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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200년간의 미술에 대한 해석 (2)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화려한 르네상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역사의 한 장에 나오는 황종(黃鐘), 대려(大呂)처럼 업적이 매우 위대하다. 이번 인류문명의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성숙해졌고, 향후 200년간 서양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200년은 각종 상생상극의 요소가 격렬하고 미묘한 갈등을 겪으면서 음양의 균형이 점차 무너지는 단계였다. 무수히 많은 관련 요인과 배후의 심원함은 필자가 한두 편 문장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당시 서양 미술의 일반적인 상황과 그 역사 시기가 사람에게 준 일정한 시사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대(相對)와 상합(相合)

예술 창작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면 천주교와 개신교의 태도는 완전히 반대였는데 이는 역사와 관련이 있다. 문명의 시초부터 인류는 예술 작품을 통해 계속해서 신에 대한 숭배와 천국에 대한 동경을 표현해왔다. 중세에 기독교가 유럽의 사상을 주도적으로 장악했을 때 교회는 미술 작품을 이용해 많은 문맹자에게 교리를 전파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기에 예술가들은 신성한 주제를 표현하도록 권고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수행하는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 수도사들이 수련 상태에 들어가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자세한 것은 ‘예술사로 보는 인류사상의 변천’을 참고하기 바람) 일부 신학교에서는 예술가에게 예술 기법에 대해 전문적인 조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2세기에 가톨릭교 시토수도회(Cistercians)는 기도할 때 흑백의 단색 컬러가 수도사의 잡념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일부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시각적 자극을 줄이기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흑백으로 만들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감각적 자극을 줄임으로써 수행에만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이 관행은 점차 다른 종교로 퍼져 특정 범위 내에서 관습을 형성했다. 13세기 중반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연회색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유행했고, 15세기에 이르러 북부에서는 이미 대중적인 모습이 됐다. 일부 종파의 수도사들은 매년 40일 동안의 사순절 기간에 채색 제단에 소박한 무채색 천을 깔아 가렸다. 제단의 그림이 3절 용지로 되어 있으면 좌우를 두 개의 문처럼 닫아 중앙에 있는 채색 그림을 덮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물건으로 덮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에게 닫은 후 보이는 외면에는 단색 그림 두 점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 회색을 전문적으로 ‘그리자유(Grisaille)’라고 불렀다.

포르티나리 제단화(Portinari Altarpiece)의 닫힌 모습, 닫힌 면은 단색으로 완성했다. 작가는 플랑드르 화가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 판에 그린 유화, 제단을 펼치면 253cm×1475cm 크기, 1475년경.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나타난 후 신앙의 파동은 미술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전성기의 다양한 예술적 아이디어와 기법, 풍격의 끝없는 확장과는 달리 예술의 발전은 상생상극의 요소에서 서로 다른 진영의 강화 및 통합 추세가 점점 더 반영됐다. 각 방면의 역량이 모두 조여 올 때 다른 요소의 대립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 복잡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 이후, 르네상스 시대 예술계에 나타난 종교 주제 남용의 혼란 상태에 대응해 가톨릭교회는 종교 형상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히 규범화하기로 결정했다. 콘텐츠를 엄격히 규제해 예술가가 종교적 주제를 묘사할 때 엄숙한 장면을 제시하고 작품에 신성한 느낌을 표현하도록 했다.

16세기 후반에 종교전쟁이 심화되면서 가톨릭교와 개신교는 미술에 대한 양극화된 태도를 보이게 됐다.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사치에 반대함에 따라, 예술의 소박함을 옹호하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주제를 금했다. 하지만 개신교가 반대한 것은 바로 가톨릭이 지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수천 년간 예술계에서 신을 묘사하는 일관된 전통을 우상숭배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오랜 경험을 가진 교황청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자금을 투자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시각예술로 천국의 웅장함을 묘사하고 가톨릭 대성당을 숨 막히는 예술 궁전으로 장식해 이를 통해 대중의 귀의(皈依)를 유도했다.

평온함과 균형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미술 풍격과는 상당히 달리, 16세기 말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웅장하고 역동적인 미술은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바로크’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 음악, 건축, 장식 미술 등 예술 분야 전체가 움직임과 변화, 웅장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해 이런 경향은 17세기 유럽에서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신의 섭리의 승리(The Triumph of Divine Providence’, 돔형 프레스코화, 작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 1400cm×2400cm, 1632~1639, 로마 바벨리니 궁전 로비에 현존, 작가는 건축, 조각, 회화 등 많은 요소를 하나로 집약했고, 작품은 바로크 미술 양식이다.

