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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 수련으로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박해 속에서도 진상을 알리다

[밍후이 정위옌(鄭語焉)기자 취재보도] 어떤 사람이 중증의 불치병에 걸렸는데 동서양의 의술과 민간요법까지 다 써봐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이 사람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 후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나았으며 신체도 건강해졌다. 이 같은 좋은 수련을 당국이 끊임없이 박해하고 포기하게 하는데,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다. 중국, 그곳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현재 독일에서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 청스(成實-가명)가 당시 중국에서 겪었던 일인데, 이런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병 치료 위해 동서양 의술과 민간요법을 찾아 헤매다

27, 28세 될 무렵 이제 막 가정을 이루고 아름다운 인생을 시작하는 황금기에 청스는 ‘바이러스성 결막염’에 걸렸다. 눈에서 끈적끈적한 하얀 분비물이 흰 막을 형성해 시력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쓰리고 가려워 매우 괴로웠다. 온몸에 열이 나 41°C까지 올라갔다. 병원 검사에서 안구 밑 부분이 녹아버렸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는 현재 어디에도 치료 약이 없다면서 다른 쪽 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한쪽 눈의 흰 막 표면을 긁어내고, 그 눈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청스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입원했을 때 저와 똑같은 증상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어쩔 수 없이 눈을 긁어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안질환 말고도 허리디스크가 있었는데, 신경이 눌려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왔고, 앉거나 눕거나 걷는 게 매우 힘들었다.

중의사가 뼈 사이에 침을 놓고 이어서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약을 주입했는데, 매번 할 때마다 한 시간씩 걸렸으며, 침 치료 전에 마취를 했어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7일 동안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어 다시 양의를 찾아 수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의사는 수술해도 효과가 없을 것 같다면서 잘못하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 씨의 당시 고통스러운 상황은 말 그대로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였다.

청스는 말했다. “이 두 가지 병 때문에 고통이 너무 심했어요. 정말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아직 어렸고, 가정에는 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통을 참아가며 억지로 버텨야 했어요. 그때 생각으로는, 정말 병이 나을 수 있고 몸이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제 모든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치료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병은 낫지 않았어요.”

하늘이 주신 기회

4, 5년이 넘게 청스는 중의와 양의, 민간요법을 찾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친척 두 분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 청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중 한 분은 골질증식 환자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항상 약을 먹으며 지냈는데, 파룬궁을 연마한 후 말끔히 나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또 한 분은 평소 겨울에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많은 기공을 연마하고 동계 수영도 해봤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파룬궁 수련 후, 동계 수영이나 다른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몸의 모든 부분이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청스는 ‘파룬궁은 정말 병을 치료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청스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다롄(大連)시 체육관에서 열린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의 기공 강연을 들었다. 1994년 12월 말의 일이었다. 청스는 “사람들이 제게 책 한 권을 보여줬어요. 그때 저는 책을 보고 어느 강, 어느 단락, 어떤 문장에 저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봤어요. 오직 병 치료에만 열중했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의심이 가득했다. ‘병 치료를 하려면 아무래도 환자의 병세를 보면서 진찰해야 하고 마사지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방법도 없이 자기 혼자 연공하고 책만 본다고 병이 나을 수 있을까?’ 청스는 의심을 품고, 연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고통스러운 병을 해결할 방법만 찾고 있었다.

모든 계층 사람이 연마하다

1995년 5월 초여름이 되자 청스는 종아리 수축이 심해져 일할 수 없고 자전거도 탈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한 청스는 막다른 길목에 이르러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나는 병원에도 가지 않고 민간요법도 찾지 않겠다. 어차피 찾아봐야 효과가 없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파룬궁만 연마하겠다.’

이렇게 결심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청스는 새벽에 집 근처 공원에 나가 단체 연공에 참가했다. 청스는 말했다. “수련생을 만나보니, 정말로 좋았어요! 할머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식인, 교수, 공무원도 많았고 대학생도 있었으며 각 연령층이 다 있었어요. 그걸 보고 제 관념이 단번에 바뀌었죠. 당시 크게 감동했습니다.”

청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파룬궁에는 정말로 좋은 것이 있는 게 분명해. 이 연공장이 처음에는 수십 명으로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00명이 넘었고 갈수록 많은 사람이 연마하는구나.’

이때부터 청스는 매일 아침 연공을 하고, 낮이나 밤에는 연공장의 수련생과 함께 법공부를 했다. 청스는 생각했다. ‘와, 이제 알겠다. 원래 이것은 수련이며,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것이구나.’ 법을 배울수록 이치를 깨닫게 되고 마음이 안정됐다. 병의 고통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청스는 눈병과 허리디스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종아리 수축도 부지불식간에 모두 나았다. 청스는 말했다. “95년 말, 냉장고에 있던 모든 약을 버렸습니다. 병이 없어지고 몸이 건강해졌어요. 약이 다 뭡니까? 모두 필요 없게 됐어요.”

