 갇혔다. 란저우(蘭州)대학 박사과정을 다니던 탄샤오룽(譚曉榮)과 남편은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가 부부 두 사람은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 당시 두 살이던 아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다. 21년간의 박해는 90년대 생인 소녀 왕시(王璽)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한 차례 박해로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에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이 사망하는 슬픈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모처럼 신앙과 정의를 위해 항쟁하는 파룬궁 수련생은 오늘날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믿었다. 전 지린(吉林) 건축사였던 자오칭카이(趙慶凱)는 여러 해 동안 아내와 두 자매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박해당하는 모습을 봐오면서 그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감당했다. 고정된 거주지가 없고 곤궁에 빠져 떠돌아다니며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시달림을 겪었다. 그는 중공의 사악한 본질을 똑똑히 봤고 중국인은 오직 중공을 탈퇴해야만 비로소 희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21년 이래에 중국과 세계 각지의 파룬궁 수련생은 끊임없이 세인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과정에서 갈수록 많은 선량한 사람이 중공의 사악한 본질을 똑똑히 보고 에포크 타임스 웹사이트에서 중국공산당, 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에서 탈퇴하는 성명을 냈는데 이미 3억 6천만 명을 넘어섰다.

다롄 세 자매 16년 반 동안 감옥에 수감되다

랴오닝(遼寧) 다롄에서 온 왕씨 가문의 세 자매는 각각 자신만의 성공적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첫째 언니 왕춘룽은 다롄 신청(信誠)회계사사무소의 회장이었고 둘째 언니 왕춘잉은 다롄중심 병원의 중급직책의 간호사였으며, 셋째 여동생 왕춘옌은 무역 물류 회사를 갖고 있었다. 그녀들은 일과 생활에서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며 사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1999년 장쩌민(江澤民)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여 ‘명예의 실추, 경제적인 붕괴, 육체적인 소멸’의 반인륜 정책을 실시했다. 세 자매는 여러 번 불법 납치돼 형을 선고받았으며 총 16년 반에 달한다. 왕춘룽의 회계사사무소는 마비됐고 70여 명의 직원이 실업했다. 왕춘잉은 여러 차례 잔혹한 고문으로 팔이 위축돼 지금까지도 왼손이 저리고 손가락 피부가 검은색이다. 왕춘옌은 회사 업무가 정체되고 명예가 훼손되어 2001년 불법으로 납치됐을 때 경제적인 손실만 해도 130만 위안(약 2억 2285만 원)에 달한다.

'图5:王春彦、王春荣、王春英三姐妹'
왕춘옌, 왕춘룽, 왕춘잉

집회에서 왕춘룽은 세 자매가 1999년 초가을에 베이징에 청원을 갔던 경험을 떠올렸다. “우리 세 자매는 대법 수련 후, 심신이 무궁한 혜택을 받았고 사부님께서 가장 올바르시며 대법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됐습니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들은 베이징에서 다롄의 파룬궁 보조원 천전리(陳真利)와 쑨롄샤(孫連霞)를 만났다. 이 두 파룬궁 수련생은 다롄으로 돌아간 후, 연속적으로 박해당해 사망했다. 쑨롄샤는 2000년 1월에 박해당해 사망했고 시신은 왕춘잉이 근무하는 병원에 안치됐는데 왕씨 가문의 세 자매가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달려와 보니 쑨롄샤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등 전체가 상처투성이였다.

