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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만난 저우쉐페이 (사진)

[명혜망 2004년 9월 14일] 지난 9월 11일은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을 받은 3주년 기념일이다. 이 날은 사람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었지만 중국에서 온 뤼차오후이(呂朝暉)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 밤, 그는 뉴왁(Newark) 국제공항에서 헤어진지 4년이 되는 아내 저우쉐페이(周雪菲)를 만날 수 있었다.


뤼차오후이와 아내 저우쉐페이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뤼차오후이 부부

*고귀한 수감자

뤼차오후이의 아내 저우쉐페이는 광고디자이너였는데 2000년 11월 중국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되었고 3년 강제노역을 판결 받았다. 이유는 그녀가 파룬궁 진상 전단지를 배포했다는 것이었다. 중국 싼수이(三水)시 여자 강제노역소에 갇힌 그녀는 파룬궁에 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기간 강제적으로 중노동을 해왔고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았다.

현재 뉴욕에 있는 뤼차오후이의 소개에 따르면, 파룬궁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도덕 수준을 제고하는 심신단련 공법으로서 “진(眞), 선(善), 인(忍)”을 원칙으로 하며 전세계에서 환영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장쩌민 집단의 질투 때문에 파룬궁을 비방, 박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안타까운 저우쉐페이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그녀는 신념을 위해 자신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애틀랜타에 갈 수밖에 없었다.

뤼차오후이는,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에 대해 법률을 적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저우쉐페이는 강제노역소에서 같이 수감된 범죄자 24명의 감시를 받았다. 그녀는 노역소 경찰들의 부추김과 격려를 받은 범죄자들로부터 각종 시달림과 학대를 받았다고 했다. 강제노역소에 있은 3년 동안, 노역소에서는 그녀가 남편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했고 장기간 강제로 출국 수공업품을 생산하게 했다. 모진 노동과 학대 그리고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영양결핍으로 그녀는 실명할 뻔했다. 그녀는 세뇌를 거부하는 다른 수련생들과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3년 노역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계속 노역소에 있어야만 했다.

예일대학의 중국전문가 예(葉)선생은 진선인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것은 9.11테러와 다를바 없고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심지어 9.11사건이 미국에 준 영향보다 더 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진선인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잠시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고상한 도덕, 자유로운 정신세계 등등으로 봤을 때 장래의 사람들은 그들을 중국 역사상 가장 고귀한 수감자들로 칭할 것이라고 했다.

*각 방면의 노력으로 마침내 석방되었다

뤼차오후이는 선전(深圳)에서 세무 관련 일을 했었으며 아내가 체포될 당시 결혼한지 2개월도 채 안 되었다. 그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해 3년 동안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수많은 편지와 청원서를 썼으며 아내가 감금된 것에 항의하는 많은 활동에 참가했다.

미국인들은 그의 아내를 구원하는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2002년, 미국국회 중의원의원 삭스비 챔플리스와 국회 상원의원 맥스 클레랜드는 각각 국무장관 파월과 부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중국에서 불법적으로 감금된 저우쉐페이를 구출해 줄 것을 촉구했다.

미국 조지아대학 학생연합회는 2002년 10월, 결의안을 채택하고 10만여 명 대학생들을 대표하여 중국정부에 즉각 조지아주 주민 뤼차오후이의 아내 저우쉐페이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상원과 미국인들의 압력하에 2002년 12월 22일, 주미 중국대사관은 중국외교부에게 뤼차오후이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해 줄 것을 허락하도록 했다. 주중 미국대사관은 에모리대학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들을 중국정부 관리들에게 전달하여 미국 상원과 미국인들이 이 사건에 대한 관심 정도를 전달했다.

또 많은 국회의원들이 美국무원과 총통에게 편지를 보내어 저우쉐페이를 구원할 것을 촉구했다. 조지아주 국회 중의원의원인 밀러는 주베이징 미국대사관에, 국회 상원의원인 린드는 주광저우(廣州) 미국대사관에 저우쉐페이의 지속적인 석방 노력을 촉구했다. 미국 국회의원 루이스는 저우가 형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총리 원자바오에게 편지를 써 즉각 그녀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조지아의 100여 명 주(州)의원들은 만장일치로 624호 결의안을 통과하고 저우를 석방할 것을 호소했다.

미국 매체들도 뤼차오후이 부부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애틀랜타 Fox-5 TV방송국에서는 2003년 12월에 저우쉐페이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뤼차오후이를 찾아 인터뷰했고 그날 저녁 뉴스에서 중점 뉴스로 보도했다. 미국 동남부에서 제일 큰 신문인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몇 번이나 반복하여 저우쉐페이 관련 소식을 실었다. 그 중 한 보도는 “나는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녀는 사라졌다(I came home ,she was gone)”라는 제목으로 뤼차오후이 부부의 99년 7.20 이전의 행복했던 생활과 탄압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고통과 상처를 대조하여 썼다. 이 보도는 이후에 다른 신문들에서도 전재하여 실었는데 나중에 뤼차오후이가 아내를 구원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미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9.11 밤의 만남

저우쉐페이는 광둥(廣東) 싼수이(三水) 여자 강제노역소에 감금된지 3년이 지난 2004년 1월 13일에 끝내 석방되었다. 그러나 뤼차오후이는 당시 아내와 연락이 끊겼다. 뜻밖에 처가의 전화 번호가 바뀌었던 것이다. 뤼는 처가의 전화가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우쉐페이는 창룽 BR-32기를 타고 태국과 시애틀을 경유한 뒤 9월 11일 밤에 뉴욕의 뉴왁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뤼차오후이는 꽃을 든채 공항에서 헤어진지 4년이 되는 아내를 기다렸다. 뉴욕, 뉴저지, 보스턴, 애틀랜타 등 지역에서 온 파룬궁 수련생 대표 30여 명도 저우쉐페이를 환영하는 행렬에 끼어 있었다. 아내를 만난 소감을 묻는 기자의 물음에 뤼는 그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나게 되었는데 물론 매우 기쁘다고 대답했다. 강제노역소에서 남편과 연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편의 상황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뤼차오후이는 이번 사건을 국제사회에 더 널리 알려 중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감시를 받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박해를 경감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장쩌민 등 사람들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것은 정정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우쉐페이는 석방되었지만 그녀가 감금되었던 싼수이 여자 강제노역소와 기타 노역소에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들은 여전히 잔혹한 박해를 받고 있다. 뤼는 이러한 이유로 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계속 노력하고 호소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아내와 함께 그녀의 구원에 도움을 주었던 정부 관리, 비정부기구와 학생단체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항 출구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본 저우쉐페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전통 중국 복장을 입고 환영하러 나온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합장하여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기자와의 짧은 인터뷰를 끝낸 저우는 태국에서 산 기념카드를 남편에게 선물로 주었다.

기사 출처: 대기원 사이트(epochtimes.com)

문장발표: 2004년 9월 14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문장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9/14/841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