진선인을 실천해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안정되다

매일 진선인의 가르침 속에서 연마함에 따라 청스의 씬씽(心性)은 제고됐고 신체도 건강해졌다. 그가 말했다. “저는 수련하기 전에는 따지기 좋아하고 명리를 위해 다투며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했어요. 이것저것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낮에는 하하 웃으며 겉으로는 누구에게도 좋게 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미워했죠. 울화가 치밀고 열이 나서 잠을 못 이루었는데, 어떻게 몸이 건강했겠어요? 수련 후 저는 진선인의 법리를 명백히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진심으로 잘 대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개인 이익을 위해 소소하게 따지지 않아도, 마땅히 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모두 왔어요. 집도 생겼고, 승진도 했어요. 직장에서는 직원들이 저를 실무 책임자로 뽑아 차량 안전과 보험, 배차를 담당하게 하면서 저를 신임했어요. 그들이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선인을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직장 동료 모두 청스가 파룬궁을 수련해 병이 없어지고 몸이 아주 건강해진 것을 알게 됐다. 청스는 자신이 수련 전후 마음으로 겪었던 과정과 경험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는데, 이로 인해 동료 중에 대법(=파룬궁)을 얻은 사람도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현재 몇 분이 착실하게 수련을 하고 있어요. 사실 당시 우리 직장에는 저뿐만 아니라 몇 분의 간부와 임원들도 수련하고 있었어요. 다만 그들이 조용히 수련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던 거죠.”

혹독한 박해에도 수련을 견지하다

파룬궁의 고상한 풍격과 풍모는 각 계층 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놀라운 효능, 그리고 수련자가 일상생활 중에서 진선인을 실천하는 모습 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1992년 5월 처음 전해지기 시작한 파룬궁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1억 명이 수련하게 됐다. 이것이 ‘거짓·악·폭력(假·惡·暴)’을 근본으로 삼는 공산당 장쩌민 정치집단에 두려움과 강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1999년 7월, 그들은 국가의 모든 조직을 총동원해 파룬궁에 대한 잔인무도하고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감행했다.

청스와 그 도시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은 약속이나 한 듯 시청 민원실에 서면으로 상방(上訪)을 하고, 대법을 위해 바른말을 했다. 저녁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으나 응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시청 측은 큰 차량 몇 대를 준비해 수련생들을 어느 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가서 사람마다 인적 사항을 상세히 기록한 후 석방했다.

그 후 중국공산당(중공)의 조치로 환경은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는데, 수시로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청스는 동료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회사 서기와 보위처(保衛處)로부터 공개적으로 경고를 받았다. 동료들은 감히 그와 접촉하지 못했다. 청스는 수련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청스는 거듭 보위처 직원에게 진상을 알렸지만, 회사는 날마다 대법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자료를 만들어 사무실에 배포하기까지 했다. 청스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정말 더는 버틸 수 없었어요. 결국 회사를 그만뒀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공의 박해로 그의 가정도 큰 타격을 받았다.

청스는 시에서 세뇌반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610 사무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불안정했지만, 진상을 명백히 아는 동료나 사장의 도움으로 몇 차례 610의 마수를 가까스로 피하며 10년의 세월을 그럭저럭 지냈다. 청스는 그 후 어떤 호의적인 사람의 도움을 받아 2010년 조국을 떠났다.

만리타향에서 중공 박해의 진상을 폭로하다

청스가 탄 비행기는 독일의 어느 비행장에 착륙했다. 청스는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야, 이 나라는 정말 좋구나. 하늘도 유난히 푸르네. 그림같이 파란 하늘에 뜬 흰 구름을 보고, 평생 처음 이렇게 달콤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니 진정 자유 세계 도착한 것이 실감 나는구나. 마음속의 돌덩이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다. 이전에 중국에서는 24시간 귀를 쫑긋 세우고 사방팔방의 바람 소리, 풀 소리까지 자세히 들어야만 했는데, 이제는 공포에 질렸던 날이 다시는 오지 않겠구나. 드디어 자유의 세상에 도착했다!’

수련 환경도 중국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만큼이나 좋았다. 독일에 안착한 후, 청스는 착실하게 수련하며 항상 진상 거점에서 자료를 배포하면서 사람들에게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과 박해 제지에 동참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었다. 그는 또 매일 인터넷 전화를 통해 국내 동포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공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를 탈퇴)시켜 평안을 찾도록 권했다.

몇 달 전 둥베이(東北)의 한 중년 남자에게 진상 전화를 걸었다. 그는 ‘공산당’ 이란 세 글자를 듣자마자 화내며 말했다. “공산당 얘기는 입에 꺼내지도 마세요. 나는 소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원도 아니고 공청단에도 가입하지 않았어요. 나는 공산당과는 조금도 관계없습니다.” 청스는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어렸을 때 붉은 스카프를 매고 홍가(紅歌)를 불렀고, 작은 주먹을 쥐고 당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때 당의 낙인이 뚜렷하게 새겨져 당신은 이미 그 구성원이 됐습니다. 그것은 수시로 당신을 따라다니며 희생물로 삼을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속 깊이 그 낙인을 지우겠다고 선서하지 않는 한, 그것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은 명백히 알아듣고 ‘산쥔(善君)’이란 가명으로 소년대 탈퇴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올해 3월 18일,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쓰(佳木斯)시 탕위안(湯原)현에서 6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납치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청스와 해외 수련생은 해당 책임 기관에 릴레이 방식으로 전화하면서 진상을 알리고 석방을 요구했다.

하루 뒤 탕위안현의 수련생이 문자를 보내왔는데, 6명의 수련생이 이미 모두 석방됐다면서 풀려난 수련생의 말을 전했다. “이번 납치 사건은 경찰 형사대대가 참여했는데, 형사대대는 국보대대에 전화해 국보대대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며 큰 소리로 싸웠다.” 탕위안현 수련생은 “깨달은 사람들은 책임을 떠넘기며 서로 미루고 있다. 진상 앞에서 세인들이 각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문발표: 2021년 8월 29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29/4301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