왕춘옌은 21년 이래에 그녀가 알고 있는 파룬궁 수련인 중에 21명이 박해로 목숨을 잃었으며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불법으로 갇혔다고 말했다. 최근에 또 파룬궁 수련생은 다롄시 국보 경찰관의 사전 모의하에 납치, 불법으로 가산을 몰수당하는 일이 여러 건 발생했고 또 몇 명의 파룬궁 수련생은 다롄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왕춘잉은 두 차례나 악명 높은 마싼쟈(馬三家)교양원에 수감돼 5년여 동안의 잔혹한 고문과 시달림을 당했다. “악명 높은 마싼쟈 마굴에서 매월 죄와 잘못을 인정하는 평가양식에 서명해야 했는데 저는 모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대대장 장춘광(張春光), 교도관 리밍위(李明玉) 등 6명의 악경에 의해 강제로 2인용 철제 침대 가운데서 수갑이 채워졌습니다. 오른손은 철제 침대 위 난간에 채워졌고 왼손은 철제 침대 아래 난간에 채워져 사람이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이 손은 수갑에 단단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의 손은 곧 붓기 시작했고 흑자색을 띠게 됐습니다. 그런 후 경찰은 발로 힘껏 침대를 찼습니다. 줄곧 더는 찰 수 없을 정도까지 찼고 저는 팽팽하게 당겨져 온몸이 마치 찢기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은 수시로 단단하게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흔들어댔는데 통증이 극도로 심해 마치 절개된 칼자국에 소금 한 움큼을 뿌린 것처럼 몸이 찢겨나가듯 아팠습니다. 당시에 선양(瀋陽)의 기온은 영하 17도에서 18도 사이였지만 저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酷刑演示:抻铐
중공의 잔혹한 고문 설명도: 수갑을 잡아당기다

“이 기간에 경찰은 반복적으로 저에게 서명을 강요했습니다. 거절하면 계속 수갑을 채웠습니다. 새벽 한 시 반이 돼서야 그들은 저를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16시간 내내 수갑에 채워져 있었는데 손은 부어서 만두 같았고 흑자색이 되었습니다. 손목과 손등은 열 몇 군데 피부가 수갑에 의해 닳아 찢겨 피가 흐르다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마싼자에서는 매월 서명을 거부하면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박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왕춘잉은 회억했다. 2009년 7월 20일 그녀는 마싼자에서 머문 마지막 ‘7.20’이었다. 2개월 동안의 정성 어린 준비를 거쳐 그녀는 2m 길이에 한자 너비의 현수막을 마싼자 2층의 붉은 벽 밖에 내걸었다. 위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천멸중공(天滅中共)! 삼퇴하여 평안을 보장받자(三退保平安)’라고 적었다.

왕춘잉은 “우리는 파룬궁을 박해하는 경찰이 어떤 잔혹한 박해를 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대법제자는 ‘진선인’에 대한 바른 믿음을 바꿀 수 없고 강압은 영원히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으며 박해는 결국 모두 실패할 거라는 것을 행동으로 세인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사과정 학생 부부가 베이징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노동교양 형을 선고당하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식인의 ‘사상문제’는 농장으로 보내 노동 개조당하는 것은 이미 반세기 이전의 역사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여전히 오늘날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2001년 설날, 란저우대학 박사과정 학생 탄샤오룽은 남편과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여러 명의 경찰에 의해 발길질로 매질을 당하며 경찰차에 끌려갔다. 쉬저우(徐州)로 돌아간 후, 부부 두 사람은 재차 납치를 당했고 가산을 몰수당했으며 아이는 보살핌을 잃고 전국 각지의 몇몇 친척 집을 돌아다녔다. 부부는 수감 된 지 몇 개월 후, 각각 1년 반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

'图6:二零二零年七月十七日,谭晓荣参加在中共驻美大使馆前的集会。'
2020년 7월 17일, 탄샤오룽은 주미 중공 대사관 앞 집회에 참여했다

노동교양소의 위생과 음식은 형편없었으며 매 파룬궁 수련생에게 두 명의 감시원을 배치했다. 24시간 동안 감시하는 것은 물론 함부로 욕하고 때리며 모욕했다. 여성도 밭을 갈아엎고 나무를 베며 모래를 차에 싣는 등의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많게는 기계나 소가 할 수 있는 작업도 무상 노동을 강요했다.

탄샤오룽은 “어떤 일반적인 노동이라도 노동교양소에서는 모두 매우 잔혹하게 바뀝니다.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를 요구하고 정해진 양에 대한 요구도 매우 높으며 극한까지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차 가득 모래를 실을 때 10분 이내에 마치도록 요구합니다. 매분 매초 필사적으로 해야 합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인데 바로 빨리빨리 빨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잔혹한 시달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탄샤오룽은 3박 4일 동안 서 있는 벌을 당한 적이 있는데 다리가 아프고 부었으며 머리는 혼미해졌다. 당시 60세의 파룬궁 수련인 리위(李玉)가 있었는데 서 있는 벌을 당한 지 반년이나 됐으며 더는 서 있을 수 없어 혼절 상태에 처했다. 그러나 감시원 두 명은 그녀를 끌고 달리기와 노동을 시켰다. 만약 졸면 대량으로 마시기, 강한 충격, 다리 차기 또는 이쑤시개로 눈 찌르기를 당할 수 있었다.

