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견인불굴의 정신’ 세계미술전 – 인천전시회 후기

인천 그림전시회를 마치면서

 


2004. 11. / 인천수련생

지난 2004. 11. 19. (금) ~ 11. 25. (목) 까지 인천대학교 도서관과 인문관에서“견인불굴의 정신 세계미술전”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인천지역에서 그림전시회를 진행하면서 나에게는 많은 제고가 있었다.

비록 중도에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는 않지만 내용 면에서는 지금까지의 진상행사 중 가장 알찬 행사였다고 생각된다.

전국을 순회하며 진행되는 그림전시회를 지켜보며 사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생각을 했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한다고 하여 인천에서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먼저 그림전시회를 해 보았던 모 동수로부터 그림전시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세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안양에서 한 동수로부터 그림전시 제안이 왔다.

처음에는 항상 해 오던 진상행사보다 조금 어려우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선 전시회를 하려면 장소와 그에 따른 일정한 자금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자금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다행히 동수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자금은 해결되었다.   

다음은 장소문제였다. 장소를 확인해 보니 한 곳이 12월 초에 가능했다. 그런데 그림전시를 제안했던 수련생이 인천대학교에 장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로서는 학교내의 학생들에게 진상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으므로 선뜻 승낙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인천지역의 특성에 맞도록 전단지의 문구를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같이 의논하며, 일을 분담하던 동수들이 출장 등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때에도 인천에서 행사를 할 때면 흔히 있던 어려움이었지만 이번이 조금 더 심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쳤다. 거의 모든 준비를 혼자서 해야 했다.

전단지 디자인과 제작, 발행매수 선정, 배포방법, 대외 홍보, 그림전시회 준비 등을 준비하느라 가급적 다른 일들은 뒤로하고 전시회 진행에만 전념해야 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안양에서 그림전시가 끝나면 곧바로 인천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다. 쉬는 기간동안 보관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동수들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당초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기기로 했다.

전단지를 인쇄할 업체에 제작을 맡기고, 다음 일을 준비했다. 전단지 제작이 완료되어 발송준비 중 일때 다시 그 동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정된 기간 중 일부날짜는 그 장소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감한 일이었다. 많은 전단지에 찍힌 날짜를 수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 그 동수의 뒤 늦은 일방적인 통보와 무책임한 두루뭉실한 말, 밀어붙이기식의 일처리 방식이 마음에 걸렸던 터라 불만이 터져나왔다. 순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예전에 나 자신의 일처리 방식이었으며, 가정에서 해왔던 행동들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주변사람들이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고개가 숙여졌다. 깨달으니 아이디어가 나왔다. 도서관에서 전시할 수 없는 기간은 근처의 인문관으로 장소를 옮겨 전시하기로 했다.

이미 전시회를 진행했던 광주의 동수님이 1시간여에 걸쳐 경험을 전화상으로 들려주었다. 서울의 동수님은 교류과정에서 배포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정도 윤곽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우편으로 보낼 곳에 대한 주소 확보가 필요했다. 다량의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으므로 컴퓨터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작업 중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념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경로를 통하였으나 우리 대법사이트만은 접속할 수 없었다.

의례히 인천에서는 행사를 할때면 발생하는 일이라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동수와 인천대학교를 답사하고 몇 일 뒤 현수막을 부착하려고 다시 인천대학교로 갔다. 차를 세우고 현수막을 붙일 곳을 찾던 중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차로 돌아오니 세워놓았던 차가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급히 차로 가서 차문을 열려고 했으나 움직이는 차의 잠긴문을 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문을 열어 브레이크를 밟으니 다른 차와 거리가 50센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다음 현수막을 달면서 원인을 찾아보았다. 동수의 인식은 현수막 부착을 규정에 따르자는 생각이 있었고, 나는 학교내부이니 규정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차이인 것 같았다. 이번 일을 통하여 나는 수련인이라면 어디에서나, 설사 자유로운 대학 내부이더라도 그 곳의 규정과 방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시회 그림이 도착하는 전날 저녁 갑자기 배에 무엇이 맺힌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밤새껏 토하였는데, 평생 처음으로 이처럼 토한 것 같다. 새벽까지 토하고 나니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를 하루 쉬려고 하다가 여기서 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출근을 하였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저녁에 그림이 오는 곳으로 갔다. 이것저것 움직이며 준비하고 나니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역시 교란이었던 것이다.