동시에 바로크 양식에 대응하는 또 다른 주요 예술 양식은 르네상스의 미학을 계승한 고전주의(Classicism)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이런 예술 풍격은 프랑스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고전주의 미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을 모델로 삼아 합리성을 옹호하고, 규범을 따르며, 우아하고 조화로운 예술에서 진리를 추구했다.

17세기 유럽 국가 군주들처럼 프랑스 통치자들도 국력이 상승하는 시기에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예술의 힘을 사용하기를 희망했다.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프랑스는 예술에서 개신교 국가의 금기가 없었고, 프랑스는 프랑수아 1세 이후로 예술을 발전시키는 국가적 전통을 형성해 왔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은 계속해서 자금을 투자해 예술적 감화력에 의존해 ‘왕권신수’ 사상을 전파했다.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필립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의 모세와 십계명(Moïse et les Dix Commandements), 캔버스 유화, 92cm×75cm, 1648년 완성.

프랑스가 미술에 부여한 문화적 사명처럼, 1648년에 프랑스 왕립미술원(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의 설립은 향후 3세기 동안 서양 미술계에서 프랑스가 선두 위치를 다지게 했다.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역사상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는 아니지만 국력이 강성한 적당한 시기에 설립되어 서양 미술의 중심을 이탈리아에서 점차 프랑스로 옮겼다. 예술아카데미 제도가 널리 보급되는 것은 실제로 서양 사전(史前) 문명 시기에 있던 예술의 학술화 길을 이어받는 것이다.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발전과정에서 학술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제시한 미술 이론은 점점 성숙해져 모든 국가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네덜란드는 또 다른 미술이 번성하던 지역이었다. 비록 미술 경제는 발달했지만 그 지역에서 인기를 끌던 장르인 풍속화는 우아함이 없고 깊이가 얕아서 밀물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주로 시장 경제에 의존한 네덜란드 미술은 매우 두드러진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탄탄한 학문 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영향력 있는 미술이론 논문이 부족해 미술상의 학술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예술은 결국 영성이 매우 강한 학과라 경제적 기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남쪽의 플랑드르 등은 원래 네덜란드와 함께 네덜란드에 속해 있었는데 1556년 이후 스페인이 통치했다. 1581년, 북부 7개 성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후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따라서 17세기에는 양쪽 예술의 발전이 갈라졌다. 네덜란드 화가들과는 달리 앤트워프 출신의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이든 브뤼셀 출신의 필립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 1629년 프랑스로 전입)이든, 그들은 그림을 그릴 때 프로테스탄트의 금지 사항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다해 뛰어난 기술로 작품에서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 사실 예술은 신을 표현할 때만 번성할 수 있고, 신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화가들은 당시와 이후 세대에 모두 명성이 높았고 음식과 옷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격 인하 마케팅을 통해 시장 경쟁력을 추구해 결국 많은 예술가가 빈곤에 빠진 네덜란드 화가들의 비극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술 아카데미의 설립은 또한 이 당시 예술의 엄격함과 규범을 반영한다. 교사가 수업을 통합하고 학생이 집단으로 학습하는 방식은 예전에 미술계에서 공방식으로 운영하던 도제 제도와는 자연스럽게 달라졌고, 전체적인 예술 풍격의 규칙화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작은 유파들이 이러한 통일 추세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고, 각국의 회화 풍격도 국제 학술교류에서 점차 일정한 통합 추세를 보였다.

대학의 표준화로 인해 개인적인 열정이 풍부한 작품은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은 모델링, 균형, 관계 스케치와 같은 요소를 강조하면서 고전 예술 풍격을 전체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학생들이 다량의 색채학파 연구에 착수하도록 장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 명암, 동세(動勢), 열정을 중시하는 바로크 예술가들은 그들의 예술적 개념을 아카데미에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고전주의 풍격과 바로크 풍격은 대치한다기보다는 경쟁과 공생의 관계였다. 특히 17세기 말 이후로 점점 더 많은 바로크 예술가들이 아카데미 정상에 자리를 잡았고 아카데미의 예술적 풍격을 변화시키는 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생상극의 관계는 바로크와 고전주의가 서로를 움직이고 시너지 효과를 내게 해서 여러 곳에서 반영됐다. 예를 들어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바로크와 고전주의가 결합된 산물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고전주의 풍격의 건물이지만 실내 장식은 주로 바로크 양식이다. 일부 홀은 바로크의 변형인 로코코 양식이다. 당시 사람들의 심미관이 하나의 예술 유파에 의해 제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계속)

 

원문발표: 2020년 9월 10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0/411513.html