노동교양소에는 전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의 피를 채혈하고 혈압을 재는 사람이 있었고 당시에 탄샤오룽은 영문을 몰랐다. 몇 년 후,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의 장기를 생체로 적출하는 범죄행위가 폭로된 후에야 탄샤오룽은 비로소 노동교양소의 목적을 알게 됐다.

탄샤오룽과 같은 기간에 갇힌 파룬궁 수련인 허우유팡(侯有芳)은 맞아서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의 28세 수련인 쑹옌자오(宋彥昭)는 남자 무리들에게 박해당해 사망했다. 중공은 이런 소식을 극히 엄밀하게 봉쇄하고 있으며 함께 수감 된 곳의 사람들도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제가 겪은 모든 것은 다른 수련생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다른 수련생이 당한 박해의 상황도 빙산의 일각입니다. 다수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부터 들은 소식을 짜깁기한 것이거나 일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추정한 것으로 완전한 것은 나온 후, 밍후이왕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중공의 사악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라고 말했다.

‘90년대생’ 소녀, ‘신앙과 정의를 확고하게 견지하는 부모님은 진정한 영웅’

'图7:美国马里兰州一所公立小学的教师王玺在集会上讲述了自己在幼年就经历迫害。'
미국 메릴랜드 주의 한 공립 초등학교 교사인 왕시(王璽)는 집회에서 자신의 유년 시절에 겪은 박해를 이야기했다.

“21년 동안 제 삶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한 건 바로 이 한 차례 박해입니다. 아직 많지도 않은 제 인생에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이 죽는 슬픈 아픔을 겪게 했습니다.” ‘90년대생’인 소녀 왕시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 주의 한 공립 초등학교 교사이다. 그녀가 7살이던 해에 중공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했고 행복하던 네 식구의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이 사망했다. 비록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일가족은 ‘진선인’에 대한 신념이 동요된 적이 없다. 왕시는 그녀 부모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견지를 이해하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23일, 대법 자료 인쇄를 한 이유로 저의 어머니는 인쇄소를 몰수당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수련생이 함께 납치당했고 모든 값진 물품들은 전부 빼앗아갔으며 십몇만 위안(약 1700만 원)의 환산가치에 달합니다. 당시 8살밖에 안 된 저는 홀로 집에서 울면서 기다렸지만, 온밤 내내 아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석방된 지 몇 개월 후, 왕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베이징으로 대법을 위해 공정함을 청원하러 갔다. “천안문 광장에 막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현수막을 꺼내 들고 동시에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쳤습니다. 이어서 부모님은 한 무리의 경찰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주먹과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안경은 경찰에 의해 부서졌고 온 얼굴은 맞아서 선혈이 흘러내렸습니다. 나중에 부모님은 버스로 끌려가 하이뎬(海淀)을 구치소로 옮겨져 6일 동안 고문과 시달림을 당하고 고향 웨이팡(濰坊)으로 보내졌습니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감됐다. 어머니는 장기간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녔고 여러 차례 가산을 몰수당했다. “어린 저는 고민과 걱정이 없어야 할 어린 시절에 이 한 차례의 잔인한 박해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2001년 아버지는 노동교양 3년을 선고받았다. 어머니가 더는 납치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10살이던 왕시는 홀로 웨이팡에서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칭다오(青島) 리춘(李村) 노동교양소로 가서 아버지를 면회해야 했다. 불법 노동교양이 끝난 후, 아버지는 기존 회사로 돌아와 근무했다. 원래는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던 대학 영어 교수였던 아버지는 오히려 직장에서 출입문을 지키고 학생 기숙사를 청소하는 일을 배정받았다.