전시회 첫날, 중국인 유학생 5명이 그림을 보자 격한 어투로 항의하며, 그림을 발로 차려고 하였다. 심지어 전시회장 사무실로 찾아가 마성을 폭로했다.

당시 그림전시회장에 있던 교포수련생들은 급히 진상을 말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었다.

어떤 이는 “건강의 길” 책자를 난폭하게 찢어버리기도 했다. 분위기가 긴장되게 흘렀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한국의 학생들은 그림을 보며 관심을 표했다.

다음날 도서관 측으로부터 토요일 1시 이후와 일요일은 휴관일이라 그림을 전시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 왔다. 우리가 아직 그 직원들에게 진상을 알리지 않았음을 알고 즉시 진상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완강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속인의 인맥구조를 이용했다. 이러한 처리방법은 우리의 오점이 되었지만 달리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단지를 학교 각 게시판과 곳곳에 부착하며 학교를 돌았다. 그런데 두 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우리가 부착한 전단지를 찢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들에게 떼지말기를 요청하자 그들은 아주 격렬하게 저항하며 우리가 말할 틈도 없이 폭언을 쏟아내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 곳의    유학생들은 주로 고위층의 자녀들이라 사회에 대해 안하무인 격이었다. 독해가 너무나도 깊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우리는 대책을 논의했다.

여러 가지 안에 제출되었으나 공통된 점은 이런 모순이 있음을 기회로 진상을 선하게 알리자는 것이었다.

서울의 한 동수분이 전단지와 같이“<견인불굴의 정신 세계미술전>을 방해하려고 위협하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알림”이라는 제목의 한글과 중문으로 된 글을 붙이자는 제안과 경찰에게 보호요청을 하며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자는 제안으로 당일 밤까지 글을 작성했다.

전시회 삼일째 되는 날 경찰에게 보호요청을 하면서 진상을 하니 그들은 인천대학교에 100여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와 있으며 사상적으로 타 중국인과 다르게 독해가 아주 심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국제교류센타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유학생 대표가 있는데 이 대표는    타 학교의 유학생들과도 교류가 된다고 한다. 어제 작성된 알림문을 게시판에 전단지와 같이 붙였으나 그 유학생들은 여전히 찢어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그 찢었던 학생을 보게되어 사진을 찍으려 하니 격력하게 저항을 했다. 고위층의 자녀들이라 중국에서 거침없이 하던 행동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이었다. 주위의 한국인 학생 몇 명이 그 여학생을 도와 우리를 제지하려다 진상을 듣고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 여학생는 두고보자는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이것으로 더 이상 전시회가 방해받지 않기를 바랬다. 마침 경찰은 국제교류센타에 연락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도서관에서 전시회 안내 현수막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독해된 유학생의 소행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산에서 온 동수분과 인천 교포수련생 2명이 다시 한번 국제교류센타를 찾아가 진상을 알렸다. 오후에는 안산. 서울. 일산 등지에서 온 동수들이 유학생을 찾아다니며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많은 경험을 해 왔던 동수들이라    설득력있게 독해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늦은 오후 무렵 다시 한번 좋지않은 소식을 전해들어야만 했다.

유학생들이 본국의 학교에 연락해 인천대학교에 압력을 가한 것이다. 인천대학교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미술전시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 왔다. 중국과의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인천대학교로서는 인권보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우선 급히 도서관장을 찾아 진상을 알렸지만 이미 늦었다. 속인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계획대로 계속 했겠지만 파룬궁의 이미지에 누락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용히 마무리지으며 전시회를 중도에 마치기로 결정했다.

많은 아쉬움을 남겼으며, 시종일관 정념의 부족함을 느꼈다.

이번 행사에서 많은 모순이 발생된 만큼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새롭게 구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