2007년 아버지는 재차 불법으로 5년 형을 선고당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원래는 90kg 체중이었던 사람이 시달림으로 65kg밖에 되지 않았으며 신체는 매우 허약해졌다. 2015년, 왕시는 미국으로 와서 공부했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50세이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왕시는 집회에서 “저의 아버지는 이 한 차례의 박해에서 영원히 저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이곳에 서서 저와 함께 중공의 사악한 행위를 말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모릅니다. 더욱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인성을 완전히 상실한 박해가 여전히 중국에서 지속하고 있고 아직도 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잔혹한 고문의 시달림 속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으며 더욱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체는 원래 일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공의 집권 통치와 교육체제의 세뇌 하에서 사람들은 정부가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고 정부가 당신을 붙잡아 감옥살이를 시키면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못을 저지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유년 시절 저는 한때 부모님이 감옥살이했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입에 담기 거북해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저는 오늘날 전쟁이 없는 이 세상에서 부모님처럼 정의와 신앙을 위해 항쟁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웅이며 제가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전 지린 건축사, 중공을 간파해 ‘삼퇴해야만 희망이 있다’

'图8:二零二零年七月十七日,来自吉林的建筑师赵庆凯参加在中共驻美大使馆前的集会。'
2020년 7월 17일, 지린에서 온 건축사 자오칭카이는 주미 중공 대사관 앞 집회에 참여했다.

1999년, 지린성 건축사 자오칭카이는 사업을 시작하고 신혼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갑작스러운 탄압으로 가정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주변 친척이 무고하게 박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그는 철저히 중공의 사악한 본성을 깨닫게 됐으며 “중공을 거절하고 삼퇴해야만 비로소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자오칭카이의 아내인 마춘샤(馬春霞)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억울한 감옥살이를 당했다. 그의 장인은 세 딸이 잇따라 납치된 후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다.

납치를 피하고자 아들이 6살 되던 해에 춘샤는 홀로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자오칭카이는 “이별하던 그 순간 제 마음은 형용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6살 된 아들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습니다. 원래 행복했던 가정인데 지금 중공의 폭정과 강한 압력으로 우리 부부는 이렇게 생이별을 한 채 살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6년 후, 일가족은 미국에서 다시 모이게 됐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오칭카이와 아들은 파룬궁 수련으로 걸어 들어오게 됐고 심신이 혜택을 받았으며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찾았다.

인생의 40년 동안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서 장오칭카이는 “중공은 공산주의의 유령이며 우리의 중화민족을 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지가 있는 중국인들이 모두 파룬궁 진상을 간파하여 중공을 멀리하고 공산당, 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에서 탈퇴해 희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중공을 거부하고 선량함과 동행하다

'图9:华盛顿DC法轮大法学会发言人葛敏在集会上呼吁良知尚存的人们远离中共,与善良同行。'
워싱턴DC 파룬따파학회 대변인 거민(葛敏)은 집회에서 양지가 아직 있는 사람들은 중공을 멀리하여 선량함과 동행할 것을 호소했다.

워싱턴DC 파룬따파학회 대변인 거민(葛敏)은 집회에서 파룬궁은 사람들 마음이 선을 향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신체를 건강하게 하고 사회 도덕을 되돌아 올라오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이 없지만, 서방에서 온 유령인 공산당은 ‘거짓, 악, 싸움’을 숭상하며 본질은 바로 ‘진선인’과 적이 된다고 말했다. 중공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사회의 곳곳까지 연루돼있고 민중이 중공의 거짓선전에 세뇌당해 미혹되어 이유 없이 파룬궁을 적대시하며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중공의 공범자가 되기까지 했다. 중국 사회는 금전 지상주의가 되어 신앙을 잃었으며 도덕이 하루에 천 리길 아래로 급속히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2020년 초에 우한 폐렴이 폭발적으로 발생했고 중공은 전염병 발생 상황을 은폐해 전 세계에 거대한 재난을 조성했다. 중국 밖의 감염자는 1300만 명 이상에 달하며 이미 57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해 국제사회가 중공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사면초가에 처해 있는 중공은 여전히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고 있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또 39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중공의 박해로 사망했으며 그중 15명은 중공의 감옥, 구치소, 파출소에 불법으로 갇혔을 때 박해당해 사망한 것이며, 또 5313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중공 경찰에 의해 납치와 교란을 당했고 132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불법적으로 형을 선고받았다.

거민은 “악을 행할 때 무지하면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희망의 출로가 이미 눈앞에 있는데 여전히 중공 사악과 한 무리가 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일 뿐입니다. 박해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지만 이미 막바지에 달했습니다. 양지가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 최후의 시기를 다잡고 자신의 살길을 선택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 기회는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19일
문장분류: 해외 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7/19/4091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